183화
해가 진 늦은 저녁, 조용히 만찬을 즐기고 있을 때, 만약을 위해 남겨 두었던 근위대의 병사 너덧이 안뜰에 도착해 카르낙을 알현했다.
“찾아보았지만 브리다스의 시신은 보지 못했습니다. 알레온의 시신은 눈 속에서 발견했고 멜타의 시신은… 천막 안에서 찾았습니다.”
“천막 안?”
핀이 되물었다. 병사는 답했다.
“네. 멜타의 시신은 칼에 찔려 있었습니다. 배와 목에 큰 자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칼에 찔려 사망한 것이 분명합니다.”
“오합지졸들이로군.”
핀은 머리를 저으며 혀를 찼다. 익숙한 것들이지. 구심점을 잃고 난 후 생기는 혼돈과 싸움에 대한 이야기는.
“부상당한 군인들은… 버려져 있었습니다. 어린아이들과 아녀자들 역시 두고 간 듯합니다.”
“달아나는데 걸리적거리는 것들일 테니 두고 갔겠지.”
“그들은 어떻게 처리했나?”
핀의 말에 이어 카르낙이 물었다. 병사는 난감한 얼굴로 우물거렸다.
“딱히… 이렇다 할…. 그냥… 그대로 두고 왔습니다.”
모조리 죽였어야 했던 걸까,
“그대로 두어도 몇 날 버티지 못할 성싶어서…”
“어떻게 하는 게 좋겠어, 릴리?”
옆자리에서 조용히 과일을 집어 먹던 릴리에게 대뜸 카르낙이 물었다.
“네?”
“부상당한 군인들과 아이들 말이야. 당신이라면 어쩌겠느냐고.”
“…….”
릴리는 어색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부상당한 군인과 아이들이라.
“글쎄요. 군인들은… 죽이겠어요. 아이와 부인들은 거둘 테고요.”
“이 땅에서 살육은 안 됩니다, 왕비 전하.”
베오르토가 조심스레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릴리도 그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알고 있어요. 하지만 먼저 공격을 감행한 건 그들인걸요.”
“그 때문에 아마네스 여신님의 엄벌을 받았지요. 그러니….”
베오르토는 한껏 목소리를 죽였다.
“그대로 내버려 두시면 됩니다, 전하. 손에 피를 묻힐 필요가 없지요.”
그러니 그대로 죽도록 내버려 두면 된다. 베오르토는 씨익 웃으며 잔을 들었다.
“모두 신의 뜻이 아니겠습니까.”
카르낙이 나섰다. 그는 술잔의 주둥이를 만지며 말했다.
“어린애와 부녀자는 데려오도록 하지. 어떤가?”
카르낙에게서 베오르토로 다시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바라보는 눈에는 의아함이 담겨 있었다. 카르낙 발투만이 누군가를 죽이라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살리라는 것을 제안하고 있다. 그것도 에나에게. 에나는 거부할 수 없었다. 그는 일부러 활짝 웃었다.
“국왕 폐하의 자비로움에 경애를 표합니다. 과연 앨버그의 주인다운 태도이십니다.”
“발투만 국왕 폐하를 위하여!”
누군가가 자리에서 잔을 들며 외쳤다, 모두가 합창했다.
“발투만 국왕 폐하를 위하여!”
릴리도 그를 따라 잔을 들고 외쳤다. 그러고는 의아한 표정으로 남편을 살폈다. 그날 밤, 만찬이 끝난 후 릴리는 잠자리에 들어 그에게 물었다.
“어째서 아녀자와 아이들은 데려오자고 하셨어요?”
카르낙은 이불을 걷어 내며 웃었다.
“그러는 당신은 어째서 군인들은 죽이자고 했어?”
“그거야…”
“내가 아는 당신이라면, 분명 그들 모두를 거두자 했을 것 같은데 말이야.”
“내가 아는 당신이라면 그들 모두를 죽이라고 했을 테고요.”
“많은 일들이 있었어. 릴리. 우린 아마 조금씩 변해 버린 거겠지.”
그는 빙그레 웃으며 이불 속에 누웠다. 파니릴리는 평온한 표정을 눈을 감는 카르낙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난 당신을 따라 죽을 고비를 넘기며 잔인한 삶의 가운데로 뛰어들겠노라 맹세했어. 그리고 당신은… 당신은 내가 죽을 고비를 넘길 때마다 조금씩 그 삶의 가운데에서 물러나기 시작한 걸까. 너무나 치열하고 잔인하고 숨 막히는 그곳에서?
그의 말대로였다. 서로 조금씩 변해 가고 있다. 그러다가 종국엔 아예 서로가 반대편에 서 버리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들었다. 카르낙의 말이 떠올랐다. 우리는 무엇이냐는. 그 물음이.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
“이런, 빌어먹을.”
테이먼 테르조는 바닥에 엎어져 욕설을 지껄였다. 말똥에 발이 미끄러져 시궁창에 머리부터 처박혔다. 코를 찌르는 악취에 정신이 혼미했다. 제 처지가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이봐! 굼벵이!”
매짐이 그를 불렀다. 테이먼 테르조를 간수 하는 것이 매짐이 맡은 첫 번째 일이었다. 그가 들어오는 바람에 매짐은 ‘삐약’ 대신 사람의 언어를 쓸 수 있었고 거기에 부릴 수 있는 노예가 제 아래 들어왔으니 그로선 기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뭐 하는 거야, 굼벵이! 똥을 치우랬더니 거기에서 구르고 있으면 어떻게 해!”
“…….”
테이먼은 입술을 짓씹으며 일어났다. 얼굴에 튄 말똥을 닦고 있자니 제 처지가 기가 막혀 넋이 나갔다. 저를 이 시궁창으로 밀어 넣은 것은 다름이 아닌 파니릴리 알기어스. 그녀였다. 간사한 여자. 고분고분 말을 듣지 않는다고 그를 이 시궁창 안으로 밀어 넣었다. 원래에 맞는 대접을 해 주겠다며 말이다. 그러더니 저를 병사들의 막사로 내던져 버렸다. 노예처럼 부려지며 가축의 분변이나 치우라고.
“일어나! 어서!”
매짐이 그를 독촉했다. 테이먼은 아주 천천히 휘청이는 몸을 일으켰다. 음식다운 음식을 먹어보지 못한 것이 오래다. 왕좌를 탈환하겠다며 군대를 이끌고 유랑 생활을 했던 때에도 자신만의 커다란 막사 안에서 호사스러운 술과 음식을 즐겼었는데.
기실, 살아오며 테이먼 테르조는 한 번도 이런 형편없는 생활을 한 적이 없었다. 고매한 가문에서 자라나 늘 귀히 대접받으며 살아왔다. 그런 제가 이런 처지가 되었다니, 그것도 사촌 동생에 의해서. 정말이지 믿을 수가 없는 사실이었다.
“왕비 전하가 찾으신다.”
“지금 말이야?”
“…….”
“…지금 말입니까? 포드…경…?”
테이먼의 호칭에 매짐은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지금. 그 더러운 꼬락서니로 가서 전하의 비위를 상하게 할 순 없으니 막사로 돌아가 간단하게 몸이라도 씻고 가. 알겠어?”
“…네.”
테이먼은 막사에 들러 간단하게 몸을 씻고, 깨끗하나 옷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낡은 옷으로 갈아입고 난 후 파니릴리의 티 룸으로 향했다.
“어서와요, 테이먼.”
파니릴리가 화사한 얼굴로 그를 맞이했다. 마치 본인의 손으로 시궁창에 처넣은 것을 모른다는 듯이. 어정쩡한 자세로 다가오니 시종 하나가 의자를 빼 주었다. 다과가 한가득 차려진 테이블을 두고 그는 파니릴리와 마주 앉았다.
“이곳에서의 생활은 좀 어떤가요?”
태연한 물음이었다. 정말 몰라서 묻는 걸까 싶어 테이먼은 눈을 홉떴다.
“하루 종일 말똥이나 치우는 생활이 어떨 것 같아?”
“노동은 정직하고 올바른 일이죠. 바른 생활을 해 나가고 계시네요.”
“내게 정직하고 올바른 노동은 계획을 수립하고 사람을 부리는 일이야. 종일 말똥이나 치우며 근육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군주는 아주 낮은 신분인 천것의 삶까지 어진 마음으로 살피고 이해해야 한댔어요.”
“그래서? 내게 군주의 덕목이라도 가르치기 위해 날 말똥 밭으로 내쳤다는 거야?”
“당신에게도 테이조 가문의 영지가 있잖아요. 사촌 오라버니.”
“그 영지는 오래전에 네 남편에게 빼앗겼어. 내가 영주가 되기도 전에. 내 아버지에게서.”
“선친께서 알기어스 왕에게 힘을 보탠 까닭이죠.”
“테르조 가문은 왕에게 충성을 맹세했어. 피로 그 맹세를 지킨 거야.”
“그렇다면 대단히 자랑스러우시겠어요.”
“물론이야. 그만큼 투로 놈이 싫고.”
“그 투로 놈이 당신을 살렸어요.”
“그리고 똥밭에 구르게 만들었지.”
“그건 저고요.”
“너는 투로 놈의 충실한 개잖아.”
“부인이에요.”
“부인인 척하는 개지.”
“…….”
릴리는 다과를 씹어 삼키며 제 입가를 냅킨으로 닦았다.
“루이스와 당신에 관해 대화를 나누었죠. 오라버니. 그가 그러더군요. 마음에 안 들게 굴면 당신을 고문하랬어요.”
테이먼이 키득거렸다.
“그래서? 직접 고문이라도 하시게?”
“남의 고통을 즐기는 편은 아니라서요.”
“지금도 고통이 충분하단 걸 알아주었으면 좋겠는데.”
“포로치고 호사스러운 생활을 영위한다는 것도 알아주었으면 좋겠는데요.”
아아. 그것은 인정하지. 손발톱을 뽑고 불로 지지지 않는 것만은 감사할 일이지. 하지만 그 까닭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건 내가 네 사촌이기 때문이잖아. 그렇지?”
“…….”
릴리는 답하지 않고 조용히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어때? 내 얼굴에 로레인 하게너가 좀 남아 있나?”
테이먼이 그녀 가까이 상체를 숙이며 도발하듯 물었다. 릴리의 은빛 눈동자가 그의 얼굴을 샅샅이 훑었다. 망설임 없이 저를 훑는 눈빛 때문인지 테이먼의 면부에는 붉게 열이 올랐다.
“파니릴리 알기어스.”
그는 신음하듯 릴리의 이름을 불렀다.
“넌 부친을 참 많이 닮았어.”
그 말에, 파니릴리는 테이먼의 시선을 피했다.
“넌 그를 본 적이 없겠지. 하긴 당시엔 네 존재조차 알지 못했으니.”
“…….”
“우습게도, 알기어스 왕의 수많은 자식들 중 너처럼 그를 뺴다박은 자식은 없었어. 만약 알기어스 왕이 네 존재를 알았다면, 어쩌면 퍽이나 너를 아꼈을지도 모르겠군.”
“그는 미친 왕이었어요.”
“……”
이번에는 테이먼이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파니릴리는 말을 이어갔다.
“난 그가 저지른 짓들을 끔찍하다고 생각해요. 그가 카르낙 발투만의 손에 머리가 잘렸단 사실에 차라리 안도감이 들 정도로요,”
“불효막심한 딸이로군.”
“난 그를 본 적도 없어요. 평생 그를 아버지라 생각한 적도 없고요. 로레인 하게너를 내 어머니라 생각했던 적이 없듯이요.”
평생 아버지의 얼굴도 어머니의 얼굴도 모르고 살았다. 그녀의 유년 시절을 지배하던 것은 오직 올라, 그 상냥하고 현명한 노인뿐. 돌이켜 보니 그것에 감사해야 하는 삶이었다. 차라리 모르던 때가 더 충만하고 행복한 삶이었으니.
“그를 닮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난 매일 불안에 떨며 잠이 들어요. 당신은 그런 기분을 느껴본 적이 없겠죠.”
“왜. 나도 매일 매일 불안에 떤다고. 카르낙 발투만에게 죽임을 당할까 봐.”
어처구니가 없어 파니릴리는 헛웃음을 켰다. 테이먼은 부드럽게 웃었다.
“난 거스를 수 없는 운명 같은 것이 있다고 생각해. 파니릴리.”
그는 테이블 위의 작은 산딸기 하나를 손가락으로 퉁겨 입안으로 집어넣었다.
“어떤 것들은 본인이 선택하지만 때때로 어떤 것들은 감히 선택할 수 없기도 하지.”
“…….”
“솔직히 말할까? 난 사실 왕좌 따위엔 관심이 없어.”
뭐? 릴리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럼 대체 왜….”
모두가 그를 왕으로 추대한다. 카르낙 발투만에게 반하는 자들은 모두 그를 구심점으로 단단히 뭉쳐있었다. 그런 그가 왕좌에는 관심이 없었다고?
“나는 내 인생을 선택할 수 없어. 알기어스 왕이 죽었을 때부터 늘 그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