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거짓말!”
저녁나절 핀이 기함하며 소리쳤다. 왕의 명령에 의해 오르티스의 집으로 불려 온 로리아나는 예견이라도 한 듯 침착하게 말했다.
“진실인데요.”
“내 두 눈으로 보기 전엔 못 믿어!”
핀이 고집을 부렸다. 그럴 만도 했다. 그 누구도 죽이기는커녕, 상처조차 제대로 내 본 적이 없다는 하얀 늑대를 저 무구하고 순진한 여자가 놈을 해치고 혀를 잘라 왔다니. 과연 어느 누가 그것을 믿겠는가. 그러나 설령 그게 사실이라면 제가 아무리 부정해 봐야 소용없을 터다.
“그렇다면 장소를 알려 드릴 테니 직접 가서 보시지요, 경. 아직 놈의 시체가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
핀이 휙, 카르낙을 돌아보았다. 왕은 오랜 전우를 향해 그저 어깨만 한 번 으쓱해 보일 뿐이었다.
“카르낙, 네놈… 아니, 그러니까 폐하께선 대체 어딜 다치셨다는 겁니까. 상처 하나 없는데.”
마시고 있던 잔을 내려놓은 카르낙은 자리에서 일어나 벽에 걸린 횃불 하나를 빼 들었다. 그러곤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말리가 그러더군. 내게 아주 이상한 힘이 있다고.”
그는 횃불 위에 제 손바닥을 가져다 대었다.
“폐하!”
“칼!”
모두가 깜짝 놀라 그에게 다가갔다. 카르낙은 손을 들어 그들을 저지했다. 지글거리는 불에 손바닥이 작열하는 고통에 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살이 타는 냄새가 방 안에 진동하였다.
이 새낀 미쳤어. 미친 거야. 사지가 멀쩡하다는 말 한마디 했다고 그 멀쩡한 사지를 불로 지져 버리는 건 또 뭔데? 상처가 없다니까 이제 와 상처라도 내겠다는 건가? 그것도 검을 쥐는 오른손을?
“…칼.”
남편의 이름을 부르는 릴리의 목소리가 파르스름하게 떨렸다. 고통으로 남편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히고, 힘줄이 비죽 튀어나오는 것을 보고 있자니 피가 말랐다.
물론 일전에 그에게 들은 적이 있다. 불길이 그에게 어떤 기적을 선사하는지. 알고는 있었으나 막상 목격하고 있으려니 그가 겪는 고통에 동화되어 제 살갗이 타는 듯 괴롭고 아팠다. 곧, 카르낙이 붉고, 새까맣게 탄 손바닥을 펴 들어 보였다. 여전히 살아 있는 불씨들이 그의 살갗에서 빛났다.
“…너 이 미친… 새….”
그러나 얼마 후, 카르낙이 약간의 간격을 두고 손바닥을 몇 번 접었다 펴고, 흔들어 보이자 상처로 일그러지고 짓뭉개진 살갗의 아래에 또 다른 살갗이 보였다.
로리아나와 핀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것을 살폈다. 분명 방금까지는 타서 녹아내린 피부 사이로 뼈가 드러나도 이상치 않을 지경이었는데, 그가 지져 없애 버린 살 아래는….
“…말짱하잖아.”
핀이 넋이 나가 중얼거렸다. 로리아나는 그의 재생된 피부를 확인하고 눈을 들어 왕의 면부를 살폈다. 그녀 역시 넋이 나가 있긴 마찬가지였다.
릴리는 다가가 남편의 손을 붙잡았다. 제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남편의 손바닥을 문질러 죽은 살점들을 닦아 냈다. 거기엔 분명 새살이 돋아나 있었다. 그의 말처럼 흉터 하나 없이 깨끗하게 재생된 것들이었다.
사실이다. 새삼스레 놀라웠다. 이 모든 것이 사실이었다. 두 눈으로 확인까지 한 지금 이 상황은 정말이지 경탄 그 자체였다.
곧 핀이 다가와 릴리의 곁에 섰다. 그는 카르낙의 손바닥과 그 차분한 얼굴을 번갈아 확인하다 또다시 넋을 잃었다. 이게 뭐야. 이게 뭐냐고. 이 빌어먹을 벌레 놈아.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너. 하얀 늑대의 살점을 뜯어먹고 나니 무슨, 무슨 불로장생의 능력이라도 생긴 거야?”
“릴리가 늑대를 죽였어. 난 그 덕에 살아났고 보다시피 내 몸은… 재생했지.”
“…….”
“이런 세상이 존재해, 핀. 나도, 네놈도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이 분명 존재한다고. 난 그걸 이제야 깨달았어. 네놈도 그걸 깨달을 때가 되었다.”
“…….”
과거에는 믿지 못했던 것들이었다. 높으신 양반들이 세상을 지배하기 위해 제멋대로 지어 놓은 설화나 신화, 규율이나 법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람들을 원하는 대로 조종하기 위해 만들어 두었다 생각했던 허구의 것들이 더러는 거짓이었으나 때론 도저히,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기도 했다.
카르낙은 더 이상 그런 것은 없다고 단정 짓지 않았다. 그는 이제 모든 것의 가능성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 어떤 말도 안 되는 일일지라도 그것이 진실일 가능성.
그렇게 카르낙의 세계는 넓어졌다. 이제 세상은 믿는 것과 믿지 않는 것으로 나누어지지 않는다. 진실과 거짓만이, 현실과 허구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그러니 너와 왕비 사이에 무슨 내기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무엇이든 들어줘야 할 거다.”
“…….”
“늑대의 혀를 잘라 온 사람에게 네 머리통 자르는 것 따위가 무슨 대수겠어.”
핀은 휙, 하고 돌아 릴리를 보았다. 기대감에 부푼 그녀는 청아한 은색 눈동자를 반짝이고 있었다. 내가 미쳐 아주.
“좋아. 그래, 좋습니다. 비전하. 대신 제 청을 하나만 들어주십시오.”
“뭔데요?”
핀이 침을 꿀꺽 삼키고 답했다.
“저도 먹고 싶어요.”
“…무엇을?”
“늑대 혀요.”
나도 먹겠다. 만약에 그걸 먹어서 나도 저런 능력이 생기는 거면 먹고 말겠다. 반드시 먹겠다. 어떻게 해서든지 먹겠다. 어떻게든 먹고야 말겠다.
“네, 물론이죠. 하지만….”
릴리가 어물쩍거리자 카르낙이 대신 대답했다.
“쓸모를 다 하고 나면 그건 말리에게 주기로 했어.”
“누구?”
핀의 되물음에 로리아나가 나서서 답했다.
“말리요. 부나비의 치료사이지요.”
“덩어리도 커 보이던데 그걸 몽땅?”
“네.”
“그 귀한 걸 부나비의 창기들에게 전부 먹이겠단 말이야?”’
그의 말본새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로리아나가 한쪽 눈썹을 거만하게 치켜세웠다.
“부나비의 창기나 캘던성의 창놈이나 어차피 그 입이 그 입 아니겠어요?”
“그런 말은 루이스한테나 해. 나까지 엮을 생각 마.”
하는 짓은 하등 다를 바가 없건만 자긴 아니라고 선을 긋는다. 로리아나는 코웃음을 쳤고, 릴리가 분위기를 완화하기 위해 끼어들었다.
“말리는 폐하의 목숨을 살려 준 은인이니 당연히 그녀가 가질 자격이 있어요. 게다가 매우 훌륭한 치료사이니 언제 어디서고 중요한 때에 가치 있는 일에 쓸 것이 분명하고요.”
“차라리 오르티스에게 파는 것이 더 이득일 겁니다. 놈들이라면 값을 아주 후하게 쳐줄 거예요. 적어도 사병 몇 대대는 사 줄지도요.”
“네놈은 그것을 네 목구멍 속에 처넣으려고 했잖아. 핀.”
카르낙이 끼어들자 핀은 눈을 굴렸다. 사실 그에겐 셋 중에 가장 상대하기 만만한 사람이 바로 발투만 왕이었다.
“당연하잖아. 난 혼자서도 사병 1대대만큼의 값은 충분히 하니까.”
“방금까지 늑대의 혀라는 것은 믿지도 않아 놓고?”
“네 놈이 손을 지지고도 말짱한 꼴을 보니 나도 좀 먹어 봐야겠다. 너 같은 벌레 놈에게도 아마네스 여신의 축복이 통한다면 나같이 무고한 이에겐 손에서 금가루가 떨어지게 해 줄지 누가 알아?”
카르낙은 잔을 집어 들며 헛웃음을 켰다.
“다 처먹겠단 소리는 아니야. 딱 한 점만 먹어 보겠단 거다. 그 말리란 작자는 그래서 어디 있지?”
“이 집 어딘가에 있을 거예요. 저녁에 연회를 한다며 부나비의 창기들에게 유흥을 주문하였거든요.”
그 소리에 카르낙이 인상을 썼다. 연회를 한답시고 창기들을 불러들이는 것은 그가 가장 싫어하는 일 중 하나였다.
“저희도 먹고는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페하?”
물론 거기에 대해선 할 말이 없다. 안 그래도 발투만 왕가가 들어선 이후, 캘던에서는 왕의 눈치를 살피느라 창기들을 집에 불러 큰 연회를 여는 것을 모두가 망설였고, 덕분에 로리아나는 목돈을 벌기 위해 먼 지방까지 출장을 다녀야 했다. 부나비에서 중요한 것은 매춘뿐이 아니었다. 오히려 매춘보다 춤과 노래에 더 공을 들였다. 캘던의 고급 사창가가 된 것도 그런 까닭이었다. 모두 아름답고 세련되었으며 춤과 노래에도 능했다.
“그렇다면 이따 저녁 연회에서 보지.”
핀은 볼일이 끝났으므로 서둘러 자리를 벗어났다. 문밖으로 사라지는 그에게 카르낙이 다급하게 명령했다.
“공관에서 병사들을 데려와. 혓바닥은 너 혼자 처먹더라도 연회 음식은 같이 처먹어야 하니까.”
핀은 사라지기 전에 문 안으로 주먹을 올려 보였다. 카르낙은 혼자 큭큭, 하고 웃으며 잔에 든 술을 들이켰다.
“정말… 정말 늑대 때문인가요?”
로리아나가 물었다. 정말 늑대에게 물려 죽었다가 살아났기 때문인가? 깨어나면 더 강해질 것이란 말리의 말은 그런 뜻이었을까?
릴리는 고개를 저었다. 모든 것이 미지수다, 그의 바닥이 어디이고, 그의 한계가 어디이고, 그가 어디까지 닿을 수 있는지. 하여 말리가 내뱉은 말들을 곱씹어 볼수록 막막해지기만 했다. 언젠가 이 지난한 전쟁이 끝나면, 어쩌면 그때, 그의 기원을 찾아 탐험해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모르겠어요, 로리아나. 하지만 확실한 것은 폐하께선 남들과 좀 다른 존재인 것 같아요.”
“비전하께서 그러하듯이요?”
“…….”
릴리는 대답 대신 설핏 웃어 보였다. 함께 별을 보며 잠들었던 날, 카르낙이 물었다. 우린 대체 무엇일까? 릴리도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은 찾지 못했다. 다만 살아가다 보면 언젠가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을 뿐이었다.
까닭 없이 주어진 운명이란 것은 없을 테니 어느 때가 되면 깨달을 수 있지 않을까. 바로 이 순간을 위해 우리가 존재했구나, 하는. 그러니 그때가 올 때까지 그저 열심히 주어진 시간을 살아 나갈 뿐이다. 해야 한다고 믿는 것들을 해 나가면서 말이다.
파니릴리 발투만은 명실공히 아마네스 여신의 아이이다. 그러니 그녀가 가진 설명할 수 없는 능력들은 충분히 납득 가능했다. 그녀라면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생각마저 들기도 했다.
그러나 카르낙 발투만은? 그는 투로다. 지금껏 투로란 신에게 저주를 받은, 짐승보다도 벌레보다도 못한 존재라 여기며 자랐건만, 그렇다면 그가 가진 그 이상한 힘은 무엇이란 말인가.
게다가 불. 엘버그인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이 그를 재생시킨다. 혹자는 그것이 왜 아마네스 여신이 그토록 투로를 저주하는지에 대한 증거라 할 것이다.
그러나 로리아나의 생각은 달랐다. 알기어스 왕의 광증을 절멸시킨 것은 또 다른 알기어스가 아닌 바로 투로인 카르낙. 엘버그 왕국에서 유일하게 신의 아이와 대적하여 그를 이긴 자다. 그렇다면 그가 가진 힘이야말로 아마네스 여신의 전능과 가장 가까운 것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