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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발 아래 은빛 눈-178화 (178/231)

178화

그로부터 채 3일이 되기 전에 에나로부터 답이 도착했다. 북쪽 땅이 시작되는 곳에서부터 에나의 사병을 배치해 두겠노라는 전갈이었다.

예상한 대로였다. 베오르토는 본인의 가장 큰 뒷배인 발투만 왕가와 공식적으로 척을 질 마음은 없어 보였다. 그 속내가 어떻든 말이다. 더는 리오에서 밍그적거리며 지체할 필요가 없었다. 카르낙은 군대를 정비하고 서둘러 그곳을 떠날 준비를 마쳤다.

미천한 자들은 들어갈 수 없는 땅, 고로 투로이자 창기인 로리아나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성전에 발을 들일 수 없는 곳이었다. 로리아나는 리오에 남아 그들에게 작별의 인사를 고했다.

“부디 조심하세요, 전하.”

로리아나가 다정하게 인사를 건네자 릴리는 저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로리아나를 와락 껴안았다. 그 때문에 로리아나의 허리가 굽었다. 갑작스러운 포옹에 그녀는 잠시 당황하였다가 이내 어색하고도 보드라운 손길로 릴리의 등을 도닥였다.

“고마워요, 로리아나. 당신이 아니었으면 난 이 자리에 없었어요. 내 생명을 구해 줘서 고마워요. 내 남편의 생명도요.”

로리아나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

“전하를 경애하는 이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그러니 전하께서도 당연하다 여겨 주십시오.”

카르낙 발투만을 위해 목숨을 바치진 못해도 파니릴리 발투만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목숨을 내어 놓을 수 있다. 그녀는 로리아나의 삶에 있어 아무런 편견 없이 저를 그저 인간으로 대해 준 유일한 사람이었으니.

창기들은 모두 사랑에 굶주려 있는 가여운 여인들이다. 로리아나 저 역시 하등 다를 바가 없었다. 아무리 살을 섞고 사랑을 속삭여도 그것은 그저 하룻밤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그것에 매달렸는지도 모른다. 그저 사랑이 고파서.

살을 섞으면 섞을수록, 밀어를 주고받으면 받을수록 그 갈증은 더 깊고 강렬해졌으리라.

파니릴리가 그녀에게 보여 준 것은 사내에게선 얻을 수 없는 사랑이었다. 뜨거운 열정이나 달뜬 열락으로도 채울 수 없는 것이었다. 또한 어느 누구에게도 얻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스스로를 귀하게 여기는 사랑. 욕망이나 소유의 대상이 아니라 그저 그 자신으로 존재하는 것. 그것으로도 부족함이 없는 것. 더는 갈구하지 않아도, 욕망하지 않아도 충분했다. 파니릴리가 그녀를 귀하게 대해 줌으로써 로리아나는 스스로를 사랑하는 법을 알게 되었다.

그토록 가치 있는 사랑을 알게 해 주었으니 이 경이로운 선지자를 위해 목숨을 내놓는 것이 당연하다.

“캘던에서 뵙겠습니다. 전하.”

로리아나는 예를 갖추어 파니릴리에게 작별을 고하였다. 앞으로 왕비를 보고 겪고 지켜보게 될 많은 이들도 저와 같아지리라는 것을 그녀는 확신하였다.

***

청록색 깃발이 나부끼는 막사는 경비가 삼엄하였다. 오랫동안 한곳에 머무른 탓일까, 아니면 날이 가면 갈수록 점점 얼음이 녹고 있기 때문일까, 막사의 안쪽엔 소복이 쌓인 눈 대신 버석한 흙바닥이 들어난 지 오래였다.

테이먼 테르조는 모두가 엘버그 왕국의 지도을 펼쳐 놓은 커다란 원탁에 모여 갑론을박할 동안, 막사 안 구석 테이블 아래에 새싹이 돋은 기이한 광경을 보며 골몰하였다. 그의 투명한 벽안이 멍했다.

“괜한 일만 키웠습니다, 브리다스 경.”

알레온이 엉겅퀴처럼 얽혀 있는 숱 많은 흑색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투로를 향한 일전의 습격 때문이었다. 당시 백전노장의 알레온은 그 일을 반대했다.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명백한 실수라고 생각한다.

“아니요. 그건 투로 놈을 죽일 절호의 기회였어요. 실패한 것은 알레온 경이 병력을 지원해 주지 않은 탓이지요.”

이베트 코르넬리오가 나서서 표독스럽게 그의 의견에 반박했다.

“놈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설마 네가 모르진 않겠지, 이베트.”

카르낙에게 영지를 짓밟힌 후 이베트 코르넬리오는 간신히 목숨만을 건사한 채 제 아비의 품으로 도망쳐 왔다. 알레온은 그때 이베트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넝마 같은 모습에 보는 사람의 오금이 다 저릴 지경이었다. 이베트의 귀환은 카르낙 발투만의 잔인함을 정확히 보여 주는 지표가 되었으리라.

이베트는 바르르 떨리는 제 입술을 사리물었다. 알레온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벌집을 쑤신 꼴이야. 덕분에 베오르토가 완전히 놈의 편으로 돌아섰지 않나. 우리가 여기 머무는 이상 우리는 에나의 보호와 지원이 필요해. 이번 일로 우린 놈에게 우위를 내 준 꼴이야.”

“그럼 대체 언제까지 이 빙판인 땅에 죽치고 있을 건가요!”

이베트는 신경질적으로 소리 질렀다.

“대체 언제까지 여기 숨어 있을 건데요? 저 투로 놈은 자기 세력을 날로 넓혀 가고 있는데, 맨날 그놈의 기회만 찾아 댈 뿐 뭐 하나 제대로 한 적이 없잖아요!”

알레온은 그녀의 뺨을 내리치고 싶은 충동을 참느라 부르르 손을 떨었다. 바르시 코르넬리오가 살아서 귀환한 이래, 이 막사 아래에 모이기만 하면 이 꼴이었다.

아직 어린 코르넬리오 가문의 장자를 대신해, 이베트가 영주 회의에 참여하면서부터였다. 남은 것이라고는 카르낙 발투만을 향한 증오와 악밖에 남지 않은 그녀는 당장 놈을 어쩌지 못해 안달이었다.

대체 무슨 연유로 카르낙 발투만이 그 아이를 살려 보냈는지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런 딸자식을 말려야 할 사람이 바로 그 애비인 브리다스인데도, 그 역시 딸아이가 온 이래 예전처럼 날카롭고 영민하지 못했다. 아마 그 또한 이베트의 영향이리라. 미치광이 딸년이 노쇠한 제 아비까지 망쳐 놓았다.

“쓸데없는 언쟁은 그만둡시다. 무의미한 일이니.”

눈부신 금발을 지닌 멜타가 나섰다. 그는 브리다스만큼 노쇠하였으나 그만큼 아둔하지는 않았다. 부유한 가문의 사람은 아니었지만 이 진영에서 그의 의견은 브리다스의 의견만큼이나 중요했다.

“성전에 당도하기 전에 죽여야 해요.”

“이베트.”

“에나의 머리에 삼중관을 씌우는 것까지 지켜볼 생각이세요, 모두?”

이베트가 모두를 힐난했다. 그것이야말로 카르낙 발투만을 엘버그의 적합한 국왕으로 인정하는 꼴이다.

“여기, 마땅히 에나의 머리 위에 삼중관을 씌워야 할 분이 계신데도요?”

그렇게 말하며 이베트는 딴 곳만을 응시하던 테이먼 테르조를 손가락으로 쿡, 하고 찍어 가리켰다.

“엘버그에 국왕은 오로지 한 분, 여기 계신 테르조 경뿐이에요!”

그걸 누가 모르는가. 알고 있다. 알고 있으나 캘던의 왕좌는 그에게 빼앗겼고 한때 뜻을 같이 했던 선대 에나는 놈의 손에 죽었다. 은밀하고도 치밀하게 진행해 왔던 모든 계획은 그런 식으로 무산되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수세에 몰렸다.

이 중 누가 그 벌레 놈이 에나의 머리에 삼중관을 씌우는 것을, 그것도 근본도 없는 비천한 놈을 에나로 추대하여 제멋대로 이 나라를 쑤셔 대며 망치는 것을 보고 싶겠는가.

그러나 카르낙 발투만은 비천할지언정 아둔한 자가 아니다. 수세에 몰린 상태에서 전면전을 치르려는 것은 궁지에 몰린 쥐임을 인정하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 그것은 이 사태를 해결하는 데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 모두 보지 않았는가. 준비 없는 습격이 얼마나 큰 손해를 초례했는지 말이다.

모두의 눈이 잘생긴 금발의 청년으로 향했다. 테이먼은 한참 만에 새싹에서 시선을 떼고 언쟁 중인 가주들을 응시했다.

“얼음이 녹고 있어요.”

대뜸 그가 말했다. 뜬금없는 소리에 모두 눈을 가늘게 떴다. 테이먼은 그들에게 있어 늘 그 심중을 헤아리기 어려운 청년이었다. 그 신비스러운 면 때문에 더 엘버그의 왕좌에 적합하다고 생각하지만 말이다.

“투로의 저주가 왕국을 멸망시키는 꼴은 볼 수 없죠.”

그는 뚜벅뚜벅 걸어가 푸릇하게 돋아난 싹을 제 발로 짓이겨 뭉갰다. 완전히 비벼 여린 잎들을 찢어 발겨 놓고는 그는 후련한 듯 말을 이어갔다.

“성전에 거대한 군대를 끌고 들어올 순 없을 겁니다. 에나가 사병을 제공해 주는 것 역시 그를 방심하게 만들 거예요. 설마 테이먼 테르조가 정신이 나가 성전에서 전쟁을 벌이지는 않겠지, 하는.”

“…테르조 경.”

그를 부르는 알레온의 안색이 어두웠다.

“그러니 놈에게 보여 주는 겁니다, 알레온 경. 테이먼 테르조는 성전에서 전쟁을 벌일 만큼 정신이 나갔다는 것을요.”

“전 준비되었습니다.”

브리다스가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테이먼은 감사함을 담아 부드럽게 미소 지어 보였다. 그는 왕가로부터 이어받은 새하얀 살결을 지닌 사내였다. 그 새하얀 살결 위에 박혀 있는 두개의 청옥 색 눈동자는 때문에 늘 기이한 빛을 띠었다.

가주들은 그의 눈동자를 볼 때마다 과연 카르낙 발투만이 데리고 있다는 파니릴리 알기어스의 눈동자 역시 이 같은 느낌이 들까 궁금해하곤 했었다. 그녀 역시 테르조처럼 이렇게 기이하고 이질적인 빛을 띠는지 말이다.

이베트 코르넬리오는 승리에 도취되어 숨을 씨근덕거렸다. 테이먼을 바라보는 눈동자가 전에 없이 화사하게 빛났다. 정쟁은 싱겁게 마무리 되었고 각자의 심려를 떠안은 채 모두가 막사 안을 빠져나갈 때까지 이베트는 조용히 기다렸다 마침내 테이먼과 단둘이 되자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과연 엘버그의 국왕다운 현명한 결정을 하셨습니다.”

테이먼 테르조는 팔짱을 긴 채 무심히 테이블 위의 지도만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그렇다 하여도 기실 이베트에게 중요한 부분은 아니었다.

“그런가.”

테이먼의 답에는 성의가 없었다. 이베트의 속내와는 다르게 눈부신 미모를 지닌 그녀에게 테이먼은 아무런 관심도 없는 것 같았다. 그 점이 이베트의 열망에 더 불을 지폈다.

그녀는 카르낙에 의해 그 명예가 바닥으로 추락한, 창기와도 다름없는 여자로 남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다시 올라가고 싶었다. 어떻게든 자신이 있었던 것보다 더 높고 화려한 곳으로. 게다가 이 눈부신 금발의 잘생긴 청년이라면 더할 나위가 없었다. 그는 그동안 이베트가 열망해마지 않은 모든 것을 갖추고 있다고 여겨도 무방하리라.

“모두가 자신들의 이익에 골몰하고 있지요. 알레온 경도, 멜타 경도 모두 당신의 명예와 군위에 기생하려고 할 뿐이에요.”

“…….”

“그러나 저와 제 부친은 달라요. 브리다스 가문이야말로 당신께 온 마음을 다해 충정하고 있지요.”

이베트는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녀의 가슴이 단단한 테이먼의 팔뚝에 닿을 만큼 거리가 좁혀졌다. 그녀의 뜨거운 입김이 귓가에까지 닿았다. 그럼에도 테이먼은 지도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고개만 돌리면 금방이라도 입술이 스칠 만한 거리임에도, 그리고 기꺼이 그것을 내어 줄 준비가 되어 있는데도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베트의 뜨거운 몸이 석벽이라도 다름없는 듯했다. 그는 문뜩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피식 웃다가 조용히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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