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발 아래 은빛 눈-176화 (176/231)

176화

뜨거운 정사와 개운한 목욕을 끝내고 나오니 응접실에 핀이 대기하고 있었다. 한결 말끔해진 왕 내외를 낮은 자세로 맡이하려 하였으나, 파니릴리의 머리를 보고 허리를 숙이는 것조차 잊고 말았다.

“…까… 까까… 까까머리….”

“다시 보니 퍽 반가운 모습이지?”

카르낙이 긍정을 종용했지만 그는 반응해 줄 수 없었다. 공들여 가꾼 알기어스 왕가의 상징이 이렇게 한순간 덧없이 사라져 버리다니. 그나마 흰 머리카락이 조금이라도 보이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가.

“숨어 지내기엔 너무 튀어서 말이야.”

물론 안다. 엘버그에 은발을 가질 수 있는 이는 오직 하나뿐이었으므로 무사히 살아서 리오로 도착하려거든 효과적으로 그녀의 머리를 숨겨야 했으리라. 카르낙 역시 같은 이유로 긴 머리카락을 짧게 잘라 내었을 것이다. 결국 그 모든 것들은 치열한 생존의 증거일 뿐이다.

“엘버그의 여인들 중 대머리가 잘 어울리는 유일한 분이실 겁니다. 비전하.”

그리하여 핀은 릴리에게 먼저 농을 던졌다. 평소 함께했던 때와 같이.

“고마워요, 핀. 상냥하시네요.”

릴리 역시 전과 같은 상냥함으로 그의 농담을 받아 주었다. 왕 내외가 들어서자 응접실의 문이 닫혔다. 핀은 오르티스의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왕 내외가 오면 사람들 전부를 자리에서 물리라고 지시한 까닭이었다.

“에이가에게는 곧바로 전령을 보냈습니다. 국왕 내외분이 무사히 리오에 도착했다고요.”

“고마워요. 그녀는 무탈한가요?”

“네. 비전하의 걱정에 식음을 전폐한 것만 빼고는요. 이렇게 무사히 오셨으니 이젠 무탈할 겁니다.”

릴리는 에이가의 주름진 얼굴을 떠올렸다. 그녀와 마주했던 때가 너무나 까마득하게 멀었다. 적어도 머릿속에서 그녀의 얼굴이 흐릿해지기 전에는 캘던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에이가가 그립네요. 그녀의 잔소리도요.”

모두가 그리웠다. 그곳의 평화로웠던 나날들도 그리웠다. 돌이켜보면 높은 캘던의 성벽 안이야말로 그녀에게는 지상의 낙원이었다. 카르낙에게 선물받은 정원의 풀들은 얼마큼 자라 있을까. 그곳은 떠나왔던 때와 같이 여전히 평화로울까.

“우리 병력은 얼마나 잃었지?”

오르티스가 마련한 다과상에는 포도주와 신선한 과일, 이국에서 가지고 온 이색적인 간식들이 즐비했고 카르낙은 그중 하나를 집어 쏙 입 안으로 밀어 넣으며 물었다. 물론 동시에 잔을 채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홉.”

많다고 할 순 없지만 그렇다고 적은 수도 아니었다. 캘던을 떠나올 때 스무 명 남짓한 병력을 끌고 왔으므로 따지고 보면 절반을 잃은 것이다.

“데리고 온 몸종들은 거의 다 죽었어. 특히나 여종들은 전멸했고 그나마 사지 멀쩡하게 살아남은 자는 리쿠스 정도뿐이야.”

“그라도 살아서 다행이군. 엘버그에서 가장 뛰어난 치료사를 잃었다면 손해가 아주 막심했을 거야.”

“만약을 대비해 캘던성 지킬 만한 소수의 병력은 남겨 놓았어. 에나의 땅까지 이제 겨우 사흘 치의 거리야. 영주들에게 지원을 요청하려면 지금이 적기야.”

카르낙은 잔 하나는 채워 릴리에게 건넨 뒤 남은 잔 두 개에 마저 포도주를 채워 하나는 제가 들고 하나는 핀에게 내밀었다. 카르낙의 벌어진 가슴팍에는 여전히 채 닦지 못한 물기가 맺혀 있었다. 핀은 말을 이어 나갔다.

“테이먼 테르조가 가지고 있는 군사는 최소 5만이야. 우리에게도 그에 필적할 숫자가 필요해.”

“제대로 계산해야지. 핀. 우린 이백여 명으로 최소 그 다섯 배의 군대도 물리쳐 왔어. 그러니 오만을 물리치기 위해서라면 천 명으로 충분해. 그 정도라면 리오의 사병 조달만으로도 가능하지.”

“안이하게 생각할 게 아니야, 카르낙. 습격이란 비겁한 방법을 썼으니 일말의 여지도 없이 몰살시켜야 해. 완전히 가루가 되도록.”

이 건에 관해 핀은 어쩌면 카르낙보다 더 분노해 있는지도 모른다. 카르낙은 이 경험으로 인해 파니릴리를 얻었다. 그에게는 이 고난이 적어도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었지만 핀에게는 왕을 잃고, 제 부하를 잃고, 패배한 개처럼 꼬리를 말고 도망간 패배의 기억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사막의 전갈처럼 그는 잔뜩 독이 올랐다.

“또한, 너에 대한 영주들의 충성심을 시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야. 소집에 따르지 않는다면 훗날 피로 되갚아 줘야 해.”

카르낙은 그 모습에 웃음을 흘렸다.

“과연. 내 근위대장답군.”

원래부터 타고나길 잔인한 천성을 타고난 놈이다. 그렇기에 그토록 오랫동안 무패의 용병으로 이름을 휘날릴 수 있었으리라. 돈에 충성했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발투만가에 충성하고 있다는 것만 달라졌을 뿐이다.

“에나에게 먼저 전령을 보내는 것은 어때요?”

잠자코 둘의 이야기를 듣던 중 릴리가 끼어들었다. 두 사내는 그녀를 향해 고개를 틀었다. 릴리는 석양의 열매를 오물거리며 말을 이어갔다.

“에나에게도 군인이 있다면서요. 작금의 상황을 설명하고 대관식까지 왕을 호위해 줄 호위병을 요청한다면, 제아무리 이를 갈고 있던 테이먼 테르조라도 감히 습격하진 못할 거잖아요. 에나와도 척을 저 쫓겨나고 싶지 않다면 말이에요.”

“…일리가 있는 말이군.”

카르낙이 잔을 홀짝이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욕조에서 나와 내내 그 귀여운 머리통으로 그것만 골몰했을 터였다. 제아무리 테이먼 테르조라도 아니, 어쩌면 테이먼 테르조이기 때문에 실상이 어떻든 에나와 반목하는 모습을 공공연히 보여 줄 순 없을 것이다.

그의 명분은 왕국의 적통성. 적통성이란 어찌 되었든 아마네스의 종인 에나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가 아닌가.

물론 에나의 즉위식에서 삼중관을 씌워 주는 것이 카르낙 발투만이 아니라 저이길 간절히 바라기야 하겠지만, 에나의 땅에서 에나의 호위병을 공격할 만큼 멍청한 자는 아니리라. 적어도 그런 자가 아니길, 카르낙은 내심 바란다. 제 정적이 그 정도로 아둔한 자이길 원하지는 않으니까.

카르낙은 릴리의 의견에 제 말을 보탰다.

“또 그럼으로써, 자신을 에나로 만들어 준 발투만 왕가에 대한 베오르토의 충성심도 시험할 수도 있겠지. 그에게도 자신의 의지를 증명할 수 있는 좋은 기회야.”

“…….”

핀이 포도 한 알을 따 입 안에 넣고 오물거렸다.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해야 해요. 수 싸움에서 우세해야 한다면 무엇보다 에나의 군대를 먼저 섭렵하는 것이 우선이에요. 테이먼 테르조가 전쟁을 일으키려는 땅이 에나의 땅이라면요. 그러면 우린 에나를 등에 업고 각 영지의 군대를 그의 승인하에 이곳에 데려올 수 있을 테고요. 만일 에나가 통상의 이념대로 자신의 땅에서 살육이 벌어지는 것을 거부한다면 그것은 테이먼 테르조도 마찬가지. 그가 먼저 싸움을 걸어온다면 그는 명분도, 신념도, 도덕도 모두 잃고 말 그대로 왕위찬탈자에 지나지 않게 되는 거예요. 우리로써는 손해 볼 것이 전혀 없어요.”

물론 당장의 분노와 싸움에 대한 욕구만 참는다면 말이다.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놓고 보아도 그녀의 말에 허점은 없었다. 그녀의 말처럼 설령 어떤 일이 일어난다 해도 그들에게는 유리했다.

“멍청한 테이먼 테르조. 아무래도 악수를 두었군.”

그리하여 핀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당장은 분노를 갈무리하고 릴리의 말을 따라야 했다. 전쟁은 이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만큼 전쟁을 치러야 할 명분 역시 중요했다. 더욱이 발투만 왕가에 대한 사람들의 사랑과 지지는 바닥까지 추락해 있었고 테이먼 테르조의 적통성은 날이 갈수록 증대되고 있으니 이 기회에 명분과 민심을 함께 얻는다면 이보다 더 좋은 수가 어디에 있으랴.

“펜과 종이를 가지고 오지.”

핀이 서둘러 밖으로 향했다. 카르낙은 에나에게 가져갈 편지를 쓰고 벌레가 새겨진 기존의 인장과 함께 파니릴리에 의해 탄생한 발투만 왕가의 새로운 인장을 찍었다. 이제 그것이 발투만 왕가의 새로운 심벌이 될 터였다.

핀은 서둘러 카르낙의 편지가 에나에게 닿을 수 있도록 전령을 보냈다. 쉬지 않고 달린다면 하루면 에나에게 편지가 도착하리라.

전령에게 편지를 전하고 다시 응접실로 돌아오자 릴리가 그의 눈앞에 무언가를 내밀었다. 말린 고기같이 거무튀튀하고 딱딱한 것이 꼬챙이에 끼워져 있었다. 핀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것을 살폈다. 뭐야. 이걸 어쩌라는 거지? 썰어 달라는 건가? 옆에 회도 잘 뜨고 포도 잘 뜨는 남편 두고 왜 나한테…?

“…전하 이것이 무엇이온지….”

“폐하께서 직접 보여 주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고 하셔서요. 이건….”

“하얀 늑대의 혀다.”

카르낙이 아내의 말을 끊고 제가 끼어들어 답했다. 그것만은 꼭 자신이 말하고 싶었던 것 같았다. 핀은 잔뜩 인상을 구겼다.

무슨… 농담도 그런 농담을. 하얀 늑대의 혀? 하얀 늑대의 혀는 고사하고 핀은 하얀 늑대를 만나 본 적도 없었다. 뭐야. 그런 건 그냥 전설에나 등장하는 동물 아니야? 용이나 불새나 유니콘처럼 그냥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뭐 그런 것들 말이다. 무슨 뻥을 치려거든 좀 그럴싸한 것을 가져다가 치든가. 릴리가 바짝 다가와 속삭였다.

“지난번에 분명 약속했었죠? 나한테 사람의 머리를 가져오면 무예를 가르쳐 준다고 했잖아요.”

물론 그랬다. 사람의 머리통을 가져오라고. 말린 고기가 아니라.

“하얀 늑대는 사람보다 세니까, 이것으로 대신하기 충분할 것 같은데요. 그렇죠, 핀?”

아니아니, 차라리 그냥 새끼 늑대의 머리통을 가져왔어도 이보단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았겠다. 지금 이 말을 믿으라고 하는 건가?

“못 믿겠다면 증인들도 있어요.”

너무 노골적으로 티를 냈나? 어떻게 알고 릴리가 덧붙였다.

“매짐과… 로리아나 그리고… 또….”

“나도.”

카르낙이 끼어들었다. 부창부수인가. 마누라 사랑에 눈이 먼 사랑꾼은 빠져 주시면 감사하겠다. 가장 못 믿을 인간이니까.

“부나비 일행들도 모두 증인이 되어 줄 거예요.”

“…….”

핀은 다시 한번 그 말린 고깃덩어리를 바라보았다. 일관적으로 억지를 써서인가 묘하게 정말 혀 같기도 하고….

“…이건 어떻게….”

“잘랐어요. 폐하를 구하려거든 그 방법뿐이라고 해서….”

핀은 느긋하게 의자에 앉아 와인이나 축내고 있는 카르낙 발투만을 살펴보았다. 저놈을 구하려고? 지나치게 사지가 멀쩡해 보이는 저놈이 목숨이라도 위태로웠단 말인가? 카르낙이 그의 시선을 느끼고 다리를 꼬아 까딱거리며 말했다.

“너는 상상도 못 할 거다. 핀.”

뭘. 뭘 말이야. 궁금해 죽겠는데 카르낙은 설명을 해 주는 대신 피식거리며 다시 와인을 홀짝였다. 하는 수 없이 핀은 다시 릴리를 바라보았다. 저… 무구하고 결백한 얼굴을 좀 보라. 뭐야. 정말인가? 이게 정말 늑대의 혀라고? 그것도 하얀 늑대의? 아니 이것이 그러니까 왜 필요한데? 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