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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발 아래 은빛 눈-175화 (175/231)

175화

둘은 오르티스가 마련해 준 커다란 욕조에 함께 들어갔다. 따듯하고 깨끗한 물에 몸을 담그고 미리 준비해 둔 시원한 얼음과 질 좋은 포도주를 즐기고 있자니 극락이 따로 없었다. 노곤노곤하게 몸이 풀리자 릴리는 무거운 눈꺼풀을 감고 그 편안함과 안도감을 즐겼다. 카르낙은 마주 앉은 릴리의 발등과 바닥을 부드럽게 주무르다가 그녀의 엄지발가락을 지그시 깨물었다. 릴리가 흠칫 몸을 떨고는 작게 웃었다.

“그사이 머리카락이 좀 자랐는걸, 릴리.”

그 말에 릴리는 제 동그란 머리통을 손으로 매만졌다. 이제 막 자라기 시작한 머리카락에서 까슬까슬한 감촉이 느껴졌다.

“사람들이 기겁하겠죠?”

“글쎄. 그들이 기대하는 것이 당신의 머리카락이라면 어쨌든 색은 식별 가능하니 괜찮지 않을까? 지금 당신의 머리통은 새하얀 눈이 내린 것 같거든. 에나가 아주 좋아하겠어. 북쪽 땅과 아주 잘 어울려.”

카르낙의 말에 릴리는 다시 키득거리며 웃었다.

“에나의 대관식에 참석하려면 서둘러야겠어요. 길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했잖아요.”

“늦어도 기다릴 거야. 어쨌든 그의 머리에 삼중관을 씌워 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왕뿐이니까.”

“루이스까지 와 있는 것을 보니 캘던의 근위대를 모두 끌고 온 것이 틀림없겠죠?”

“아마도.”

카르낙은 대충 대답하며 아내를 제 가슴팍으로 끌어당겼다. 릴리의 등이 그의 편편하고 단단한 가슴에 폭 안겼다.

“테이먼 테르조가 어리석은 짓을 했어요.”

“…….”

“우리에게 전쟁의 명분을 주었잖아요. 그것도 에나의 대관식을 앞두고.”

대관식은 왕의 즉위식 다음으로 엘버그에서 중요한 행사였다. 에나의 권한 안에 있는 북쪽의 땅에서는 전쟁을 벌일 수 없듯, 에나의 대관식을 앞두고는 지역 간의 분쟁이나 다툼이 있더라도 자제했다.

비록 법으로 정해진 것은 아니었으나 에나의 권위와 명예에 대한 존중의 표시로 모두가 그렇게 했다. 그것을 테이먼 테르조가 모를 리 없다. 그러므로 이것은 카르낙에 대한 모욕일 뿐 아니라 에나에 대한 모욕이기도 했다. 기꺼이 자신의 땅을 내주어 보호하고 있는 이들이 그의 뒤통수를 친 것이다.

카르낙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손으로 아내의 머리에 물을 끼얹었다. 놈이 허겁지겁 습격을 한 것은 분명 파니릴리가 구스와 고프리를 풀어 준 직후였다. 그러니 아마도 고프리의 세 치 혀 때문이리라. 놈이 그에게 정확히 어떤 정보를 제공했는지 알 수는 없으나 분명 놈의 혀가 테이먼 테르조에게 분명한 습격의 명분과 확신을 주었으리라.

또한 코르넬리오의 장자가 손에 들어왔으니 멀루아 땅을 되찾을 수 있다는 희망과 의무가 그를 조급하게 만들었을 수도 있다. 테이먼 테르조는 아니더라도 손주를 되찾은 브리다스는 그랬을 거다. 그런 그에게 고프리가 어떤 사탕발림을 했을지 눈에 훤했다.

놈은 어느 곳에서나 분란을 만들 부류의 사람이었다. 상식이 있고 지각이 있는 이라면 반드시 고프리는 제거해야만 했다. 테르먼 테이조가 그 정도의 영악함조차 갖추지 못했다면 카르낙으로선 감사한 일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정적은 좀 더 상대하기 쉬운 이가 될 테니 말이다.

카르낙은 아내에게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가 없었다. 행여 구스와 고프리의 이야기를 꺼내 그녀에게 죄책감을 심어 줄까 염려가 되었다. 어쨌든 모두 과거의 일이다. 더는 그 일로 릴리를 괴롭히고 싶지 않다. 가능하면 그 일은 모조리 잊고 싶었다. 없는 듯 깨끗하게 지우고 싶었다.

어쨌든 그 이후로 많은 일이 있었고 릴리와 저의 사이도 더는 예전과 같지 않았다.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으나 그로 인해 얻은 것들도 많았다. 어쩌면 그 모든 고통은 릴리에게 향하는 계단이었는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감사해야 할 일이다. 결국 그녀는 떠나지 않았고 여전히 자신의 곁에 머물러 있으니 카르낙은 기꺼이 지나온 그 모든 과정이 그를 행복하게 했노라 장담할 수 있었다.

“에나의 머리 위에 삼중관을 씌우기 전에 먼저 그들을 마주쳐야겠죠?”

“…….”

카르낙은 여전히 입을 다문 채 바지런히 손만 움직였다.

“그렇다면, 결국 싸워야 할까요?”

바로 제 눈앞에서 살육의 광경이 벌어지는 것을 똑똑히 보아야 할까. 릴리는 한 번도 전쟁을 겪은 적 없었고, 또한 본 적도 없었다. 칼과 방패로 무장한 이들이 목숨을 걸고 상대의 목숨을 앗아 가는 광경을 가만히 서서 지켜볼 수 있을까.

그것이 비록 필연적인 일이라도 그것을 담담히 바라보는 것은 힘들 것만 같았다. 카르낙뿐만 아니다. 루이스도, 핀도, 성에서 늘 자신을 지켜 주었던 이름 모를 호위병들도 모두 그녀에겐 소중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릴리를 지키듯 릴리 역시 그들을 지켜 주고 싶었다. 온실 속의 화초처럼 보호만 받으며 저로 인해 사람들이 목숨을 잃는 꼴을 무력하게 지켜보고 싶지는 않았다. 다른 방법은 없을까. 그 다른 방법의 가능성을 열어 두기 위해 구스와 고프리를 보냈다. 지금 같은 상황엔 부디 자신이 베풀었던 자비를 그들이 잊지 않았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칼.”

릴리가 몸을 틀어 남편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리도록 투명한 라일락 눈동자에는 오롯이 그녀의 상만이 맺혀 있었다.

“핀에게, 내 이야길 해 줄 수 있어요?”

“무슨 이야기?”

“내가 하얀 늑대를 죽인 이야기요.”

“…….”

카르낙은 천천히 눈동자를 좌우로 굴렸다. 단순히 자랑하고 싶어 이런 부탁을 하는 것은 아니리라. 제 아내가 무슨 꿍꿍이인가 궁금한 모양이었다.

“그건 사람을 죽인 것보다 더 대단한 거잖아요. 그렇죠?”

아니. 정말 핀에게 자랑하고 싶은 걸까?

“핀은 하얀 늑대를 죽여 본 적은 없겠죠?”

승리감에 도취되어 눈을 반짝이는 것이 이제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언제부터 살상에 그렇게 기쁨을 느끼게 된 거야?”

“이 땅에서 살려면 피할 수 없잖아요. 피할 수 없으니 즐기려는 것뿐이에요.”

카르낙은 실소했다. 유쾌하고도 자못 씁쓸한 웃음이었다.

“내가 당신을 타락시켰나?”

“아무도 날 타락시킬 수 없어요, 칼. 타락했다면 내가 그러기로 결심했기 때문이고요. 그리고 이곳에 남기로 결심한 이상 더는 이상을 좇는 이방인처럼 굴 수 없어요. 엘버그에서 내 자리를 제대로 찾으려는 것뿐이에요. 나도 살아남아야 하니까요.”

더는 알기어스의 상징이나 카르낙 발투만의 아내로는 만족할 수 없다. 엘버그에 그리고 발투만 가에 뿌리를 내리기로 했으니 이왕이면 아주 깊고 단단하게 제 자리를 다지기로 했다.

비록 그 방향과 방법은 달랐으나 그녀는 늘 생존하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왔다. 단 하루도 허투루 산 적이 없다. 그동안은 그라타를 바라보며 살아왔다면, 이젠 발투만 왕가의 안정을 위해 살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 손에 피를 묻히는 것은 당연하리라. 그녀는 기꺼이 그것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리고 이왕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라면 아주 훌륭하게 적응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핀이 필요했고 무력을 다루는 법을 배우고 싶다면 ‘사람의 머리를 가져오라’는 그의 요구를 충족시켜야 했다. 우선은 그것부터였다. 당장은 그것이 가장 먼저였다.

“필요하다면. 그렇게 할게.”

카르낙이 가볍게 그것을 수긍했다.

“당연히 필요해요.”

그 정도면 핀도 아무 말 못 하겠지. 가르쳐 주지 않고는 못 배길걸.

“그런데 릴리.”

카르낙이 심각하게 운을 뗐다.

“네.”

그는 아까부터 고민이 있는 듯 종종 입을 다물었다. 망설이던 이야기를 이제야 하는 건가 싶어 릴리 역시 진지하게 답했다. 아래로 지긋이 내려가 있던 그의 눈꺼풀이 천천히 들렸다. 긴 속눈썹이 그의 안와에 음영을 드리웠다.

“당신 가슴을 빨고 싶어.”

“…….”

“그래도 돼?”

“…….”

“아까부터 심각한 이야기 하는데 갑자기 빨면 놀랄 것 같아서.”

그렇다고 그렇게 당당히 물어본다고 해서 안 놀랄 것은 아니다. 뻔뻔한 것인지 아니면 그만큼 사람이 무구한 것인지. 이런 상황에서 아니라고 대답하면 그럼 안 할 건가. 릴리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카르낙이 환하게 웃었다. 마치 군것질을 허락받은 아이 같은 얼굴이었다.

카르낙은 얼른 릴리를 돌려세우고 곧장 그녀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보드라운 유륜을 혀로 핥다가 왈칵 그녀의 유두를 삼켰다. 간지럽다가 이내 찌릿한 감각이 척추를 타고 흘렀고 릴리는 ‘아’ 하고 신음을 흘리며 그의 머리를 꼭 안았다. 카르낙은 릴리의 양쪽 젖가슴을 차례대로 주무르고 핥았다. 그럴수록 릴리의 몸은 달아올라 허벅지 안쪽이 홧홧해졌다.

릴리는 아이처럼 제 가슴을 빠는 그의 두 뺨을 잡아 위로 들어 올린 다음 입을 맞췄다. 카르낙이 기꺼이 제 입을 벌리며 그녀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제 복부를 타고 릴리의 사타구니가 매끈하게 아래로 흘러내렸다. 그곳에 기립한 그의 페니스가 있었다. 릴리가 허리를 움직이자 그녀의 음부에 닿은 것이 부드럽게 비벼졌다. 카르낙은 자신의 음경 기둥을 잡아 그녀의 질구 안으로 밀어넣었다.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감각이 황홀하여 몸서리가 쳐졌다. 그는 저를 박아 넣으며 아이처럼 릴리에게 매달렸다. 릴리가 허리를 말며 신음했다. 키스는 곧 숨을 삼키듯 격렬하게 변했다.

우악스럽게 그녀의 안을 왕복하고 싶지만 행여 거친 행위에 릴리가 아파할까 염려되어 그는 릴리의 클리토리스를 찾아 부드럽게 비비며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그러며 자신을 타이르기 위해 계속 혼자 중얼거렸다.

천천히. 천천히. 천천히. 릴리가 그의 어깨에 매달리며 얼굴을 묻었다. 카르낙은 릴리의 목덜미를 빨며 부드럽게 그녀를 얼렀다. 가느다란 허리가 자극으로 옴짝거렸다.

“릴리….”

카르낙이 신음하며 그녀의 이름을 뱉었다.

“천천… 읏!”

느닷없이 릴리가 자신의 귓불을 빨았다. 그 바람에 자신이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 완전히 잊어버리고 말았다. 귓불을 빨던 혀가 부드럽게 귓바퀴를 핥더니 귓구멍 안으로 들어왔다.

“아…”

하고 카르낙은 움찔 허리를 떨었다. 단단히 기립해 있던 것이 더 빠듯하게 부풀며 더 단단하게 섰다. 제 분신은 더할 나위 없이 꼿꼿해졌는데 그의 몸은 반대로 흐물흐물 늘어졌다. 릴리와 몸을 섞을 때만 겪을 수 있는 이상한 반응 기제였다.

그러고 나면 카르낙은 빌게 된다. 더는 용맹스러운 전사도 아니요, 더는 권위적인 왕도 아니요, 또 더는 강인한 남성도 아니었다. 그저 나약한 영혼이 되어 빌게 되는 것이다.

릴리. 제발 날 범해 줘. 제발 날 삼켜 줘. 그녀에게 먹히기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감각에 지배된 헌신적인 육체만이 남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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