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발 아래 은빛 눈-168화 (168/231)

168화

릴리는 손등으로 입술을 훔쳐 내고 죽은 놈의 아가리를 벌렸다. 생명을 빼앗긴 놈의 혀가 바닥으로 축 늘어졌다.

할 수 있어. 할 수 있어. 릴리는 몇 번이고 그렇게 되뇌고는 망설임 없이 놈의 혀를 썰었다. 얼굴에 피가 튀고, 핏물로 손이 흥건했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이것으로 카르낙을 살릴 수만 있다면. 그러므로 혀를 닦아 블리오 자락에 담을 때에 그녀가 느낀 감정은 안도감이었다. 이것으로 남편을 살릴 수 있다는 희열이었다.

죽음이란 그런 것이었다. 그것을 취함으로써 가치 있는 것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은 차라리 안도감, 차라리 희열, 차라리 기쁨이란 것을. 그것은 죄악감보다 고통보다 크다는 것을 릴리는 이제야 깨달았다. 그리하여 그녀는 제 남편을 생각했다. 그가 지키고자 했던 것들을 생각했다. 그가 가질 고통을 생각했다.

자신을 천박하다. 잔인하다, 더럽다 말하던 그를 생각했다. 이 얼마나 순수한 영혼인가. 이 순간 살생조차 숭고하다 생각하는 자신보다 훨씬 더 고귀한 영혼을 지닌 그 사내는 투로였다.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영혼을 지닌 자. 그것이 저의 남편이었다. 드디어 영영 알 수 없을 것만 같던 그를 바로 보게 되었다.

카르낙 발투만.

그 누구보다 고결한 투로의 왕.

***

화려한 마차의 옆으로 긴 천막이 세워졌다. 유곽의 마차답게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천막이었다. 로리아나의 명으로 왕을 눕힐 수 있는 커다란 침실이 세워졌다. 단단한 나무와 가죽으로 엮인 침상 위에 늑대의 털과 가죽으로 만든 푹신한 카펫이 깔렸다. 카르낙은 그 위에 누워 사지를 비틀었다.

입술과 면부가 새까맣게 죽어 가던 카르낙은 해 질 녘이 되자 헛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치료사 말리는 그런 카르낙의 사지를 붙잡게 한 후 이름 모를 액체를 그의 몸 위에 뿌려 댔다.

로리아나로서도 그런 것은 처음 보았다. 말리는 하얀 늑대에 물리면 반쯤 송장이 되어야 죽는다고 하였다. 처음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가 카르낙이 발작을 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살아있으되 산 것이 아닌, 죽었으되 죽은 것이 아닌 상태로 살점이 썩어 문드러지고 뼈가 드러날 때까지 고통 속에 몸부림치다가 죽는 것이다.

보기가 괴롭다. 차마 볼 수가 없어 차라리 그가 평안히 쉴 수 있도록 숨통을 끊어 놓고 싶었다. 편하게 죽일 방법이 있다면. 저 상태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말리의 주문이 먹히기나 할까, 몸이 썩어 들어가기 시작하면 그땐? 그때가 되어도 왕을 살릴 수 있나?

“주인님! 주인님!”

천막 밖, 부나비의 짐꾼 중 하나가 소리쳤다.

“왕비 전하가, 왕비 전하가 오십니다!”

이제나저제나 기다리던 소식이었다. 망설일 것도 없었다. 로리아나와 매짐은 서로를 한 번 쳐다본 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천막을 젖히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파니릴리가 찾을 수 있게 사방에 아주 거대한 불길을 지펴 두었다. 10리 밖에서도 찾을 수 있을 만큼 밝은 빛이어야 한다고 몇 번이고 당부했다. 멀리 그의 실루엣이 보이자 처음 드는 감정은 안도감과 환희 그다음은 초조함이었다. 그녀가 한 걸음, 한 걸음 가까워질 때마다 그랬다. 거기 가만히 서서 왕비를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횃불을 다오.”

로리아나가 손을 뻗으며 재촉하자 감시꾼이 그녀의 손에 횃불을 쥐여 주었다. 치맛자락을 붙들고 뛰어가는 그녀를 따라 매짐도 뛰었다.

파니릴리의 새하얀 면부는 붉게 물들어 있었다. 핏물이 말라붙은 검을 들고 터벅터벅 걸어오는 그녀의 걸음걸이에는 고단함이 묻어 있었다. 바닥에 날이 직직 끌릴 때마다 스르렁스르렁 돌과 모래에 긁히는 소리가 났다.

“왕비 전하!”

매짐이 먼저 그녀에게 당도했다. 그는 저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릴리를 맞이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마치, 마치 저 혼자 탈영병을 죽이고 온 카르낙처럼, 파니릴리 역시 죽음의 고비를 넘고 돌아온 전사처럼 보였다.

온몸에 핏물을 뒤집어쓴 그녀가 블리오 자락을 펼쳐 보이자 그 안에 선홍빛 덩어리가 보였다. 그것이 무엇인지 구태여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그저 경이롭게 그녀를 쳐다볼 뿐이었다. 마치 여왕을 맞이하듯.

“전하.”

그것은 로리아나도 마찬가지였다. 파니릴리는 늑대를 죽였다. 놈을 죽이고 그의 혀를 잘라 왔다. 그녀가 말한 대로였다. 그녀를 믿기로 택했지만 그 믿음에 확신은 없었다.

그러나 파니릴리는 자신이 내뱉은 말을 증명하였다. 그 증거 앞에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었다. 경외심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무언가가 변했다. 캘던에서 마주했던 그 우아하고 온화한 왕비의 내면에서 무엇인가가 변한 것이다.

그것이 로리아나를 두렵게 했다. 알 수 없는 어떠한 것. 절대적인 어떠한 힘이 분명, 분명 파니릴리의 안에 생긴 것이다.

“혀를 잘라 왔어요.”

릴리가 차분하고 기계적인 어투로 말했다. 로리아나는 두 손을 들어 그녀의 앞에 내밀었다.

“저를 주십시오. 왕비 전하. 제가 그것을 말리에게 전하겠습니다.”

“징그러울 거예요.”

릴리의 걱정에 로리아나는 남몰래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괜찮습니다. 비전하께서도 들고 오신 것입니다. 그러니 저 역시 기꺼이 받아 들 수 있습니다. 그러니 괘념치 마시고 제게 주십시오.”

“…그렇다면.”

릴리는 머뭇거리다 제 블리오 자락에서 딱딱하게 굳은 혀를 로리아나의 깨끗한 두 손 위로 옮겼다. 그 감촉이나 온기에 흠칫할 만도 한데 로리아나는 아무런 미동도 없이 그것을 두 손으로 감싸 제 가슴팍에 안았다.

“…전하… 그 검은….”

매짐이 머뭇거렸다.

“아.”

하고 릴리는 그것을 매짐에게 내밀었다. 그는 감격하며 피가 묻은 칼을 받아들었다. 하얀 늑대의 피가 묻은 검이라니. 아버지가 아시면 얼마나 자랑스러워하실까. 아버지가 한 번도 만지지 못한 검을 지금 그 아들인 자신이 만지고 있으니 말이다. 이 검은 대대손손 귀하게 보관하여야 한다.

“…칼… 아니, 폐하께서는….”

릴리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혹여 짧은 그사이에 무언가 잘못되었으면 어쩌나, 두려워 말끝을 흐렸다. 로리아나가 즉시 대답했다.

“말리가 성심껏 모시고 있습니다. 염려 놓으셔도 됩니다.”

릴리는 그제야 한숨을 놓았다.

“폐하를 뵈러 가야겠어요,”

“이쪽입니다, 전하.”

로리아나가 릴리를 천막으로 안내했고 그 뒤를 매짐이 바짝 따랐다. 천막 안에서는 말리가 카르낙의 몸 위에 제 손바닥을 그어 낸 피를 바르며 계속해서 주문을 읊조리고 있었다. 로리아나는 릴리에게 폐하의 영혼이 이계로 떠나지 못하도록 붙잡는 주문이라 설명해 주었다. 말리는 로리아나와 릴리가 들어오고도 한참 동안 주문을 중얼거렸다. 어느덧 노인의 주름진 이마에서 줄줄 땀이 흘러내렸다.

그것을 바라보는 릴리의 기분은 복잡했다. 과거, 부르테에게 이 세상엔 인간이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는 마법 같은 일들이 존재한다고 배웠지만 인간이 그 힘을 통제할 수 있다고 배우지는 않았다. 그러나 주술이란, 지금 말리란 치료사가 외우는 주문 같은 것으로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의 것을 통제한다는 이야기지 않는가.

과연 이것을 믿어야 하는가. 그러나 열과 성을 다해, 자신의 피까지 내주며 온 힘을 다하는 말리의 진심은 또 어떠한가. 이것이 과연 그에게 효과가 있을까. 세상엔 믿지 못할 일투성이다. 방금 전까지 자신이 겪은 일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느 누가 늑대와 그 같은 교감을 주고받을 수 있다 믿겠는가. 그것 역시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의 것이리라.

“일종의 기도 같은 것이랍니다, 전하.”

그런 릴리의 마음을 눈치챈 것일까. 로리아나가 속삭이듯 말했다.

“아마네스 여신을 향한 것은 아니지만요. 말리는 ‘협상’이라도 하더군요. 그녀가 말하는 신은 괴팍하고 변덕스러워 늘 어르고 달래야 한다고요. 자애로운 아마네스 여신과는 퍽 다르지요.”

신기한 설명이었다. 확실히 그녀의 말처럼 아마네스의 여신과는 정반대의 것으로 느껴졌다. 어쨌든 신비하고 강력한 힘에 기대는 것은 같지만 말이다.

“태어나서 주술을 행하는 광경은 처음 봐요. 폐하께선 절대로 믿지 못하실 거예요.”

로리아나도 릴리의 말에 동의했다. 엘버그 왕국에서 주술이나 마법에 관해 가장 비관적인 이를 꼽으라면 그것은 카르낙 발투만일 테니 말이다. 이러한 것들을 그만큼 혐오하는 이는 일찍이 이 왕국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로리아나는 아니었다. 아마네스를 믿는 것은 아니었지만 세상을 움직이는 마법 따위는 존재한다고 여겼다.

“어느 순간 엘버그에서는 사라진 광경이지요. 사람들도 더는 믿지 않게 되었고요. 하지만 저는 말리와 그녀가 숭배하는 힘을 믿는답니다. 어떤 때에는 낡고 오래된 것이 최선일 때가 있거든요.”

마지막 말에는 릴리 역시 동의했다. 그녀 역시 새로운 것만큼 낡은 것이 주는 힘을 인정하고 있었다. 낡은 것이란 결국 아주 오래전부터 지금껏 쌓아 온 수많은 깨우침이 아니던가.

“늑대의 혀는?”

말리는 크게 숨을 고르더니 이마의 땀을 닦아내며 물었다. 날카로운 목소리는 릴리가 알던 노인의 것이 아닌 듯했다. 무언가가 그녀의 영혼을 반쯤 잠식한 것 같았다. 분명 말리에게선 아주 기묘한 힘 같은 것이 느껴졌다.

로리아나가 얼른 노인에게 늑대의 혀를 건네주었다. 말리는 그것을 받아들고 선득한 눈빛을 빛냈다. 마치 만물을 꿰뚫어 보는 것 같은 눈이었다. 그녀는 다시 날카로운 소리로 물었다,

“늑대는 죽었어?”

로리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죽였어요.”

그러자 말리는 늑대의 혀를 들고 눈을 감은 채 다시 뜻 모를 주문들을 외웠다. 그러고는 아직 굳지 않은 늑대의 피를 카르낙의 목과 코와 이마에 긋고는 칼로 짐승의 살점을 아주 작게 도려냈다.

푸르게 질린 카르낙의 입을 벌려 그것을 밀어 넣고 말리는 파니릴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릴리는 다가가 노인의 손을 맞잡았다. 그러자 노파는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릴리의 손바닥에 칼을 그었다.

읏, 하고 릴리가 움찔 신음을 흘렸다. 하지만 곧 입술을 깨물며 참아 냈다. 노파가 그녀의 손을 더 잡아당겨 카르낙의 입속으로 그녀의 피를 흘려 넣었기 때문이었다. 로리아나가 소스라치게 놀라 다가왔다.

“말리!”

카르낙의 입술을 타고 흘러 들어가는 자신의 붉은 피. 릴리는 그 낯설고 기묘한 광경에 넋을 잃었다.

“그는 더 강해질 거야.”

노파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여전히 광인의 눈빛을 한 채였다.

“더 질기고 뜨거운 생명을 갖게 될 거야.”

“말리, 이건 전혀 이야기된 것이 아니잖아요.”

“말리의 뜻이 아니야.”

말리가 그렇게 말했다. 말리의 뜻이 아니라고. 로리아나는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그럼 대체 누구의 뜻인가. 알 수 없는 미지의 것들이 원하는 일인가?

“이 남자는 여자를 원한대.”

“…….”

“원하는 것을 들어주어야 한대.”

“…….”

“그러지 않으면 그들은 남자의 영혼을 내어주지 않을 거야. 그래서 그녀의 생명을 나누어 주는 거야.”

“…….”

“그만큼 남자의 생명은 강해질 거야.”

로리아나는 릴리를 보았다. 뜨거운 피를 흘려 넣는 릴리의 안색은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지지 않는 듯 고요하였다. 이것은 등가 교환 같은 것이었다. 카르낙이 강해지는 만큼 파니릴리는 연약해지는 것이다. 그의 생명이 길어지는 만큼 파니릴리의 생명은 짧아졌다. 모르겠다. 이것이 옳은 일인가? 카르낙의 입 안으로 릴리의 혈흔은 계속해서 흘러들어 갔다. 넘쳐 그 입가로 흐를 만큼.

“…이제, 이제 충분해요, 말리.”

로리아나가 더듬거렸다. 그러나 말리는 듣지 않는 것 같았다. 노인의 얼굴은 광기로 뒤덮였다. 마치 선악을 구분하지 못하는 아이의 천진함과 같은 낯빛이었다, 슬슬 겁이 났다.

“말리!”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