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발 아래 은빛 눈-169화 (169/231)

169화

“두세요.”

릴리가 그녀를 저지했다.

“이러다 왕비 전하께서도 같이 쓰러지세요.”

“아직 괜찮아요.”

태연한 척하지만 릴리의 안면은 점점 하얗게 질려 가고 있었다. 상관없어. 그를 살릴 수 있다면 상관없다. 생이 줄어드는 것 따위. 애초에 사는 것 따위 중요하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카르낙 발투만이 있어야 한다. 그가 더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좋다. 엘버그를 위해서도, 투로를 위해서도, 발투만가의 왕위를 위해서도 아니야. 내게 그가 필요하기 떄문이다. 나에게 아직 카르낙 발투만이 필요해.

쿨럭! 하며 카르낙의 몸이 위로 튀어 올랐다. 입 안에 고였던 핏물이 왈칵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그 반동에 놀라 로리아나가 릴리를 붙잡아 당겼고 함께 중심을 잃고 뒤로 쓰러졌다. 한바탕 피를 토하더니 그는 끙끙거리며 다시 자리에 털썩 드러누웠다. 말리는 화롯가로 다가가 달구어진 쇠를 집어 들었다. 그녀의 행동은 도저히 노인의 것이라고 보기 어려울 만큼 재빨랐다.

치이이이이익, 하고 살이 타들어 가는 소리. 카르낙의 몸이 발작하듯 떨렸다. 정신을 잃은 와중에도 고통만은 생생하게 느껴지는 듯했다.

“잡아. 잡아!”

말리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뭣도 모르고 삽시간에 부나비의 시종들이 달려들어 카르낙의 사지를 눌렀다. 살이 타는 냄새가 진동을 했다.

로리아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파니릴리를 붙잡고 있는 것인지 제가 매달리고 있는 것인지 모를 지경으로 겁이 났다.

대체 이게 사람을 살리겠다는 것인지 아니면, 아예 있는 숨통도 다 끊어 놓겠다는 것인지. 카르낙의 비명 소리가 괴괴하게 퍼졌다. 한참 동안 그렇게 고막을 흔들다가 혼절을 한 듯 뚝 멎었다.

말리가 그의 몸에서 물러선 것은 그로부터도 한참이나 지난 다음이었다. 그제야 말리는 노인답게 몸을 축 늘어뜨렸다. 로리아나는 그동안 파니릴리의 상처에 고약을 바르고 붕대를 둘러 주었다. 그러고는 함께 말리가 덩치 큰 장정 하나를 곤죽으로 만들어 기절시킬 때까지의 모습을 꼼짝없이 지켜보았다.

“다 된 건가요?”

릴리가 물었다. 그녀는 대체 어떻게 제 남편의 비명을 들으면서도 눈 하나 깜짝 않고 버텼는지. 로리아나는 혀를 내둘렀다. 어떤 면에서는 카르낙보다 더 독한 사람 같았다. 말리는 더듬더듬 옆을 짚었다. 여종 하나가 다가와 그녀를 부축해 간이 의자에 앉혔다. 노인은 떨리는 손으로 이마를 닦아 내며 말했다.

“내일 아침이면 깨어날 거요.”

릴리는 카르낙에게 다가갔다. 불로 지진 살결은 마치 불씨를 안에 담아 둔 듯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그 뜨거운 열기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폐하의 어깨는… 어떻게 되는 거죠?”

“최선을 다했으니 결과를 기다려야지.”

“…폐하께선 무사히 깨어나셔야 해요.”

파니릴리는 남편의 검푸른 얼굴을 쓰다듬었다. 고통으로 온몸이 뜨거웠고 이마에는 여전히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폐하께서 온전히 깨어나지 못하시면….”

릴리의 말을 들으며 말리는 여종이 건네준 맑은 물을 한 잔 들이켰다. 노인은 이제 제대로 대답할 여력도 없는 듯 보였다.

“당신에게 책임을 묻겠어요, 말리.”

파니릴리는 단호하게 말했다. 왕의 목숨에 책임을 묻겠다는 것은 결과에 따라 그녀의 목숨을 앗아 가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누구나 할 수 있는 협박일 수도 있으나 릴리가 하는 것은 달랐다. 그런 말을 하지 않던 여자였다. 그러니 그 말의 무게를 로리아나는 잘 안다. 남편의 위태로움이 그녀를 변하게 했나, 아니면 그녀의 안에 있던 불꽃이 그동안의 시련으로 불타오르게 된 것일까?

적어도 캘던에서의 그녀는 현명하고 다정하나 자비롭다 못해 유약해 보이기까지 한 사람이었다. ‘현자’는 될 수 있어도 ‘군주’는 될 수 없을 것 같던 여인. 그런 그녀에게서 카르낙의 한 귀퉁이를 보았다. 싹뚝 잘려 나가 그녀의 영혼에 접착된 것처럼.

한차례 고통의 파고가 지나갔으니 릴리는 심신을 회복하려 천막 밖으로 나왔다. 마른하늘 위로 무수히 많은 별들이 떠 있었다. 그 안에 희망만을 담아보려 노력하였으나 자꾸만 불안과 슬픔의 그림자가 어렸다. 카르낙이 만약 잘못되면, 그가 잘못되어 나 혼자 남아야 한다면, 그렇다면 그땐 어쩌지. 이렇게 영영 저 혼자가 될까 두려웠다.

그런 릴리의 곁에 조용히 로리아나가 다가왔다. 그녀는 따듯한 포도주 한잔을 릴리에게 건넸다. 탄력 있는 피부 위로 사르릉, 장식품들이 흔들리며 반짝였다. 릴리는 건네준 것을 받아들며 옅게 웃었다. 마침 술이 간절하던 참이었다.

“고마워요.”

로리아나도 릴리를 따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 하늘을 보며 파니릴리 왕비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한참 만에 로리아나는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는 하실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외람되오나 말리 역시 그렇고요.”

“알아요. 알지만, 한편으로는 조금 더 해야 하는 것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돼요.”

“…….”

“조금 더 무언가, 무언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있지 않을까 하고.”

무엇보다도 기다림이 고통이었다. 이렇게 멍하게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그가 눈을 뜰 때까지 끊임없이 무언가를 하고 싶었다. 그를 위해. 끊임없이. 차라리 그편이 덜 고통스러울 것 같았다. 그 역시도 이랬을까. 내가 아이를 잃고 사경을 헤매고 있던 내내 그도 이런 마음으로 나를 기다렸을까.

그 시간이 너무도 고통스러워 차라리 나를 그라타로 보내고 말겠다고 결심했을까. 그랬을 거다. 분명 그랬으리라. 이젠 그 마음을 너무나 잘 안다.

차라리 지금의 상황은 축복일 것이다. 자신의 피라도 내어 주고 늑대의 목숨을 앗아 그에게 바칠 수 있었으니. 그를 위해 그마저도 하지 못한 채 마냥 기다려야만 했다면. 그 무기력함은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었으리라. 그랬네요, 칼. 당신은 그만큼 강했네요. 나보다도 훨씬 더.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한 적이 있나요, 로리아나?”

로리아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전하. 저는 사랑을 팔지만, 그것을 사지는 않는답니다.”

“맞아요. 그건 삶을 위태롭게 만드니까요.”

자조적인 어투였다. 로리아나는 허공을 주시하는 릴리를 바라보았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바라보는 듯 릴리는 저 멀리 어딘가를 보고 있었다.

“사람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나락으로 떨어뜨리지요. 더는 인생을 관망하지 못하게 만들어요.”

그랬다. 릴리는 늘 인생을 관망하는 자였다. 어디에도 충분히 마음을 두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사랑하노라 단언하였다. 마음을 따르기보다 정해진 규율과 도덕을 따랐다. 자애롭고 다정한 가면을 쓰고서 사실은 그 어느 것에도 필요 이상의 정을 주지 않았다.

대신 삶 자체의 숭고함을 사랑한다 말했다. 그것을 사랑하여 이 세상 모든 것을 고루 애정한다고. 그렇게 추상적인 것을 좇으면 적어도 사랑이 짓밟히거나 파괴될 일은 없었다. 삶은, 생명은, 계속해서 싹트고 피어나고 또한 영원히 지속되니까.

그렇게 삶에서 동떨어져 멀리서 바라보면 무언가를 판단하기 쉬웠다. 옳고 그른 것. 바른 것과 바르지 않은 것, 현명한 것과 그렇지 못한 것. 그것을 구분하기는 쉬웠다. 시야가 넓고 모든 것이 작아질수록 더욱 그랬다. 그것을 포기할 수 없었다. 겁쟁이여서, 너무도 겁이 나서 그 아래로, 인생의 나락으로 내려올 수가 없었다.

“전하께선 무언가 변하셨어요.”

로리아나가 말했다.

“뵙지 못하는 동안 아주 많이 변하셨습니다. 오래전, 캘던에서 뵈었을 때 전하께서는 아마네스 여신의 아이, 그 자체셨지요.”

화려하고 하얗고 온화하고 깨끗하고 눈부시게 투명한 존재.

“아름답고 자애로워 숭배할 수밖에 없는 존재셨어요.”

그리고 뭐랄까. 사람 같지가 않았다. 어떻게 해도 그녀를 인간으로 여길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아주 아름다운 인형처럼 느꼈던 것 같다. 언제나 옳고 좋고 따듯한 말을 하지만 그 이상의 것은 없었다.

“그리고 지금은 어딘지 모르게, 왠지 모르게.”

“…….”

“왕비 전하에게서 익숙한 것을 느껴요.”

“…….”

“아주 뜨겁고, 치열한 삶의 냄새 같은 것.”

“…….”

“우리같이 미천한 존재들에게나 느끼는…. 뭐 그런 것들이요.”

릴리는 피식 웃었다. 이제 안다. 알게 되었다. 더는 관망하는 자가 아니니. 꼭대기에 자리하여 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위치가 아니니. 그러니 더는 입바른 말이나 하는 아마네스 여신의 아이 따위가 아니다.

카르낙도 그것을 원해 저와 결혼했을 테고, 엘버그의 사람들이 원하는 것도 그런 인형 같은 신의 아이 파니릴리일 테지만 릴리는 더 이상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이제 깨닫게 되었거든요. 로리아나. 세상은 그렇게 쉽게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요”

“…….”

“때론 피를 묻히고, 때론 불의를 저지르고, 때론… 때론 기꺼이 목숨을 갈취해야 할 때가 온다는 것을 말이에요.”

“…….”

“거기서 물러설 수 없다면, 나는 기꺼이 이 방식을 따르려고요.”

이제는 이해한다. 카르낙이 선택해야만 했던 방식. 비천하게 태어난 그는 자신에게 소중한 것들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진창을 굴렀다. 파니릴리, 저가 사랑이니 평화니, 생명의 존귀함이니, 당연하게 평화와 안정을 깔고 앉아 그러한 것들을 지껄일 동안 그가 살아온 삶이 얼마나 험난했을지.

마음속에 품고 있어도 이루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몰라서 지키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지킬 수 없기 때문에 놓아 버린 신념 따위들.

“이제 카르낙 발투만을 이해하게 되었어요.”

감히. 감히 이제는 조금은 안다. 그가 바라던 것이 무엇인지. 도덕이니 신념이니 정의 따위는 수많은 더러움과 피와 죽음을 먹고 자란다는 것을.

카르낙이 기꺼이 나락으로 떨어져 일구어 나간 것은 그것이다. 자신이 카르낙을 위해 기꺼이 늑대의 혀를 잘라온 것처럼. 그는 저처럼 나약하고 누군가 지켜 주지 않으면 순식간에 부수어져 버릴 것들을 위해 기꺼이 비정함을 택했다.

그것은 복수나, 분노나, 비천한 자의 열등감 따위가 아니었다. 카르낙이 해 온 것은 그보다 훨씬 더 숭고하고 가치 있는 것들이었다. 그런 자의 곁에 있으며 그가 미련 없이 버린 것을 주워 소중히 간직하겠다는 저의 바람이나 신념은 그저 사치였다. 철모르는 것이 부르는 어리광이나 다름이 없었다.

“폐하께서 깨어나시면, 전하께선 어쩌실 생각이신가요?”

로리아나의 임무는 국왕 부부를 무사히 리오로 데려가는 것이었다. 거기까지 임무를 마치고 나면 그 이후는 온전히 캘던성 사람들의 몫이었다. 핀은 이미 캘던 정예병을 끌고 리오에서 왕을 기다리고 있다. 아마도 전쟁을 염두해 두고 있는 것 같았다. 모두가 피해 오던 테르만 테이조와의 격전을. 릴리는 단숨에 와인을 들이켰다.

“저도 피를 좀 묻혀 보려고요.”

늑대의 말이 떠올랐다.

[넌 후회하게 될 거야.]

이왕 후회를 하게 된다면, 그렇다면 원 없이. 마지막까지 추락해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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