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분명 보았습니다. 늑대가, 늑대가 비전하를 보고 몸을 돌렸습니다, 분명, 비전하를 피해서 몸을 돌리는 것을 보았어요. 제 눈으로 똑똑히, 똑똑히 보았습니다.”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하던 것을 매짐은 기꺼이 확신에 차 말했다. 이젠 믿을 수 있었다. 감히 기적을 보았노라 증언할 수 있었다.
“봐요. 매짐이 저렇게 말하잖아요.”
그가 그렇게 확언을 하니 로리아나는 말문이 막혔다. 더는 무어라 설득해야 할까. 이런 상황에 쉽사리 무언가를 판단 내릴 수 없었다.
“늑대는… 놈은 어떻게 찾으시려고요?”
“찾을 수 있어요.”
“어떻게요.”
“어떻게든요. 찾을 수 있어요, 로리아나. 설명하긴 힘들지만 분명 난 그 짐승을 느낄 수 있어요.”
릴리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로리아나도 따라 일어서며 되물었다.
“느낄 수 있다고요?”
“네. 느낄 수 있어요. 칼이 필요해요.”
“…….”
경황이 없는 와중에도 로리아나는 제 사병에게 손을 내밀어 그의 칼을 받았다. 쇠붙이의 무게에 못 이겨 손목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너무 무거워, 다른 것은?”
그러자 사병이 제 허리춤을 뒤져 좀 더 작은 칼을 내밀었다. 반원을 그리는 둥근 형태의 칼날, 주로 나무를 베어 낼 때 쓰이는 것이었다. 로리아나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이런 건 여자가 다룰 수 없어. 하는 수 없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로리아나는 자신의 마차로 돌아가 귀중품 상자를 열었다. 멀리 바다 건너의 상인이 하룻밤 잠자리 값으로 내고 간 이국의 검. 영롱한 사파이어와 은으로 장식된 것을 들고 와 릴리에게 내밀었다.
“한 번도 사용해 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이것이 좋겠어요.”
다행히 상자에 처박아 둔 것치고 칼의 상태는 좋았다. 놀랄 만큼 좋았다. 녹이 슬지도 않았고 칼날에 이가 빠진 부분도 없었다. 다만 날이 한쪽밖에 없어 엘버그에서는 쓰지 않는 검이었다. 그래도 그녀에게는 무거워 들기 힘든 것보다는 이렇게 가볍고 뾰족한 것이 나으리라.
릴리는 그것을 받아 들고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가볍고 손에도 잘 맞았다. 유려하게 흐르는 날 위로 볕이 발광하였다. 보고 있는 사람이 아찔하여 오금이 지릴 정도였다.
“제 사병을 데려가세요.”
“안 돼요.”
사병을 부르려는 것을 릴리가 손을 들어 저지했다.
“혼자 가시는 건 안 돼요. 위험해요.”
“누군가 따라오는 것이 더 위험해요. 늑대가 흥분할 거예요. 카르낙도, 늑대에게서 절 구하려다 다쳤어요. 또 누군가를 다치게 할 순 없어요.”
로리아나가 릴리의 손목을 쥐었다. 감히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지만 불안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
“전하. 만일, 만일 일이 잘못된다면… 발투만가에는 아직, 아직 후사가 없습니다.”
혹여나 카르낙 발투만이 잘못되고, 동시에 파니릴리까지 잃는다면 발투만가는 멸망이다. 발투만가의 멸망은 곧 투로의 멸망이었다. 다시금 엘버그는 이 나라의 귀족들 손에 들어갈 테고 그들은 투로의 씨를 말릴 것이다.
두 번 다시 이런 반역이 일어나지 않도록. 그렇게 생각하자면 어쩌면, 지금 이 순간 로리아나는 차라리 카르낙 발투만을 포기하고 파니릴리를 살리는 것이 더 옳은 결정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녀라면, 그녀라도 살아서 발투만가의 명맥만 이어 준다면 혹여 왕권 테이먼 테르조와 그 일당들에게 넘어간다 하여도 감히 투로를 멸살시킬 순 없을 것이다. 대대로 왕실의 적통을 이어받은 발투만 왕가의 미망인이 있는 한, 함부로 행동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러니 전하만이라도….”
“살릴 거예요.”
그 이외의 것은 생각하지 않는다. 카르낙을 반드시 살릴 거다. 릴리는 그것을 확신한다. 확신할 수밖에 없다. 확신하지 않으면 더는, 더는 앞으로 나갈 수가 없으니.
“그러니 날 믿어요, 로리아나. 날 믿고 기다려요.”
로리아나는 차마 대답할 수 없었다. 그녀를 믿느냐고? 물론 믿는다. 파니릴리의 성격을 아는 이라면, 그녀를 겪어 본 이라면 누구라도 그녀를 믿는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을 믿냐고? 아니. 절대로 못 믿지. 그러므로 로리아나는 대체 어떤 것을 믿어야 좋을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녀를 믿고 싶다. 정말로 믿고 싶다. 그러나 그녀를 믿었다가 그녀마저 잃을까 너무도 두려웠다. 처음 벌판에서 오코를 보았을 때, 놈이 왕의 말이란 것을 알았을 때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으리라 예상은 했지만 설마 이런 상황일 줄은 예견하지 못했다. 릴리는 그녀의 손을 한번 꼭 쥐었다가 놓고 마른 덤불 속으로 걸어갔다.
“어쩔까요?”
멍하게 그 뒷모습을 바라만 보고 있는데 로리아나에게 사병이 물었다. 그녀의 명령이 떨어진다면 곧장 파니릴리를 쫒을 작정인 것 같았다. 무어라 대답해야 할까. 무엇을 믿어야 할까. 로리아나는 떨리는 손으로 제 반듯한 이마를 매만졌다.
어느 쪽도 확신할 수 없다면, 더 믿을 수 있는 것을 선택해야만 했다. 더 믿을 수 있는 것, 적어도 믿을 가치가 있는 것. 그렇다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분명 하나뿐이었다.
파니릴리를 믿는 것. 설령 그것으로 자신의 목줄조차 위태로워진다 해도 그것이 더 가치가 있을 것이 분명했다.
“가서 말리를 도와.”
“네.”
***
릴리는 본능에 따라 움직였다. 코끝에 녀석의 냄새가 스쳤다. 그것이 정말 ‘향’일까, 그것은 장담할 수 없다. 다만 믿을 뿐이다. 감각만이 자신을 그에게 이끌어 줄 것이라고.
그리하여 그녀는 자신의 감각에 의지해 발걸음을 내디뎠다. 마른 풀과 잎사귀가 모두 떨어진 죽은 나무를 몇 개쯤 지나자 어디서부턴가 바닥의 모래가 하얘지기 시작했다. 릴리는 직감했다. 이곳이 놈의 거처라는 것을.
새하얀 모래, 그 너머, 아주 얕은 호수가 있었다. 에메랄드빛 물결이 치는 이 광경을 릴리는 본 적이 있다. 꿈에서. 사지를 헤매던 때에 꿈에서 이곳을 보았다.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느덧 끝도 없는 사막이 펼쳐져 있었다.
어디가 어딘지 도저히 알 수 없는 곳. 희미했던 기시감이 현실로 닥친 순간, 그녀는 이것이 예정된 운명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운명. 이 땅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정해져 있던 운명. 신이 존재하는가. 정말로 아마네스가 존재하는가. 그것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 저 멀리. 놈이 보였다. 작은 섬처럼 솓아 있는 삼각지에 편안하게 누워 제 털을 고르다가 늑대는 고개를 들었다.
가녀린 여인의 실루엣, 그녀의 손에 들린 가늘고 매끄러운 칼날. 릴리는 조용히 그에게로 다가갔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찰박, 찰박 물소리가 났다.
언어는, 입 밖으로 내뱉어지는 소음 따위는 필요하지 않았다. 놈은 릴리를 보았고 릴리는 놈을 보았다. 그 순간만이 전부였다. 그 순간에는 오직 그것만이 전부였다.
그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 저를 처음 맞닥뜨리던 그 순간, 놈은 이때를 예견하고 있었다. 릴리의 눈에서 그것을 읽었다. 아니 릴리의 눈을 본 순간 그 안에서 신이 예비한 운명의 순간을 읽었다.
그러니 넌 알고 있었을 거야. 후회하게 만들지 말라는 그 말의 뜻을 이제 알게 되었어. 후회는 네 것이 아니었어. 내 것이었어.
자신의 죽음을 미리 내다본다는 것이 두렵지 않았을까. 끝내 자신의 평화로운 둥지까지 침범한 인간이 밉지는 않을까.
그러나 늑대는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도망가려 하지도 않았고, 공격하려고 이를 드러내지도 않았으며 도리어 평화로운 눈동자로 릴리를 두렵게 만들었다.
마침내 릴리는 그의 섬 위에 발을 내디뎠다. 젖은 발 위로 하얀 모래가 달라붙었다. 날카로운 눈동자가 그녀를 들여다보았다. 그는 분명 심연을 읽는 눈이었다.
[넌 후회하게 될 거야.]
놈이 말했다. 넌 후회할 거야. 릴리는 그의 말에 답할 수 없었다. 후회하게 될까. 결국 후회하게 될까.
[아이야. 너는 생명을 죽여본 적이 없지. 살아있는 숨을 갈취해 본 적이 없지. 그 죗값이 얼마나 크고 무거운지 너는 겪어 본 적이 없지. 네 등 뒤에는 날개가 보인단다. 무구하고 존귀한 아이야. 나를 죽이면 네 날개는 찢기고 더럽혀질 거야. 너는 후회와 두려움에 매몰되어 나락으로 떨어지겠지.]
그가 쏟아내는 수많은 감정들, 언어로는 표현되지 않는 영혼의 울림과 진동이 그녀를 두렵게 했다.
[너는 무엇을 택하겠니. 네 영혼을 뜨거운 불길 아래에 태울 수도, 아니면 천국의 빙벽 안에 가두어 영원히 빛이 바래지 않게 지킬 수도 있단다. 그러니 말해 보렴. 너는 무엇을 택하겠니.]
“…….”
릴리는 떨리는 손으로 늑대의 콧잔등 위에 손을 얹었다. 그는 마치 강아지처럼, 그래, 훈련이 아주 잘된 충성스러운 군견처럼 릴리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손끝에 놈의 온기가 느껴졌다. 천국처럼 보드라운 그의 감촉도 느껴졌다.
[나를 만질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너뿐이야.]
늑대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그래도 나를 죽이겠니? 네 삶을 더럽히고 말 최초의 살생을, 너는 굳이 하고야 말 거니?]
검 자루를 쥔 릴리의 손이 바르르 떨렸다. 신의 사자. 릴리는 공허하게 그 단어를 뱉어 내고 망설임 없이 놈의 턱에 칼끝을 찔러 넣었다. 푹, 찌르고 들어가 놈의 턱을 꿰뚫고 들어가 입천장에 닿았다.
늑대가 비명을 질렀다. 릴리는 몸부림치지 못하게 놈의 주둥이를 꽉 잡았다. 입에서 쏟아져 나온 핏물이 릴리의 얼굴을 흠뻑 적셨다. 그녀는 어금니를 꽉 물고 칼끝을 조금 빼내었다가 더 힘주어 박아 넣었다. 절로 신음 소리가 났다.
마침내. 칼끝이 놈의 동공을 뚫고 나왔다. 그는 몇 번이고 몸부림을 치다가 털썩, 머리를 떨구었다. 하얀 모래사장에 붉게 물들어 갔다. 아름다운 물결 위로 그의 핏물이 춤을 추었다.
늑대의 몸이 축 늘어지자 릴리는 그제야 박아 넣었던 칼을 빼내고 뒤로 물러섰다. 뜨겁게 흐르는 피에서 지독한 피비린내가 났다. 릴리는 그 비릿함을 이겨 내지 못하고 구역질을 해댔다. 속이 뒤집혀 먹은 것들을 모두 게워 낸 후에야 그녀는 휘청이며 몸을 일으켰다.
괜찮아.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후회하지 않아. 고귀하고 싶었던 적 없어. 생명을 앗아 간다는 그 고통이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래야 한다면, 반드시 그래야 한다면 나는 망설이지 않아. 타락해도 좋다. 날개가 찢겨도, 더럽혀져도 좋다. 그것이 삶의 무게라면, 그것이 모두가 짊어진 고통이라면 피할 이유가 없었다. 이것은 엘버그인이 짊어진 무게. 투로가 짊어진 무게. 핀이. 로로가. 에이가가, 그리고 카르낙 발투만이 짊어진 무게라면 기꺼이 같은 것을 짊어질 테다.
그러니 이것은 가치 있는 고통이다. 가치가 있는 죄악이다. 그러니 두 번이라도, 세 번이라도 할 수 있다.
봐. 이게 나야. 난 더 이상 존귀한 신의 아이가 아니야. 알기어스가 아니야.
나는 파니릴리 발투만이야. 타락한 투로의 아내. 그러니 더는 무서울 것이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