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매짐은 완전히 패닉 상태에 빠져 버리고 말았다. 어떤 놈이 어떻게 먼저 공격을 할까. 아니, 모두가 한꺼번에 덤벼들까? 놈들이 몸을 날리면 그 땐 어떻게 해야 하지? 맞서 싸워야 할까? 달아나고자 한다면 도망갈 수는 있을까?
그르릉… 으르릉.
듣기에도 소름이 끼치는 낮은 울음소리. 상체를 낮게 숙이며 공격 자세를 취하더니 곧 한 놈이 위로 뛰어올랐다. 그것이 신호가 되었다. 늑대 무리들은 일제히 빈틈을 찾아 달려들었다.
“저리 가! 저리 가라고!”
매짐은 비명을 지르며 칼을 휘둘러 댔다. 어쩌다가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늑대의 주둥이를 쳐 버렸고 깨갱, 하는 소리를 내며 달려들던 놈이 옆으로 쓰러졌다. 그러자마자 또 다른 놈이 달려들었다. 이번엔 뒤편에서부터였다. 어깨에 단단한 늑대의 발톱이 느껴졌다.
그는 또 소리를 지르며 몸을 뒤틀었다. 옷가지를 물어뜯던 녀석이 몸부림에 못 이겨 찢긴 천 조각을 물고 바닥으로 착지했다. 그는 닥치는 대로 발로 차고 검을 휘두르며 난리를 쳤다. 늑대를 죽이기는커녕, 제 몸에 달라붙지 못하게 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듯 보였다.
그러다가 한 녀석이 그의 어깨를 물었다. 날카로운 송곳니가 천을 뚫고 피부를 파고드는 것이 끔찍하리만치 분명하게 느껴졌다.
“아아악!”
매짐은 비명을 질렀다.
“매짐!”
릴리가 경악을 하며 그에게로 달려갔고 카르낙은 검은 늑대의 몸통을 반으로 가르며 아내를 불렀다.
“릴리!”
안 돼! 끼어들지 마! 그녀에게 달려가고 싶었으나 또 다른 녀석이 달려들었다. 빌어먹을! 릴리는 매짐에게 달라붙은 녀석의 코앞에 횃불을 들이밀었다. 뜨거움을 느끼자 녀석이 그의 살갗에서 송곳니를 빼고 저만치 멀어졌다.
매짐이 어깨를 움켜쥐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손에 쥐고 있던 검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매짐, 괜찮아요?”
“으으윽….”
그는 아픔에 몸서리를 치면서도 검을 찾으려 바닥을 더듬었다. 눈앞이 고통으로 흐릿했으나 정신을 차리려 애를 썼다.
으르릉….
릴리가 횃불을 들고 버티자 늑대는 느리게 걸으며 그녀의 주위를 돌았다. 어떻게든 제가 인간의 피부를 찢어 먹어야겠다는 듯 놈의 눈동자는 집요하였다.
“안 돼.”
릴리가 횃불을 휘둘러 경고했다. 그러고는 경고하듯 한 번 더 반복하여 말했다.
“안 돼.”
그르릉…. 놈이 또 송곳니를 드러내며 울었다. 꼭 저리 비키라는 듯. 너와는 상관없으니 끼어들지 말라는 듯, 한껏 짜증이 난 소리. 릴리는 고개를 흔들었다. 안 돼. 이들은 안 돼.
잘 알고 있다. 이 늑대들은 자연의 법칙대로 살고 있을 뿐이다. 사냥에 성공해야 배불리 먹을 수 있고 배불리 먹어야 다음 사냥 때까지 굶어 죽지 않을 수 있다. 어제는 토끼, 그제는 다람쥐, 사슴, 물소 그리고 오늘은 그것이 인간일 뿐. 그들에게 어떤 증오나 악의도 없음을 안다.
그래. 너희는 사람과 다르지. 단지 죽음을 원해서 죽이지 않지. 그래 알아. 모두 살기 위해서야. 난 매짐이 여기서 죽기를 원하지 않아. 내 남편이 여기서 다치길 원하지 않아. 그러니 이들은 안 돼. 다른 사냥감을 찾아. 반드시 다른 사냥감을 찾을 수 있을 거야. 너희는 강하고 똑똑하니까 분명, 분명 그럴 수 있어. 그러니 부디 우리는 놓아줘.
늑대가 몇 번이고 제 머리를 흔들었다. 꼭 말이 투레질을 하는 듯했다.
“부탁이야.”
릴리가 중얼거렸다. 놈이 다시 머리를 흔들었다. 매짐은 눈을 가늘게 뜨고 녀석이 하는 행동을 지켜보았다.
저놈이 왜 저러지? 살의로 가득하던 놈이 마치 제 눈앞의 뭐라도 쫓아내려는 듯 자꾸만 머리를 흔들고 있었다. 거기에다가 아까부터 계속 뒤로 물러설 듯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지 않은가. 방금까지 달려들어 제 어깨에 대문짝만 한 구멍을 내 놓은 놈이다. 녀석의 움직임이 너무나 수상했다.
그르릉.
어디선가. 또 낮은 울음소리가 났다. 그러나 이번엔 달랐다. 분명 좀 전의 것과는 달랐다. 낮은 소리이나 뇌간이 흔들릴 만큼 두텁고 무거우며 천둥이라도 친 듯 발아래가 진동했다.
“…….”
카르낙은, 막 네 번째 늑대의 목을 가르고 소리의 진원지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살아남은 놈들이 낑낑거리는 소리를 내며 발로 땅을 긁기 시작했다. 대체 무엇일까.
새까만 밤의 어둠에 숨어 있던 놈의 앞발부터 달빛 아래에 드러났다. 날카로운 발톱이 흙바닥에 박혔고 두툼하고 커다란 앞발은 눈가루라도 묻은 듯 새하얗게 빛났다.
“…설마….”
매짐이 혼잣말로 중얼댔다. 놈의 회색 눈동자가 어둠 속에 발광했다. 사납고 매서우며 유리 조각처럼 서슬이 시퍼런 빛깔.
하얀 늑대다. 신의 사자라 불리우는 아마네스의 늑대. 대장간에서 무두질을 같이 한 덕에, 죽은 늑대의 시신은 여러 번 보아 왔다. 들개보다는 조금 더 큰 몸통에 전체적으로 날렵하고 호리호리한 몸집을 갖고 있었다.
그는 사람들이 말하는 하얀 늑대도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저 같은 몸집에 어두운 색의 털 대신 눈처럼 하얀 털을 가지고 있겠거니, 매짐이 상상은 그것이 다였다.
그러나 눈앞에 드러난 하얀 늑대의 모습은 그의 상상과는 전혀 달랐다. 놈은 앞발뿐 아니라 모든 것이 보통의 늑대와는 달랐다. 무엇보다 놈은 늑대가 아니라 곰과 비슷한 크기였다. 아니 곰보다 더 컸다.
신의 사자라 죽이지 않는다고? 아니. 아니겠지. 이 정도면, 죽이지 않는 게 아니라 죽일 수 없다는 게 맞잖아!
하얀 늑대의 서슬 같은 눈동자는 릴리에게로 향해 있었고 입에 거품을 물고 달려들던 늑대 무리들은 돌연 얌전해져 어둠 속으로 몸을 감추었다.
이러다… 이스바 부인이…. 매짐이 칼을 손에 쥐고 릴리의 앞에 서려 하자 릴리가 그를 가로막으며 말했다.
“안 돼요.”
“…부인….”
“그대로 있어요.”
어쩌려고? 까딱하면 놈의 발톱이 그녀의 가슴팍에 꽂히게 생겼는데? 그도 아니면 저 크고 날카로운 송곳니가 그녀의 갈비뼈를 모두 으깨 놓고 말겠지. 생각만 해도 오금이 저려 저도 모르게 덜덜 어깨가 떨리는데 릴리는 흐트러지는 것 하나 없이 꼿꼿하게 서 있었다. 그대로 얼어 버린 걸까 의심이 될 정도였다. 그렇다고 하기엔 지나치게 침착한 목소리를 내고 있었지만 말이다.
릴리는 자신과 닮은 늑대의 회색 눈동자를 똑바로 주시했다. 이 짐승이 정말로 아마네스의 사자일까. 그렇다면 나는 그를 통해 신과 대화를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묻고 싶다. 정말로 당신은 존재하느냐고. 진심으로 당신이 우리 모두의 어머니이냐고.
그르릉…. 놈의 콧잔등은 성이 난 듯 일그러지며 선홍빛 잇몸이 드러났다. 혹자에겐 위협으로 비칠 것이다. 누군가는 그 순간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졸도를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릴리는 제 앞에서 날카로운 이를 드러낸 그 짐승이 무섭지 않았다. 위협으로 여겨지지도 않았다. 그저 그를 마주하고 있자니 너무나 고요했다. 이상하리만치 모든 것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모든 생각과, 고민과, 감정이 한순간에 사라진 듯 전부 비워졌다. 마치 영혼이 육체가 아닌 그 너머의 더 깊은 어딘가에 닿아 있는 것처럼.
그러나 그것을 보는 카르낙은 어금니가 딱딱 부딪혔다. 자신의 죽음 앞에서도 두려워한 적이 없었건만, 제 아내를 향해 이를 드러내는 저 거대한 짐승을 보고 있자니 두려움으로 온몸이 떨렸다. 겁이 났다. 너무 겁이 나서 그대로 정신을 놓아 버릴 것만 같았다.
왜 하필, 왜 하필 릴리에게.
“릴리!”
카르낙이 소리쳤다. 소리를 내면 놈의 관심을 끌 수 있을까, 그러나 릴리는 답하지 않았다. 들리지도 않는 것 같았다. 늑대를 보며 그대로 굳어 아예 넋이 나가 버린 것 같았다. 그에게 그것은 공포로 보였다. 공포에 압도되어 정신을 놓은 사람처럼 보였다. 왜냐하면 그녀의 뒤에서 매짐도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 손에는 칼을 쥔 채 그 역시 놈의 거대한 위용에 압도되어 완전히 넋이 나가 버렸다.
이대로라면 릴리는… 놈을 유인해야 한다. 릴리에게서 떨어뜨려 놔야 해. 놈의 시선을 끌어야 해. 그녀에게서 멀어지도록.
놈이 릴리를 주시하며 머리를 낮췄다. 사납게 드러낸 송곳니, 날카로운 눈빛, 그리고 금방이라도 도약할 듯 한껏 낮아진 앞발. 더 생각할 것도 없었다. 그럴 여유조차 없었다. 카르낙은 두 손으로 검을 단단히 쥐고 놈을 향해 뛰었다.
어금니를 물고 한껏 소리를 질렀다. 릴리를 주시하던 놈이 살기를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저를 향해 뛰어오는 검은 인영. 늑대는 그대로 도약했다. 금방이라도 사지를 씹어 먹을 듯 아가리를 크게 벌린 채였다.
“안 돼!”
릴리가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이미 늑대는 카르낙에게 달려든 뒤였고 카르낙은 놈에게 검을 겨눈 뒤였다. 카르낙은 그의 턱밑을 노렸다. 이 괴수를 한 번에 죽이려면 그 방법뿐이었다. 그러나 칼날은 헛나가 놈의 옆구리를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날에 묵직한 것이 스치는 느낌이 들었다. 분명 놈의 피부를 베어 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다였다. 치명적인 상처 따윈 되지 못했다. 오히려 녀석의 살기만 가중시켰을 뿐이다. 단번에 절명시키지 못했으니 남은 것은 제가 죽는 것뿐이었다. 카르낙은 마지막으로 릴리를 쳐다보았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비명을 지르는 제 아내의 얼굴을. 그리고는 눈을 감았다. 이제 끝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견갑을 착용하지 않은 왼쪽 어깨에 놈의 송곳니가 박혔다. 살갗을 뚫고 으드득, 소리를 내며 마침내 그의 뼈를 뚫는 소리가 생생했다. 릴리는 횃불을 놓쳤다. 저도 모르게 그것을 놓아 버리고 말았다.
“칼!”
그러고는 카르낙을 향해 뛰었다. 그는 늑대에 깔려 바닥에 뻗어 버린 지 오래였다. 놈이 그의 어깨를 물고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예 살가죽을 찢어 팔을 떼어 버릴 작정이었다. 릴리는 늑대에게 달려들어 겁도 없이 놈의 굵은 목을 끌어안았다. 매짐이 기함했다.
“부인!”
그가 칼을 들고 몸을 일으키자 다시 그의 곁으로 늑대 몇이 몰려들었다. 마치 짜기라도 한 듯, 그에게 다가가면 죽여 버리겠다는 듯. 빌어먹을, 빌어먹을! 매짐은 주춤거리며 바짝 마른 입술을 연신 핥아 댔다. 다가가야 했다. 이스바 경을 구하고 그의 아내도 구해야 했다. 매짐은 발치에 구르는 횃불을 주워 들었다.
“저, 저리 가! 저리 가!”
그러고는 늑대들을 향해 휘두르며 조금씩 전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