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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발 아래 은빛 눈-162화 (162/231)

162화

“그리고 자꾸 네 말을 이기려고 하지 마, 매짐. 그러면 네 엉덩이만 아프니까.”

그는 카르낙의 우아한 몸놀림을 보았다. 그의 엉덩이는 오코의 등에 풀칠이라도 해 놓은 듯 딱 붙어 떨어지지 않았고 오코의 걸음걸이를 따라 어깨와 허리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리듬을 탔다.

쳇, 어떻게 자신과 그가 같겠는가. 자신은 지금껏 제대로 된 말이라고는 구경도 못 해 본 대장간 집 아들이고 이스바 경은 어릴 때부터 말과 칼에는 능숙한 기사가…. 아니, 잠깐만. 그러고 보니 이스바 경은 투로가 아니던가. 대장간의 자식보다 더 천대받는.

“이스바 경은 승마를 언제 배우셨습니까?”

“그런 건 멍청이들이나 하는 짓이야. 따로 배울 필요가 없었어.”

“새겨들을 필요 없어요, 매짐.”

타고나길 축복받은 신체 조건을 타고난 자가 저 같은 미미한 생물의 모자람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냐마는, 그 말투가 너무도 재수가 없어서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는데 때마침 릴리가 나서 주었다.

“많은 사람들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말 타는 법을 배워요. 당신도 익숙해지는 데 시간이 걸릴 거예요. 그러니 너무 조급해할 필요 없어요.”

“그런데 당신도 말 타는 법을 배우지 않았잖아.”

카르낙이 제 아내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릴리는 턱을 들어 제 남편과 눈을 맞췄다.

“그래서 전 매번 당신과 함께 말을 타잖아요.”

“혼자 오코를 타 본 적 있잖아.”

“그건 탄 게 아니라 짐짝처럼 얹힌 거예요. 칼. 떨어질까 봐 겁이나 오코의 갈퀴를 다 쥐어뜯을 뻔했고요.”

아하. 이스바 경의 이름은 ‘칼’이로군. 칼 이스바.

“어쨌든, 전속력으로 질주하는 말에서 떨어지지 않은 것만으로도 용한 거야, 릴리.”

릴리? 릴리라고? 매짐은 마을에 머무는 내내 모친이 그녀를 무어라 불렀는지 똑똑히 기억한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미간을 찌푸렸다.

“이스바 부인의 성함은 ‘판’이 아니었나요?”

“맞아.”

맞다고?

“…릴리라고…”

“제 이름은 파니릴리예요. 판은 처녀 적부터 불린 애칭이고요,”

“아.”

그렇다면 이스바 부인의 이름은 파니릴리 이스바로군. 좋아. 이로써 한층 더 자신이 모셔야 할 주인 내외와 가까워졌다. 매짐은 뿌듯함을 느꼈다.

서툰 솜씨로 조랑말을 몰고 가고 있자니 어째 해가 지는 시간이 평소보다 느린 것 같았다. 카르낙의 말대로 조금만 더 앉아 있다간 엉덩이에 뿔이라도 날 기세였으므로 매짐은 해가 지고 있다는 핑계로 적당한 자리에 잠자리를 펴고 튼튼한 나무 기둥에 자신의 조랑말과 카르낙의 흑마 오코를 묶었다. 그러고는 능숙하게 근처의 다람쥐 몇 마리와 토끼 한 마리를 잡아 털을 벗겨내 불에 구웠다. 어머니가 챙겨 주신 향신료와 말린 고기를 내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릴리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차려진 모양새가 포드 부인이 내놓는 소박하고 맛 좋은 저녁 식사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진수성찬이네요, 매짐.”

“어머니가 이것저것 많이 챙겨 주셨어요. 그래도 리오에 도착할 때까지 먹으려면 아껴야 해요.”

그의 말에 릴리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빽빽하게 나무가 우거졌던 숲은 이제 거의 끝나 가고 있었다. 슬슬 발밑에 마른 들풀이 밟혔고 이곳마저 벗어나면 익숙한 바위 사막이 보이리라. 멀루아로 향하며 내내 보아 왔던.

비가 조금 더 자주 오면 좋으련만, 그것이 아니라면 해가 조금만 덜 뜨거워도 좋으련만. 흙이 지금보다 아주 조금이라도 덜 메마르면 그 물기를 찾아 분명 풀들이 돋아날 테고, 꽃씨들이 자리를 잡을 테고, 그럼 다시 어린나무들이 뿌리를 내릴 수 있을 텐데.

그렇게 숲이 많아지면 지난번과 같은 모래 폭풍이 덮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식물들의 뿌리는 그물처럼 촘촘하게 대지를 감싸 더 비옥하게 만들어 줄 테니 말이다.

카르낙은 모포를 깔아 잠자리를 마련하고 남은 것을 가져와 아내의 어깨에 둘러 주었다.

“밤이 될수록 날씨가 더 추워질 거야.”

“고마워요.”

그가 아내의 옆에 앉자 매짐이 카르낙에게 실한 고기 한 점을 건넸다.

“토끼 허벅지입니다. 이스바 경. 두 개 중 하나는 부인께 드렸고요.”

공손하게 말하며 매짐은 헤헤 웃었다. 그 모습이 카르낙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는 모양새가 딱 종자처럼 보인 까닭이었다.

“됐어. 그건 너나 먹고 난 육포나 다오.”

“모친께서 주신 향신료를 써서 제법 맛있게 잘 구워졌어요. 한 번 드셔 보시죠. 어머니만 못하지만 저도 제법 손재주는 있습니다.”

“…먹어요. 칼.”

“…….”

카르낙은 곁눈질하여 제 아내를 보았다. 웃으며 부드럽게 말하고는 있지만 협박에 가까운 명령이었으므로 그는 더 거절 않고 고기를 건네받았다.

한기를 가시기 위해 매짐과 릴리는 에일 몇 모금을 나누어 마시고 곧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해가 뜨자마자 다시 길을 떠나려면 무엇보다 푹 자 두는 것이 중요했다. 그렇지 않으면 릴리는 몸에 무리가 갈 테고 매짐은 정말로 엉덩이에 뿔이 날 터였다.

카르낙은 아내와 매짐이 잠들 때까지 모닥불 앞에 앉아 거친 가죽으로 칼날을 갈고 닦았다. 그리고 손질을 모두 마쳤을 때쯤 매짐은 코를 골기 시작했다. 카르낙은 마른 풀잎들을 베개 삼아 무방비하게 잠든 그를 보며 저 혼자 헛웃음을 켰다. 무슨 네 살배기 어린애를 둔 것도 아니고. 생각해 보니 제 곁에는 지금껏 저렇게 철딱서니 없는 놈이 없었다. 전부 강인하고 현명해 제 앞가림은 잘하던 놈들이었다.

하긴. 그래도 제 맡은 일은 잘 해냈지. 무장을 한 병사를 저 혼자 죽이기도 했고. 물론 꽤나 애를 먹었겠지만 그놈 손에 죽지 않은 것이 어디인가. 첫 결투치고 그 정도면 나쁘지 않은 성적이었다.

카르낙은 손질한 검을 검집에 넣고 곤히 자고 있는 릴리의 상태를 살폈다. 온몸을 바짝 웅크린 모습이 모닥불을 피웠어도 추위를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모포를 그녀의 뺨까지 끌어올렸다. 그러자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는지 릴리가 기척을 느끼고 눈을 떴다. 카르낙은 얼음이라도 된 듯 멈추어 있다가 눈이 마주치니 씁쓸하게 숨을 뱉어 냈다. 깨우려던 것이 아니었는데.

“추워 보여서.”

“왜 아직 안 자고 있어요?”

릴리가 눈을 비비며 물었다. 이런 곳에서는 모두가 잠들어선 안 된다. 우거진 숲에서는 사나운 들짐승이 있고, 사막에는 독을 품은 파충류나 곤충이 있다. 그리고 지붕이 있고 푹신한 잠자리가 있는 곳에는 언제 제 목에 칼을 겨눌지 모르는 인간이란 짐승이 있었다.

카르낙이 푹 잠들 수 있는 곳은 캘던성에 있는 자신의 침실 정도였다. 그곳에서조차 그는 늘 검을 손에 닿는 자리에 두었다. 평생 누군가를 증오하며 살았고 그만큼 적이 많다. 언제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죽임을 당할지 모르는 삶에 온전한 휴식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포드 가족의 대장간에서도 단 한 번도 제대로 땅에 등을 대고 잠을 잔 적이 없다.

“그저… 잠이 오지 않아서.”

그러나 카르낙은 릴리에게 그렇게만 답했다. 그 모든 이유를 설명하면 분명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자신이 대신 망을 보겠노라 고집을 부릴 것이 뻔한 탓이었다.

뭔가 위험한 일이 있으면 당신을 흔들어 깨우겠노라 맹세를 하고 그 연약한 몸으로 열심히 주변을 감시하겠지. 그 장면을 상상하니 웃음이 났다. 영문도 모른 채 릴리는 그를 따라 미소 지었다. 그러더니 열심히 코를 고는 매짐에게 슬쩍 시선을 주었다. 무방비한 그의 모습을 보며 그녀 역시 카르낙과 같은 생각을 했다. 웃음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집보다 더 편한 모양이야.”

남편의 말에 릴리는 다시 웃었다.

“당신과 함께 있으니 마음이 놓이나 봐요.”

“나와 함께 있으며 안심하는 사람은 좀처럼 없는데 말이야.”

“정말 매짐이 좋은 기사가 될 수 있을까요?”

카르낙은 글쎄, 하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좋은 전사는 모르겠지만 기사는 가능할 거야. 화려한 갑옷을 입고 젠체하기만 하면 되니까.”

“…폐하의 주변에서 그런 사내는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요.”

“맞아. 모두 뒈졌으니까. 하지만, 어디든 예외란 있기 마련이지.”

키득키득, 릴리는 소리 내어 웃었다. 카르낙은 정말 오랜만에 아내가 아무 근심 없이 웃는 얼굴을 보았다.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그냥 이대로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리고, 신의고, 약속이고, 왕권이고 그런 것은 모르겠으니 그냥 릴리의 행복해하는 얼굴만 보다가 죽었으면. 아마 핀이 들으면 미쳤다고 하겠지. 사랑에 빠지면 이렇게 머저리가 되는 것을 진작부터 알아서 그토록 파니릴리를 고까워했던가. 하여간 눈치도 빠른 놈이다.

그르릉.

아내의 미소에 정신을 쏙 놓고 있는데 어둠 속에서 낮은 소리가 예민한 고막을 울렸다. 머저리처럼 넋을 놓고 있던 카르낙의 표정이 순식간에 변했다. 그는 눈을 들어 먼 어둠을 주시했다. 부스럭부스럭, 바람에 마른 잎이 나르는 소리가 아닌 규칙적으로 마찰하여 밟히는 소리가 났다. 곧 어둠 속에 귀신불처럼 밝은 안광이 나타났다. 하나, 둘, 셋, 넷. 셀 수도 없이 많은 눈동자들이 그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늑대. 늑대 무리였다.

카르낙은 조용히 검집에 손을 얹었다. 자칫하다 놈들을 자극해 공격의 빌미를 줄 순 없었다. 날카롭게 변한 남편의 낯빛에 이상함을 느낀 릴리가 뒤를 돌아보려 하자 카르낙이 그녀의 손을 붙잡아 말렸다.

“움직이지 마.”

“왜…”

그러다가 곧 그녀 역시 발견했다. 사나운 이를 드러낸 들짐승의 실루엣을.

“매짐.”

카르낙이 조용히 그를 불렀다. 드르렁….

“매짐.”

드르렁…

“매짐!”

‘히익’ 하고 숨을 들이켜며 매짐이 번쩍 눈을 떴다. 그가 몸을 벌떡 일으키자 늑대가 으르릉… 하며 다시 울음소리를 냈다. 영문을 모른 채 두리번거리던 매짐도 그 소리를 듣고 얼어붙은 듯 숨을 멈췄다. 사태가 파악되자 순식간에 잠이 달아났다.

“검을 챙겨.”

카르낙이 침착하게 명령했다. 매짐은 꿀떡 침을 삼키며 더듬더듬 검집을 찾아 쥐었다. 대체, 대체 이게 몇 마리인가. 하나… 둘… 다섯…. 여섯… 일… 일곱! 분명 일곱 마리다. 카르낙은 모포의 끝자락을 찢어 모닥불을 때기 위해 가져다 놓은 굵은 나뭇가지에 둘둘 말아 그 끝에 불을 붙였다. 그러고는 아내의 손에 들려 주었다.

“자, 릴리.”

“칼.”

“들고 있어. 놈들은 불을 무서워하니 다가오면 휘둘러.”

“…칼…”

“절대로 불 근처에서 벗어나지 마. 알겠어?”

“…하지만….”

“매짐.”

“네… 네!”

“무조건 휘둘러.”

헉헉대느라 매짐은 대답을 못 했다. 입안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그는 발작적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턱을 노려. 그럼 쉽게 처치할 수 있을 거야,”

“…네… 네…!”

매짐은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귀로 들었음에도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그는 몇 번이고 반복적으로 그 말을 중얼거렸다. 마치 주문이라도 외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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