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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발 아래 은빛 눈-164화 (164/231)

164화

“놓아줘!”

릴리가 놈의 목을 끌어안고 소리쳤다. 카르낙은 그녀의 행동에 기함했다.

“릴리!”

그러다가 놈에게 받혀 내던져지기라도 하면 분명 갈비뼈가 으스러지리라.

“물러서, 릴리!”

카르낙이 고통으로 어금니를 씹으며 고통스레 외쳤지만 그녀는 듣지 않았다.

“그만! 그만!”

릴리는 몸을 빙 돌려 놈이 주둥이와 콧잔등을 손으로 감싸 안았다. 그르릉… 으르릉… 놈은 여전히 살의를 지닌 채 성마른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러나 정신없이 카르낙의 어깨를 베어 물고 흔들던 몸짓은 잦아들었다. 마치 릴리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이 말이다.

“…릴리…”

카르낙이 신음했다. 제발 날 내버려 두고 달아나. 놈의 다음 사냥감이 네가 되게 둘 순 없어. 그러니 제발… 멀리 달아나 릴리.

늑대가 후욱, 후욱, 뜨거운 숨소리를 내뿜었다. 늑대는 카르낙에게 적의를 품고 있었다. 이자가 먼저 살의를 드러냈어. 날 죽이려 했어. 내게 먼저 도전했어. 그러니 죽여야 해. 날 죽이려 했으니까 마땅히 죽어야 해. 회색빛 눈동자를 치뜬 채 놈이 주둥이를 씰룩거렸다.

“부탁이야. 그를 놓아줘.”

하는 것이라고는 짖고 우는 것뿐인 짐승에게 인간의 언어가 얼마나 통하겠는가. 절박함에서 비롯된 부질없는 행위였다. 그럼에도 릴리는 간절하게 부탁했다. 하는 모양새만을 보자면 꼭 이 금수와 대화라도 하는 것 같았다. 빌어먹을. 수많은 전장에서 승리했다. 뛰어나다던 전사들, 맹주들과의 싸움에서도 살아남았다.

그런데 한낮 늑대 따위에 지다니. 이래서야 정말이지 꼴이 우습다. 언젠가 핀이 파니릴리가 너를 나약하게 만들 것이라 했지. 그의 말이 맞았다. 그러나 이 상황이 무한히 반복된다 하여도 카르낙은 무한히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후회하지 않을 길은 오로지 그것 하나뿐이었으므로, 그러니 물러나. 릴리. 놈이 내 사지를 갈기갈기 찢어 버리도록 내버려 둬.

그러나 제 어깨에 송곳니를 박고 짓누르던 압력이 서서히 옅어져 갔다. 날카로운 덫처럼 발버둥 칠수록 조여 오던 것이 아주 서서히 그 칼날을 빼어 냈다. 카르낙은 고통과 열로 흐릿해진 눈을 깜빡이며 그 적나라한 감각에 신음을 흘렸다. 릴리….

놈은 여전히 화가 난 것 같았다. 숨소리는 여전히 거칠었고 눈빛은 여전히 날카로웠고 카르낙의 피가 묻어 있는 이빨을 드러낸 채였다. 그러나 놈은 뒤로 물러섰다. 짐승이, 살의를 가진 짐승이, 제가 물어 죽일 수 있는 상대에게서 물러나고 있는 것이다.

매짐은 자신이 보고 있는 광경을 믿기 힘들었다. 인육을 취하는 금수에게서는 도저히 나타날 수 없는 행동이었다.

“…대체….”

그는 뒷말을 이을 수조차 없었다. 놈과 릴리 사이에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기류가 흘렀다. 그 둘 사이에서만 무언가가 일그러지고 비틀리고 뒤섞였다.

알아. 알아. 하며 릴리는 늑대를 향해 고개를 몇 번이고 주억거렸다. 그녀에게는 놈의 분한 마음이 읽혔다. 살의와 그것에 대한 좌절감에 심사가 뒤틀려 있었다. 물러서고 싶지 않았음에도 물러서야 한다는 것에 놈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분해했다.

네가 내 자존심을 건드렸어. 늑대는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낮게 울었다.

알아. 알아. 나도 알아. 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내 욕망을 꺾었어.

맞아. 내가 그랬어.

넌 내 사냥을 방해한 거야.

맞아. 내가 네 사냥을 방해했어. 네 명예를 더럽혔어. 하지만 난 너의 용맹함을 존경해. 넌 강하고 경이로운 생명체야. 내가 본 중 가장 눈부셔.

…좋아. 부디 날 후회하게 하지 마.

늑대는 몇 초간 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느릿느릿 뒤로 몇 걸음 더 물러서더니 휙 고개를 돌리고 사라졌다.

“…….”

매짐은 얼이 빠져 수풀 사이로 사라지는 놈의 엉덩이를 바라보았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칼.”

릴리가 제 남편의 이름을 부르며 그의 얼굴을 매만졌다. 붉게 달아오른 눈가와 달리 입술과 면부는 하얗게 질려 있었다. 고통에 못 이겨 그의 이마와 콧잔등에는 송골송골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뼈가 드러날 정도로 끔찍하게 찢기고 훼손된 피부 아래에서 울컥, 울컥, 핏물이 흘러나왔다.

“매짐!”

릴리가 저를 찾았다. 매짐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퍼뜩 그녀의 곁으로 뛰어가 카르낙을 살폈다. 왼쪽 어깨가 너덜거렸다. 끔찍했다. 울컥 눈물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그는 참아 내기 위해 어금니를 꽉 물었다. 젠장할. 리오 근처에는 가 보지도 못했는데. 길을 떠나온 지 만 하루도 지나지 않아 이런 일을 당하다니. 이곳이 늑대의 영역일 줄은 몰랐다. 놈들이 나타나는 지역이란 사실을 알았더라면. 절대. 절대 이스바 경을 이곳으로 안내하지 않았을 텐데.

“이 근처에, 근처에 들를 만한 마을이 있나요?”

릴리의 물음에 매짐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없어요. 리오에 도착하기 전까지 그 어떤 마을도 없어요.”

“…….”

“다시 돌아가야 할까요?”

매짐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다시. 다시 돌아가면 어머니께서… 어머니께서 치료해 주실 수 있을 거예요.”

그래. 어머니가 이스바 경의 어깨를 치료해 줄 것이다. 어머니는 늘 산모들의 출혈을 멎게 해 주셨으니까. 그러니까 이스바 경의 너덜거리는 살과 뼈를 이어 붙여 줄 것이다. 릴리가 제 블리오 자락을 찢어 내기 시작했다. 일단 카르낙의 상처에 응급처치부터 해야 했다.

“단단한… 단단한 나뭇가지가 필요해요. 길고 굵고 튼튼한 것으로요.”

“네. 부인. 제가. 제가 구해 올게요.”

매짐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말. 내 말이 어디 갔지?

“황순아!”

매짐이 목청 높여 조랑말을 찾았다. 분명 나무 기둥에 매어 두었는데. 그러고 보니 놈을 살피지 못했다. 설마 늑대가 물어 간 것일까? 놈의 등에 어머니께서 싸 준 온갖 음식과 도끼를 포함해 여행에 필요한 각종 연장들이 들어 있는데.

그는 횃불로 오코와 황순이가 매어져 있던 나무 기둥 근처를 밝혔다. 끊어진 줄이 보였으나 바닥에 핏자국이 떨어져 있진 않았다. 두 말이 동반 도주라도 한 모양이다. 빌어먹을. 제 주인들이 당하고 있는데 달아나다니.

의리도 없는 것들이! 하는 수 없었다. 튼튼한 나뭇가지는 맨손이나 아직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칼을 휘둘러 잘라 와야 했다. 서둘러. 매짐. 네 주인의 목숨이 달린 일이야.

그는 한 손에는 칼을, 한 손에는 횃불을 단단히 쥐고 풀숲으로 뛰어들었다. 평소에는 자비롭고 고요하다 생각했던 새까만 밤이 처음으로 너무나 끔찍하게 느껴졌다. 어둠 속에 모든것을 감춘, 낮과는 전혀 다른 미지의 세계. 신에 대한 경외만큼 매짐은 두려움을 느꼈다. 그렇기에 밤은 아마네스 여신과 닮아 있다 했던가.

릴리는 재차 제 남편의 안색을 살폈다. 그의 눈꺼풀은 까무룩 감기다가,

“칼! 정신을 놓으면 안 돼요!”

하는 아내의 음성을 듣고 파르르르 떨리며 들리곤 했다. 릴리는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지 못했다. 그녀는 서럽게 울면서도 이를 질끈 물고 바삐 손을 놀렸다. 넋을 놓고 울고 있을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그것은 사치다. 어떻게든, 어떻게든 카르낙을 살려야만 했다. 절대 죽게 내 버려둘 순 없어. 절대 그렇게는 못 해. 절대로 그렇게 두지 않겠어.

나 때문이야. 나 때문이다. 나 때문에 그는 이성을 잃었다. 평소의 그답지 않게 아무 준비도 없이 금수를 도발했다. 그런 사내가 아닌데, 그렇게 무방비한 전사가 아닌데. 저 혼자의 힘으로 너덧 명의 장수를 베어 내는 사람인데.

말한 적이 없던가요, 칼. 내가 한 번도 말하지 않았던가요. 동물들은 날 해코지하지 않아요. 그라타에 살며 맹수들을 만나 본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아주 작은 생명들조치 나를 물거나 해치거나 할퀸 적이 없어요. 그 이야기를 당신에게 해 준 적이 없던가요.

동물들은 릴리를 좋아했다. 언어가 통하는 것도 그들의 감정을 읽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자신에 대한 그들의 호의는 읽을 수 있었다. 릴리도 그들을 좋아했고 그들도 릴리를 좋아했다. 작은 다람쥐, 귀를 쫑긋거리며 산을 오르내리는 토끼, 사슴, 그 밖의 나비나 작은 종달새들도.

앨버그에 와서 늑대라는 것을 처음 보았다. 처음으로 맹수를 보았고, 사납게 이를 드러내며 우는 것을 보았고 처음으로, 처음으로 동물에게 살의를 느꼈다.

그리고 또 처음으로, 정말 처음으로 영혼이 맞닿는 것을 느꼈다. 감각이 읽히고 형용할 수 없는 그의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그것이 느껴지고 또 제 것을 그가 느낀다는 것 또한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늑대에게서 처음으로 신의 섭리를 느꼈다. 처음으로 아마네스의 존재를 느꼈다. 그렇지 않고는 그 같은 강렬한 일체감은 설명할 수 없었다.

그것을 카르낙에게 말해 주었다면, 그가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그랬다면 이같이 무모한 행동은 하지 않았으리라. 그러니 모두 자신의 잘못 같았다. 자신의 잘못으로 자신의 남편이, 한 나라의 왕이 이렇게 아무것도 없는 흙바닥에 누워 생명을 위태롭게 만든 것이다.

곧 매짐이 굵은 나뭇가지를 몇 개 가지고 나타났다. 릴리는 그에게 잔가지를 치고 매끄럽게 다듬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고는 그것에 블리오 자락을 둘러 단단한 부목을 만들어 카르낙의 어깨에 덧대었다. 그것으로 고통은 조금 덜어질 것이다.

“빌어먹을 말들이 모두 도망갔어요.”

매짐은 제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 내며 암담하게 말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무슨 일이 나면 가장 먼저 도망가는 것이 말과 가축들이었다. 훈련받은 군마조차 전장에 나가면 제 주인이 등 위에 타 말고삐를 잡고 있지 않은 이상 살기 위해 달아났다. 누구도 그것을 탓하지 않았다. 다만 살아남으면 다시 만나길 고대할 뿐이다.

“살아 있다면 곧 주인을 찾아 돌아올 거예요.”

“하지만 말들이 없다면 이스바 경을 모시고 다시 마을로 돌아갈 수 없잖아요.”

저 거구의 사내를 매짐이 업고 가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그 속도로는 마을에 도착하기도 전에 객사할 확률이 높다. 먼저 말부터 찾으러 돌아다녀야 할까? 아니면 여기에 이스바 내외를 남겨 두고 재빨리 마을로 가 치료에 필요한 약이라도 가지고 와야 할까?

하나뿐인 조랑말을 타고 왔으니 그곳에서 다시 말을 구해 오긴 어려웠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이대로 꼼짝없이 제 주인을 잃어야 할까?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이렇게 강한 사내가 이렇게 허무하게 유명을 달리할 리가 없다. 이렇게 죽을 리는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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