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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발 아래 은빛 눈-161화 (161/231)

161화

“새로운 곳으로 가 새 삶을 시작하기에 우린 너무 늙었다오. 이스바 경.”

내내 침묵을 지키던 길란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무던하고 차분한 얼굴엔 두려움도, 분노도, 걱정이나 슬픔도 없었다.

“대신 내 아들을 데려가 주게.”

길란은 매짐을 보며 말을 이었다. 아마도 아주 오랫동안 생각해 왔던 이야기였으리라.

“비록 배움은 없으나 똑똑하고 용감한 놈이오. 내게는 분에 넘치는 자식이자, 이런 촌구석에 처박혀 여생을 보내기엔 너무 아까운 청년이라오. 평생의 소원이 기사가 되는 것이었으니, 그를 종자로 삼아 검을 가르쳐 주면 감사하겠소.”

차분한 길란과는 달리 매짐은 몹시도 격앙된 듯 보였다. 그는 가쁜 호흡으로 가슴을 들썩이며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 얼굴을 붉혔다. 카르낙은 매짐이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슬픈 것인가, 아니면 기쁜 것일까. 부모의 존재조차 알 수 없는 카르낙으로서는 가늠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두 분은요?”

카르낙의 물음에 길란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여전히 아내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마치 서로 한 몸으로 연결되어 달리 뜻을 물어볼 필요도 없는 듯이 보였다. 그것을 증명하듯 길란 대신 자미에 포드가 답했다.

“우린 남아야지요, 이스바. 평생의 삶이 여기에 있는걸요. 걱정 말아요. 당장은 수타르가 길길이 날뛰더라도 악랄할 만큼 끈기가 있는 사내도 아니에요. 게다가 똑똑하지도 않고요. 곧 제풀에 지쳐 그만두고 말 거예요. 마을 사람들도 그의 성격을 아니 적당히 장단을 맞춰 주다 슬그머니 발을 뺄 테고요. 내 장담하죠.”

자미에 포드가 미소까지 지어 보이며 이야기했지만 카르낙은 여전히 확신이 없었다. 아둔한 것과 악랄한 것은 달랐다. 좋은 일은 눈 깜짝할 새 끝이 보이지만 악한 일은 얼마나 지독하고 끈질기게 달라붙던가. 그는 저도 모르게 릴리를 바라보았다. 확신이 서지 않은 채 그는 눈으로 자신의 아내를 찾은 것이다.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카르낙은 그것만으로도 그녀의 뜻을 알아차렸다. 상황과 타협을 해야 할 때였다.

“매짐.”

카르낙이 부르자 매짐은 곧바로 답했다. 격앙된 목소리였다.

“네, 네! 이스바 경!”

“난 종자를 거느리지 않아.”

“…….”

“그러나 네가 내 사람이 된다면 기꺼이 네게 필요한 모든 것을 가르쳐 주마.”

카르낙 발투만에게 윗사람과 아랫사람 따위는 없다. 다만 모두에게 지워 준 역할이 있고, 그에 충실한 것을 좋아할 뿐이다. 핀도, 에이가도, 로로도, 그 외에 그의 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랬다. 그들은 자신이 가진 짐을 나누어 짊어져 주는 고마운 은인이자 또한 친우였다. 망나니 같은 자신의 성품도 기꺼이 품어 주고 인정해 주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를 배신하지 않을 진정한 의미의 친우 말이다.

그러니 매짐에게 기대하는 것도 별반 다르지 않다. 그의 편에 서서 맡은 임무를 다하며, 어떠한 순간에도 그를 배신하지 않는 것. 그것만 충실히 따라 준다면 카르낙은 그를 믿고 존중하며, 그가 원하는 것은 기꺼이 내어 줄 생각이었다.

매짐은 기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 물론입니다. 이스바 경! 목숨을 걸고 경을 따르겠습니다!”

“목숨을 걸고 따를 필요는 없어. 어차피 네가 나를 배신하는 순간 없는 목숨이 될 테니까.”

“…그 …그럼 죽음을 각오하고 따르겠습니다!”

대답에 망설임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가족을 떠나면서까지 검을 잡고 싶을까. 카르낙은 살기 위해서라면 다른 방법이 없어서 검을 들었다. 만일 자신에게 지켜야 할 가족이 있었다면, 검을 들지 않고도 그것을 지킬 수 있었다면 분명 카르낙은 다른 방법을 택했을 터였다.

자신이 나타나면서 망가져 버린 포드가의 일상. 모두가 꺼리는 고된 일일지라도 자신의 업이 있고, 아름답고 씩씩한 아내가 있고, 둘을 꼭 닮은 자식들이 태어나 꿈이란 것을 품고 살아갈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자신에게도 길란 포드와 같은 기회가 있었다면 그는 기꺼이 감사한 마음으로 그 작고 소중한 행복을 움켜쥐었을 것이다.

길란은 어떤 꿈을 꾸며 지금껏 살아왔을까. 함께 지내며 한 번도 그것을 물은 적이 없다. 그러나 분명 자신과 다르지 않을 거라 카르낙은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인생의 황혼기에 들어선 이후에도 그 꿈을 이루며 살았다. 소박하고 행복하고 더할 나위 없이 충만한 나날들.

그런 그의 나날들에 저라는 불청객이 나타나, 그의 아들을 데리고 영영 사라져도 되는 것일까. 그가 사라진 후 포드 부부의 평화로운 일상에 금이 가면 어쩌나 카르낙은 그의 남은 생이 걱정되었다. 마치 그에게서 자신의 미래라도 보는 듯 말이다. 카르낙은 제 허리춤에서 단도를 꺼내 자미에 포드에게 건넸다.

“이게 뭔가요?”

여성인 자미에의 손에는 너무 커 단검이라 보긴 힘들었다. 그러나 그와는 별개로 무겁고 단단하며, 칼집과 손잡이의 세공은 견고하고 섬세하여 평범한 이들은 구경도 하지 못할 물건으로 보였다. 자미에의 물음은 그 전제에 기초해 있었다. 이렇게 값비싸고 귀한 듯한 물건을 왜 저에게 주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어서.

“위험한 순간이 오면 사용해요. 혹은 당장 돈이 급할 때 써도 되고. 그도 아니면….”

“아니면?”

“도움이 필요할 때 이것을 들고 캘던으로 찾아와요.”

“…….”

“만일 내가 그곳에 없을지라도 누군가 당신을 도와줄 거예요.”

“…….”

카르낙의 말을 듣고 자미에는 제 손에 들린 단검을 한 번 더 내려다보았다. 이것을 들고 캘던으로? 캘던이라면 앨버그의 수도가 아니던가. 아무리 촌구석에 사는 무지렁이일지라도 그 정도는 안다.

투로가 왕이 된 후로 수많은 투로들이 자신의 신분에서 해방되어 자유롭게 살아간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타고나길 건장하고 강인하게 태어났으니 무장이 되기엔 안성맞춤일 터.

하지만 어째서 캘던이지? 그는 멀루아에서 도망쳐 나온 사람이 아닌가? 투로 왕의 화염을 피해서 간신히 목숨을 건진 멀루아의 기사가 아니란 말인가? 캘던으로? 수도인 캘던으로 찾아오란 말이야? 불안한 예감으로 자미에의 가슴이 거세게 뛰었다.

“…혹시….”

입을 떼면서도 확신이 없어 뒷말을 얼버무렸다. 그럴 리가. 설마 그럴 리가.

“자미에. 이들이 떠날 채비를 꾸려 줘야지.”

길란이 자미에의 손에서 단검을 가져가며 주위를 환기시켰다. ‘아. 맞아. 내 정신 좀 봐.’ 하며 자미에는 치맛자락을 붙잡고 바삐 집으로 향했다, 세 사람이 여행길에서 먹고 마실 수 있는 식수와 식량을 준비하려면 아무리 서둘러도 시간이 모자랐다. 다른 생각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었다.

아내가 집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길란이 카르낙에게 물었다.

“이제 어디로 갈 생각이오?”

“리오로 향할 생각입니다.”

“리오라…. 매짐이 길을 잘 알 거요.”

“매짐은 리오에 가 본 적이 있습니까?”

길란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러나 언제나 가고 싶어 했지. 근처의 대도시는 모두 꿰고 있다오.”

그런 이유로 카르낙과 릴리가 멀루아에서 도망쳐 나왔다고 확신했었다. 언제나 대도시의 삶과 이야기를 동경하던 아들은 누구보다도 빠르게 대도시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입으로 물어 날랐다. 물론 그렇게 물어 와 풀어놓는 이야기들의 절반은 허풍이 섞였지만 말이다.

“리오로 가는 길은 꽤 멀어요. 멀루아를 중심으로 완전히 반대 방향이거든요.”

아버지의 말을 증명하려는 듯 매짐이 리오로 향하는 방향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확실히 그의 손이 쿡 찌른 곳은 카르낙이 도망쳐 나온 곳과 반대 방향이었다. 길란은 끌끌 혀를 찼다.

“긴 여행이 되겠구려.”

그는 자조적으로 웃는 카르낙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길란은 아내가 그에게 무엇을 물어보려 했는지 알고 있었다. 그의 검을 보았을 때 길란도 어렴풋이 그녀와 같은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서 멈추었다. 더 알아서는 안 될 것 같다는, 그런 기분이 든 까닭이었다.

사실 길란은 이 젊은 투로의 정체가 무엇이건 상관없었다. 그가 정말 이스바이건, 아니면 다른 누군가이건 제 눈앞의 청년은 언제나 진실했고 또 성실했다. 잔꾀를 부리는 법 없이 모든 일을 담담하게, 말없이 우직하게 해냈다. 오로지 그것만이 길란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이었고, 또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

매짐은 일전에 말을 몰아 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가 가진 돈을 모두 털어 사 준 마을의 단 하나뿐인 황색 말의 등에 앉긴 했지만 영 모든 것이 어색했다. 게다가 카르낙의 말에 비해 지나치게 다리가 짧고 모든 것이 어정쩡했다.

카르낙은 그것이 보통 어린아이들이 승마를 배울 때 타는 ‘조랑말’이라고 했다.그 말을 듣는 순간부터 이 암말에게 정이 가지 않았다.

게다가 카르낙의 암말이 한두 번의 내딛음으로 긴 거리를 이동할 동안, 그의 조랑말은 대여섯 번은 더 땅을 디뎌야 했다. 꼭 깡충거리는 토끼를 탄 기분이었다. 말의 등이 들썩일 때마다 매짐은 엉덩방아를 찧었고, 들썩거리며 흔들리는 그의 모양새를 보며 카르낙은 몇 번이고 웃음을 터트렸다.

“조만간 네 엉덩이에 뿔이라도 날 것 같다. 매짐.”

그는 오코 위에 앉아 느긋하게 매짐을 놀렸다. 말고삐를 잡은 그의 단단한 팔 안에는 릴리가 안겨 있었다. 이 얼마나 한 폭의 그림 같은 광경인가. 제가 꿈꾸던 것은 바로 저런 고상하고 우아한 그림인데….

카르낙을 보려면 고개를 한참 들어야 한다는 사실도 자존심이 상했다. 물론 감히 제 주인을 내려다보고 싶다는 건 아니지만. 매짐은 인상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이 말은 저랑 영 맞지 않는 것 같아요.”

아무렴 어련할까.

“조랑말은 단단한 근육질에 강한 지구력과 생존력을 갖고 있어. 때에 따라 역마로도 사용하고, 농마로도 사용하지. 정말 쓸모가 많은 동물이야.”

“하지만 못생겼고요.”

“초보인 너에겐 딱 맞는 말이야.”

“전 어린아이가 아니에요, 이스바 경. 이놈은 저에겐 너무 작고 촐싹 맞다고요.”

“좋든 싫든, 리오까지 널 데리고 가 줄 녀석이야. 게다가 네 부친께서 가진 돈을 모두 털어 사 준 말이 아닌가? 길란 포드를 생각하며 아껴 줘라.”

“…….”

젠장. 왜 하필 마을에 있는 말이라고는 이 녀석 하나뿐이었을까. 물론, 카르낙의 말처럼 농사일에 요긴하기 쓰긴 했지, 가끔 수레를 끌기도 하고, 쓸모가 많은 녀석이라는 것은 안다.

하지만 너무 볼품이 없지 않은가. 자신의 포부나 이상향과는 너무 거리가 먼 짐승이다. 게다가 이 조랑말은 이름까지도 이상했다. 황순이라니. 아무리 황갈색 암말이라지만 카르낙의 말은 이름도 멋진 오코인데, 자신의 첫 암말의 이름은 황순이다!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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