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무슨 일이에요?”
릴리가 남편의 뒤에서 포드 가족을 향해 물었다. 그러나 누구 하나 선뜻 입을 떼지 못했다. 대신 부끄러운 듯 얼굴만 붉혔다. 생각했던 것보다 분위기가 더 좋지 않아서 릴리는 근심스러운 얼굴로 카르낙을 쳐다보았다.
수타르가 카르낙의 위압에 짓눌려 바닥으로 쪼그라드는 것이 아닌가 걱정될 즈음 카르낙은 아내의 말에 반응하여 시선을 돌렸다. 그는 마을 사람들을 눈으로 훑다가 푸줏간 모녀를 발견하고는 차갑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목숨을 구해 주어 감사하단 인사를 하러 온 것치고는 냉랭하고, 죽은 남편의 장례를 치르러 온 거면 번지수를 잘못 찾았고, 포드 부인의 안부를 물으러 왔다면 끌고 온 행렬이 수상한데 말이야. 이 동네는 늘 이렇게 수상하고 미심쩍은 분위기인가?”
“저는….”
“당신네가 나타나서 우리 동네에 이 사달이 난 거야!”
푸줏간의 딸이 용기를 내어 첫마디를 떼었으나, 뒤이어 날아 들어온 고함에 묻혔다. 카르낙은 눈을 가늘게 뜨고 마을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옹기종기 모여 있으니 어느 놈의 뚫린 입에서 나온 소리인지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그것을 노리고 내뱉은 소리임이 확실했다. 수타르는 때를 놓치지 않고 끼어들어 삿대질을 해 댔다.
“맞아!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어! 저자가 갑옷을 입고 칼을 휘두르는 걸! 그 군인 놈들을 반 토막 내는 것을 내가 분명히 봤어! 저 사내가 그놈들을 끌고 온 게 분명해!”
기다렸다는 듯 여기저기서 그에 동조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래요! 저 남자를 내보내야 해요! 안 그러면 놈들이 또 무슨 해코지를 하려고 들지 몰라요!”
“맞아! 저 남자가 군인들을 죽였으니 죗값을 치르려거든 저 남자가 다 치러야 해! 우린 이 일에 아무 상관이 없어!”
“그냥 두었으면, 조용히 상처를 치료하고 가던 길을 갔을지도 모를 일이잖아요! 안 그래요?”
기가 막혀 말도 나오지 않았다. 곧 목 뒤를 잡고 쓰러질 것 같은 모친을 대신해 매짐이 나섰다.
“그들은 마을의 치료사와 푸줏간 주인을 죽였어요. 그냥 뒀으면 조용히 상처를 치료하고 돌아갔을지도 모른다는 말은 틀려도 한참 틀렸어요.”
이야기를 하고 나니 더 화가 났다. 거목처럼 서 있는 카르낙을 보니 더 그랬고,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저를 쳐다보는 릴리의 시선이 느껴지니 더더욱 그랬다. 이러한 상황과 이러한 자신의 처지가 부끄러워 죽을 지경이었다. 그는 말을 이었다.
“죽은 치료사에 대한 미안함은 없어요? 한순간 비명횡사한 푸줏간 아저씨에 대한 애통함은요? 고아가 된 그의 딸과 미망인에 대한 동정심도 들지 않아요? 놈들의 손에 잡혀 꼼짝없이 죽을 뻔한 내 어머니에 대한 미안함은요? 당신들은 그조차 갖고 있지 않나요?”
자미에 포드가 살린 여인이 몇인가, 그녀 덕분에 사지 멀쩡하고 건강하게 살아가는 이 마을의 아이들은? 장성한 사내 중 거의 대부분이 모친이 산모와 함께 몇 날 며칠을 꼬박 새워 받아 낸 아이들이었다.
“부끄러운 줄 아세요, 모두. 네 발로 다니는 짐승도 제 생명을 구해 주면 ‘은혜’라는 것은 알아요.”
“뭐… 뭐야! 그럼 우리가 짐승만도 못하단 거야!?”
듣고 있던 수타르가 뒤늦게 버럭 하고 나섰다. 한 박자 느린 반응이 그의 지능을 대변했다. 그리고 릴리는 이제야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분명하게 직시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떠나라는 말씀이로군요. 더 큰 일이 벌어지기 전에.”
릴리가 읊조리듯 중얼거렸다. 사람들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맞아. 그런 말이야, 아가씨. 아무리 보아도 당신네는 수상쩍다고.”
“우리에게 투로는 길란 하나만으로 족해. 우리 마을에 또 투로를 들일 순 없어. 게다가 저런 불길한… 사내라니.”
“맞아. 길란에게는 천륜인지도 모르지만… 우리가 길란을 받아들인 건 순전히, 그가 투로답지 않게 점잖고 예의 바르기 때문이야. 게다가 포드 씨의 유언도 있었고….”
“그건 맞는 소리야. 어쨌든 길란이 아니면 쇠붙이를 고칠 수 없으니 그는 우리에게 필요한 존재야. 포드가에 대가 끊기면 손해니까…”
불길한 사내. 그래, 그렇지. 언제나 그랬지. 카르낙은 자조했다. 세상에 뿌리 박힌 선입견이란 이토록 깊고 질긴 것이었다.
“천륜이라니….”
자미에는 중얼거리며 제 치맛자락을 바짝 움켜쥐었다. 세상에 이보다 더 모욕적인 순간은 다시 없으리라, 그녀는 확신에 차 고함쳤다.
“그 말은… 그 말은, 우리 남편이 밖에서 자식이라도 낳아 왔단 말이에요?”
“그게 아니면, 어디서 저런 사내를 데려와 지금껏 숨겨 왔단 말이야!? 게다가 봐! 자네 남편과 똑같은 보라색 눈동자! 지금껏 우리에게 쉬쉬거리며 집 안에 숨겨 둔 이유가 그것이 아니면 뭔데!”
그런 연유로 이들을 숨긴 것이 아니다, 자초지종을 설명하라 하면 밤을 새워서라도 설명할 의사는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되는 것일까, 남편의 명예를 살리고자 살 곳을 찾아 제집에 찾아온, 또 목숨을 걸고 자신을 구한 이들을 자칫 위험하게 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자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무지와 편견의 견고함에 대고 아무리 진실을 이야기해 보았자 소용없는 일이다. 그러니 아무리 억울하고 분통이 터져도 참는 것이 나았다. 차라리 오명을 뒤집어쓰더라도 저와 남편이 감당하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었다.
카르낙이 수타르의 멱살을 쥐고 그를 들어 올린 것은 순식간이었다,
“칼, 안 돼요!”
릴리는 만류하느라 저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모두 붕 뜬 발을 버둥거리는 수타르의 꼴을 보느라 여념이 없어 그것을 듣지도 못했다.
“안 돼요!”
릴리가 터질 듯 단단해진 카르낙의 팔뚝을 부여잡고 애걸했다. 그의 마음 한편으로는 저 나불거리는 주둥이를 정말이지 꿰매 버렸으면 소원이 없겠다 싶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여기서 더 큰 일을 만들어 모두를 곤란하게 만들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면 포드가만 더 곤란해져요.”
“…….”
그대로 목을 졸라 죽일 듯이 수타르를 쏘아보는 카르낙의 눈빛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간곡한 릴리의 말에 꾹 다물었던 어금니를 짓씹자 턱 근육이 꿈틀댔다. 정말이지 놈을 죽이고 싶어 죽을 지경이었다.
“떠나야 해요. 언젠가 떠나야 하니 지금, 지금 떠나기로 하면 돼요.”
카르낙은 던지듯, 수타르의 멱살을 놓았다. 그는 엉덩방아를 찧으며 바닥에 떨어져 쿨럭쿨럭 기침을 해 댔다. 버러지처럼 내려다보는 카르낙의 표정은 금방이라도 그를 발로 밟아 으깰 것처럼 위협적이었다.
정말이지 그러고 싶었다. 발로 짓이겨 터트려 버리고 싶었다. 여기 있는 모두. 저를 욕보이고 힐난하고 무서워하며 몸을 움츠리는 이 모든 사람을 전부 다 그렇게 하고 싶었다.
그의 시야에 오들오들 떨고 있는 푸줏간 모녀가 들어왔다. 한심하고 미련한 계집들. 억울하고 부당하단 생각은 하고 사는가? 그릇된 일이라 생각하여 그것에 저항할 마음은 조금도 없나? 그저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덜덜 떨며 우는소리를 하는 것뿐이지.
어째서 이 대륙에서 사람다운 사람이라 불리는 이들은 모두 다 저 모양인가. 과연 이 땅이 진정 신의 축복을 받은 고귀한 땅이라 할 수 있는지 카르낙은 도저히 이해를 할 수 없었다.
싯!
카르낙이 뱀처럼 위협적인 소리를 내뱉자 수타르가 움찔 몸을 떨며 뒤로 달아났다. 정말이라도 맹독을 품은 뱀이라도 보는 것처럼, 사람들은 소스라치며 한두 발짝 뒤로 물러섰다. 정말이지 한심한 존재들이다.
“칼.”
릴리가 그를 붙잡고 속삭였다. 알아. 알겠어. 물러설게. 그녀의 말대로 이 이상 포드 내외를 곤란하게 해서는 안 되니까.
“너희들의 이 더럽고 옹졸한 마을에서 기꺼이 떠나 줄 테니 지금 당장 내 앞에서 꺼져.”
“…….”
“안 그러면 그 탈영병 놈들처럼 걸리는 대로 도륙 내 줄 테니까.”
말을 맺음과 동시에 카르낙은 수타르를 노려보았다. 만일 그런 일이 생긴다면 가장 먼저 누가 타깃이 될지는 굳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정해진 것이다. 그는 흠칫하면서도 공연히 헛기침을 내며 괜스레 젠체했다. 어떻게 해도 모양이 빠지는 걸 알고는 있을까. 릴리가 카르낙의 팔을 흔들었다. 하는 수 없이 그는 수타르를 위협하는 것을 그만두고 시선을 거두었다.
“바, 반나절의 시간을 주지! 그 전에 이 마을에서 떠나라고!”
그러자 수타르는 곧바로 밉살스러운 협박을 해 왔다. 그러고는 카르낙의 시선이 다시 저를 향하기 전에 번개처럼 몸을 돌려 성큼성큼 제집으로 향했다. 주동자가 돌아서자 마을 사람들도 하나둘, 그의 뒤를 따라 마을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세상에.”
자미에 포드는 신음을 하며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감쌌다. 그녀는 절망감으로 흐느꼈다.
“포드 부인.”
릴리가 위로하듯 그녀를 불렀지만 자미에 포드는 거부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정말이지…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이에요. 믿기지 않을 지경이에요…”
“죄송합니다, 이스바 경. 부인. 마을 사람들을 대신해 제가 사과를 드릴게요.”
매짐이 아버지와 어머니를 대신해 둘에게 사과의 말을 건넸다. 그의 표정도 어머니 못지않게 굳어 있었다. 릴리는 고개를 저었다.
“매짐이 사과할 일이 아니에요.”
“모두 여길 떠나는 게 좋겠어요.”
생각에 잠겨 있던 카르낙이 불현듯 입을 열었다. 뜬금없는 말을 내뱉은 이치고는 대단히 침착한 낯빛이었다.
“그간 저런 놈들을 질릴 정도로 많이 상대해 봐서 잘 알아. 분명 분풀이를 하러 올 겁니다.”
비열한 허풍쟁이들이 얼마나 많은 일을 수없이 망쳐 왔는지 카르낙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잘못을 저지르고도 그것을 인정할 줄도 모르고, 그리하여 후회할 줄도 몰랐다. 그래서 그들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 저열하고 비겁해지며 잔인한 자들이 된다. 그런 곳에 길란과 자미에를 두고 갈 수는 없었다. 그것은 길란이 투로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러한 이유가 아예 없다고는 할 순 없겠지만 분명 그 이유가 전부는 아니었다.
“그건 안 돼요, 이스바.”
자미에가 제 볼을 훔쳐 내며 고개를 저었다. 남편의 손을 꼭 잡는 노년의 여인은 그사이 한 층 더 지치고 늙어 보였다.
“여긴 내가 나고 자라 온 곳이에요. 무례하고 멍청한 치들일지언정 평생을 함께해 온 이웃들이고요.”
“지금은 사정이 달라요, 포드 부인.”
제가 나타남으로써 포드 가문은 동네 사람들에게 미운털이 박혔을 거다. 마을에서 포드 내외를 필요로 한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들이 없으면 마을 사람들의 농기구와 산달을 앞둔 여인들을 보살펴 줄 손이 없을 테니까.
그러나 그것과 별개로 놈들은 포드가를 괴롭히려 들 것이다. 포드가에게 당한 치욕을 절대로 잊지 않겠지. 특히 수타르라는 그놈은 더욱더. 그 꼴은 못 보지. 그들이 포드 가문을 드잡이하며 휘두르는 꼴은 못 본다. 그러기엔… 그래. 그러기엔 이미 너무 많이 정이 들었다. 더는 남이라 생각할 수 없다.
그는 한번 맺은 인연은 끝까지 가져가는 사내였다. 로로가 그랬고 에이가가 그랬으며, 핀이 그랬고 그 외의 수많은 그의 사람들이 그랬다. 그러니 포드 가문도 마찬가지다. 이제 그들은 카르낙 자신의 사람이었다. 그러니 그들이 고통 속에 버려진 꼴은 절대로 못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