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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발 아래 은빛 눈-154화 (154/231)

154화

자미에 포드는 옷소매로 제 코와 입을 막은 채 벽에 딱 붙어 있었다. 매캐한 연기 때문에 계속해서 기침이 났다. 남은 병사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했다. 순간 자미에는 이 틈을 타 우두머리의 어깨를 잘라 버리면 어떨까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자칫 조준을 잘못하여 놈의 얼굴이나 머리를 잘라 내면 어쩌나 걱정되어 그만두었다.

그럼에도 손에 든 무쇠 칼은 절대로 내려놓지 않았다. 새까만 연기 사이로 악마가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그는 눈에 익은 실루엣을 하고 있었다. 분명 그녀가 잘 아는 사내의 것이었다. 커다란 키에, 크고 단단한 어깨, 종마의 것과 똑같은 허벅지와 장딴지가 뚜벅뚜벅 걸음을 옮겼다. 그는 아주 길고 무거운 검을 들고 있었다. 어깨에 삐죽 솟아오른 견갑은 악귀의 뿔처럼 보였다. 어중간한 길이의 머리카락이 그의 턱과 귀 밑에서 살랑살랑 춤을 추었다. 마치 장송곡의 가락에 맞춰 춤을 추는 무희의 리본 같았다.

자미에 포드는 그 악귀가 이스바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는 이스바 같았다. 아니, 아니다. 눈을 가늘게 뜨고 다시 살피니 그것은 이스바였다. 장검을 들고 자신의 남편과 같은 바이올렛 눈동자를 번뜩이며 스며드는 어두운 연기처럼 매캐한 빛을 내는 이는 분명 이스바였다.

아들인 매짐은 첫눈에 그를 ‘경’이라 칭하며 기사로 대우했다. 그러나 자미에 포드는 그가 기사라기보다는 자신의 남편처럼 거칠고 험한 일을 하는 투로, 노예나 다름없는 처지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험난한 시대를 타고나 많은 사연을 가지고 있는 굴곡이 많은 청년일 것이라고.

이런 바보 같은 자미에 포드. 그동안 헛살았다. 제 아들 매짐 포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기사가 아니야. 그는 ‘전사’야. ‘경’이라고 이름 붙일 만한 고상함 대신, 보는 이의 턱을 덜덜 떨리게 하는 위압감이 있었고 기사라는 우아함 대신 단칼에 상대방을 두 동강 낼 잔인함이 바로 그것이었다.

“어머니!”

뒤에서 누군가 그녀를 붙드는 바람에 자미에의 몸이 위로 펄쩍 뛰어 올랐다.

“저예요. 진정하세요!”

매짐이었다. 그녀는 제 아들을 보며 가슴을 쓸었다. 이 멍청이 같으니! 자칫, 네 녀석에 안면에 칼을 휘두를 뻔 했잖아!

“매짐! 네가 어떻게… 그 칼은 또 어디서….”

자미에는 제 아들이 든 장검을 보며 아연실색했다. 길란이 만들어 주었을 리는 만무했으니까.

“이야기하자면 길어요. 그러니까 우선, 여길 빠져 나가야겠어요,”

“하지만….”

자미에는 주변을 둘러보며 머뭇거렸다. 파상풍을 입은 저 사내는 어쩌고? 또… 이스바는? 그에 대한 걱정이 앞서면서도 한편으로는 과연 그를 걱정할 처지가 되는가도 의문스러웠다.

매짐은 모친의 손을 잡고 당겼다. 곧 칼부림이 시작될 테니 그 전에 어머니를 안전한 곳에 모셔야만 했다. 그래야만 저 혼자 다시 이곳에 돌아와 이스바를 도울 수 있다.

“어서요! 서둘러요!”

그러니 망설일 틈이 없는 것이다. 아들의 닦달에 못 이겨 자미에는 치맛자락을 붙들고 그가 이끄는 데로 뛰었다.

사지가 말짱하게 남은 사내들은 이제 둘. 그들은 자신의 동료들이 어떻게 죽었는지도 파악하지 못한 채 눈앞의 거구를 상대로 칼을 겨누고 있었다.

이 짐승 같은 놈이 투로라는 것은 대번에 눈치 채고 있었다. 저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큰 키며 덩치며 모든 것이 그 벌레들의 특성 그대로이니 눈치 채지 못하는 것이 더 어려웠다.

과거에는 제 발 아래 으스러져가던 놈들이었다. 하찮고 상대할 가치도 없던 존재였건만 어느 순간 투로는 그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나 전쟁터에서 만나면 그 두려움은 배가 되었다. 압도적인 힘과 체력을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었다.

그러니 제 아무리 날고 기는 전사여도 도저히 투로들을 이겨 낼 방도가 없었다. 애초에 모두 싹을 잘라야 했거늘.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타들어 가는 사막에 던져 놓고 저들끼리 물고 뜯다가 죽게 만들어야 했다. 절대로 그 사막에서 벗어나게 하면 안 되었다. 선조들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놈들이 이렇게 왕국을 집어 삼킬 적이라는 것을.

“무, 물러서!”

주근깨가 소리쳤다. 경고하는 말이었으나 겁을 잔뜩 먹은 음성은 살려 달라 읍소하는 듯하였다.

카르낙은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그의 행색을 살폈다. 전형적은 엘버그인의 외형이었다. 볕에 그을리지 않은 하얀 피부, 두꺼운 가죽을 덧댄 바지와 망토. 목깃에 설치류의 것 같은 털이 보였다.

“북쪽에서 왔군.”

그는 대번에 놈들이 있던 곳을 알아맞혔다. 북쪽에서 여기까지 도망쳐온 것이다. 멀루아가 아니라면 테이먼 테르조의 병사인가? 놈의 병사들은 모두 테르조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푸른색 튜닉을 입는다. 그러나 그들이 입은 것은 붉은색과 고동색이 번갈아 짠 튜닉이었다.

카르낙은 그들의 가슴팍에 새겨진 방사형 문장을 기억해 내려 애썼다. 그리고는 곧 떠올렸다.

“브리다스.”

코르넬리오 부인의 부친이자 그 장자의 후견인. 그리고 테이먼 테르조의 오른팔인 사내, 브리다스의 문양이 틀림없었다. 주근깨는 흠칫 놀라 연거푸 거친 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똑똑한 자라도 이런 것들을 배움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하물며 이런 외딴 마을에 동떨어져 사는 사내가 어떻게 대륙 여기저기에 있는 귀족 가문을 그 문장만으로 알아볼 수 있단 말인가. 불가능한 일이었다. 전장에서 여러 가문을 상대해 본 백전노장의 군병이 아니고서야…. 것도 아니라면 엄청나게 수준 높은 고등교육을 배운 지체 높은 귀족뿐이었다.

“…….”

주근꺠는 눈앞의 사내를 가늠하였다. 딱 보기에도 침착하고 고요하며 압도적으로 강인한 자였다. 안정적으로 보였지만 날카로운 눈빛은 짐승의 광기가 어렸고 서 있는 자태나 균형감은 그 어느 군인보다 우아하고 절제되어 있었다.

“…대체….”

이자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누구든, 결코 이 마을과 어울리지 않는 자 임에는 분명하였다.

“탈영인가?”

“…우, 우린 그냥 다친 동료의 상처 때문에 왔을 뿐이야. 오해 말라고. 치료가 되면 조, 조용히 떠날 거야.”

다른 사내가 더듬대며 말했다. 맥주를 과하게 먹은 탓인지 눈가와 콧등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술에 몽롱해진 눈빛처럼 그의 검 끝도 자꾸만 흔들렸다. 제대로 칼이나 휘두를 수 있을까 의심이 될 지경이었다.

카르낙은 헛웃음을 켰다. 벌써 사내 둘을 죽이고 푸줏간을 멋대로 점거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그 식솔들을 노예처럼 부리며 고기를 축내고 있었으면서 조용히 떠나겠다라. 정말 믿을 거라 생각하여 그런 허술한 거짓말을 하는 것일까.

“브리다스의 군인들은 대부분 너처럼 멍청한가? 아니면 멍청해서 탈영을 한 건가?”

그들은 대답하지 않았고 그의 도발에 넘어가지도 않았다. 아니 욱하더라도 그것에 넘어갈 수가 없었다. 분노도 상대를 봐가며 조절하는 것이 아니던가. 눈앞의 사내는 화가 난다고 쉽게 검을 휘둘러도 되는 자가 아니었다. 게다가 아무리 보아도 상대도 저처럼 전장을 뒹굴다 온 사람으로 보였다.

“넌 누구야?”

주근깨가 물었다.

“불이 난 척 지푸라기로 연기를 피운 것도 네놈이야?”

“브리다스에 대해 넘겨 줄 정보 같은 거 없어? 뭐라도 좋아. 괜찮은 것을 넘겨주면 목숨만은 살려주지.”

“…이 애송이가….”

약이 올라 어금니가 절로 꽉 물렸다.

“지루하네.”

마치 아주 오래 기다리고 있다는 듯 말하더니 그는 허리춤에서 무언가를 꺼내 곧바로 던졌다. 주근깨는 ‘컥!’ 하는 소리를 내며 손에 들고 있던 칼을 바닥으로 떨구었다. 단도가 아주 정확하게 그의 미간 사이에 꽂혀 버린 것이다.

“어… 어… 이… 이….”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는 주근깨를 보며 하나 남은 그의 동료는 이상한 소리를 내며 뒷걸음질 쳤다. 그냥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너무 놀라니 비명이고 고함이고 나발이고 아무것도 나오지가 않는 것이다.

주근깨는 아주 천천히, 매우 천천히 뒤로 넘어갔다. 그는 뒤로 완전히 넘어갈 때까지도 저의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하는 듯 보였다.

이제 더는 물러설 곳이 없었다. 병사는 칼을 치켜들고 카르낙에게 돌진했다. 검과 검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부딪치는 듯하더니 남자의 칼날이 반토막이 났다. 공중으로 빙그르르 회전하던 것이 남자의 뒤쪽 나무 바닥에 콱, 하고 꽂혔다.

“검을 손보는 것을 게을리했네, 탈영병.”

“…….”

“군인에게 검은 제 분신이거늘. 그렇지?”

‘그러니까 너는 죽어도 싸’, 하며 카르낙이 그의 뱃가죽에 제 검을 찔러 넣었다. 날카로운 끝이 살을 찢고 뼈를 가르고 장기를 꿰뚫는 감각이 검을 쥔 카르낙의 손에 고스란히 느껴졌다.

검을 뽑아내자 구멍이 난 자리에서 피가 솟구쳤다. 뜨겁고 선연한 것이 튀어 올라 카르낙의 가슴팍과 턱 언저리를 적셨다. 카르낙은 손등으로 제 턱을 닦아 내며 푸줏간의 가장 구석을 향해 걸었다.

거기에는 이 사달의 원흉이 있었다. 치료사를 죽이고 자미에 포드를 불러내 이토록 일을 귀찮게 만든 원흉. 고열과 구토에 시달린다던 부상병.

카르낙은 짚더미에 널브러져 있는 반쯤 죽은 그를 여유롭게 내려다보았다. 이미 괴사가 시작된 어깨를 발견하자 그의 고개가 한쪽으로 기울었다. 상황 파악이 다 된 카르낙은 저 혼자 읊조렸다. 그렇군.

“멍청하긴 해도 아예 의리가 없는 놈들은 아니었나 봐.”

그렇게 말하며 카르낙은 눈 밑이 시커멓게 되어서는 죽어가는 남자의 어깨를 칼끝으로 짚었다. 정확하게 괴사가 시작된 부분이었다. 고통 속에 남자가 가누지도 못하는 몸을 움찔 뒤틀었다

“진작 잘라 냈어야지.

이미 다 썩어 버린 것을 달고 와서 포드 부인에게 살려 내라 협박을 하다니. 차라리 팔이 잘린 채로 왔다면 어쩌면 목숨은 부지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이미 과다출혈로 진작 뒈졌으려나? 뭐가 되었건 상관없다. 가만히 두어도 오늘을 넘기지 못하고 죽을 목숨이다.

놈을 어쩔까. 이대로 방치해 둘까? 주민들에게 넘기고 삶아먹건 튀겨먹건 알아서 하라고 할까? 카르낙은 조금 고민하다 칼끝을 그의 목에 겨낭하고 그대로 힘을 주어 내리눌렀다. 칼날이 천천히 그의 목을 파고 들다가 딱딱한 나무 바닥에 부딪혔다. 사내는 천천히 숨이 끊어지는 동안에도 신음소리 한번 내지 못하고선 이내 절명하였다.

그것이 그나마, 카르낙이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자비였다.

“이스바 경!”

헐떡대며 누군가 푸줏간으로 달려들었다. 굳이 뒤를 돌아보지 않고도 카르낙은 그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이젠 목소리만 들어도 안다. 매짐, 그는 헐떡대며 분주하게 주변을 경계하다 이내 잔뜩 치켜든 검을 내렸다.

“…뭐야. 끝난 겁니까?”

헛웃음이 났다. 카르낙은 시체의 목에서 검을 빼내 포드 부인이 둘러 주었을 싸구려 모포에 날을 닦아 냈다. 매짐이 다가왔다.

“죽었어요?”

“보다시피.”

매짐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젠장. 조금이라도 이 전투의 뜨거움을 느끼고 싶었는데. 완전 김샜다.

“다 죽이셨네요.”

“…….”

“무장한 군인… 일곱을 이스바 경 혼자서요.”

카르낙의 얼굴에 묻어있는 놈들의 핏물은 여전히 뜨거웠다. 거기서 일렁이는 생명력이란. 매짐은 그것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압도적이고 숨 막히도록 경이로웠다. 치열한 전투와 피와 죽음과 삶이 뒤얽힌 이 잔인한 세계에. 그리고 그 세계를 펼쳐 놓은 눈앞의 남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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