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우두머리는 단순히 ‘고열’과 ‘구토’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병명은 파상풍. 어깨에 상처가 생기면서 얻은 병이었다. 이미 환부는 곪고 썩어 가고 있었다. 자미에 포드는 악취를 참아 가며 펄펄 끓는 그의 열을 조금이라도 내려 보려 애를 썼으나 무리였다. 원인을 처리하지 않고 회복을 바라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안되겠어요. 팔을 잘라 내야 해요.”
“안 돼!”
건초 위에 쓰러져 혼절한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우두머리는 고열에 시달리면서도 팔을 자르겠단 소리에는 귀신같이 정신을 차리고 소리쳤다. 안 그래도 새하얀 그의 얼굴은 하얗다 못해 푸르게 질려갔다. 이미 벗겨질 만큼 벗겨진 갈색 머리카락까지 푸르게 바래보일 지경이었다.
“그냥 잘라.”
뒤에서 누군가 중얼거렸다. 그 사내는 넌덜머리가 난 듯했다. 싸구려 맥주는 이제 미적지근하게 식어서는 뜨거울 지경이었고 그의 인내심에도 한계치에 다다르고 말았다.
“이봐, 주근깨. 말 함부로 하지 마. 칼잡이한테 팔을 자르는 게 어떤 의미인지 몰라?”
모르긴. 알다 마다. 머리를 자르란 의미랑 똑같잖아. 아무렴 어때. 팔을 자르던 머리를 자르던, 어차피 뒈질 놈이면 그냥 빨리 뒈져 버리란 말이야. 그의 콧등이 불만으로 꿈틀거렸고 그럴 때마다 그 위의 주근깨가 좀벌레처럼 움직였다. 자미에 포드는 그들의 고집을 이해할 수 없었다.
“목숨을 잃느니 팔 하나를 잃는 게 낫잖아요. 칼이야 반대쪽 손으로 잡으면 되고요!”
“젠장, 이러나저러나 끝났어.”
누군가가 또 중얼거렸다. “내 말이.” 주근깨가 그를 거들었다.
“다들 그만해!”
또 다른 사내 하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저벅저벅 걸어와 자미에의 목에 칼을 겨누었다. 꿀꺽 침을 삼키기라도 하면 목젖을 찌를 만큼 가까웠다.
“잘 들어, 아줌마. 대장이 죽으면 너도 죽는 거야.”
“팔을 잘라내지 않으면 곧 죽을 거예요.”
“그러니까 살려 내라는 거야. 네 목숨을 담보로.”
억지도 이런 억지가 없다. 이대로 두면 그는 반나절도 넘기지 못해 죽을 것이다. 어깨의 괴사가 더 진행된 이후엔 팔을 잘라 내도 소용이 없었다. 그나마 겨우 붙어 있는 목숨을 살리려면 기회는 지금뿐이다.
이대로는 지켜보기만 해서는 안 돼. 잘라 내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목숨을 담보로 해도 살릴 수 없다. 비록 신분이 미천하여 한 일이라고는 수태로 위험해진 부인들을 돕는 것이었으나 그녀에게는 분명하고 숭고한 목적이 있었다.
생명을 살리는 것. 귀한 것이나 천한 것이나 모난 것이나 유한 것이나 그녀는 무엇이든 목숨을 구하는 일이라면 최선을 다해왔다. 그로 인해 손해를 보건, 득을 보건 어떠한 순간에도 그것은 변함이 없었다. 비록 목숨이 달렸다 하여도 그녀에게는 모두 같았다.
자미에 포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순간적으로 눈앞이 핑 돌았다. 얼마나 오랫동안 그 자리에 쪼그려 앉아 있었는지 현기증에 그대로 쓰러질 뻔한 것을 비틀거리며 간신히 균형을 잡았다.
이런 때에 곁에 남편이나 아들이라도 있었다면 기꺼이 저를 부축해 따듯한 물이라도 한 잔 권해 주었을 텐데. 무장을 한 사내들은 그 차림새만큼이나 성질이 강퍅하여 자기들 입속에 무엇이라도 처넣기만 바빴다.
자미에는 제 머리를 짚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내들은 그런 자미에를 멀뚱히 구경만 하였다. 지루하던 차에 뭐라도 해 주면 다행일 따름이었다.
자미에의 눈에 나무판자 위에 살짝 꽂아 고정해 둔 커다란 식칼이 보였다. 발골할 때 쓰는 날카롭고 뾰족한 칼과는 달리 도축한 고기를 뼈째 잘라낼 때 쓰는 아주 무겁고 큰 칼이었다.
좋아. 자미에는 크게 심호흡을 한번 하고 치맛자락을 붙잡고 척척, 하고 다가가 나무판자에 꽂힌 칼을 빼 들었다. 동시에 실내의 사내 넷이 벌떡 일어섰다. 흥청망청 먹고 마시기만 하다가 제 반만 한 여자가 식칼을 드니 정신이 번쩍 들기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워!!!”
그 중 하나가 마치 흥분한 말을 진정이라도 시키는 듯한 고함소리를 내었다. 술에 취해 코끝이 벌게졌어도 본능은 또렷하게 살아있는 듯하였다.
“뭐, 뭐 하려는 거야! 아줌마!”
“당신네들 대장을 살리려는 거니까 비켜요!”
자미에는 단호하였다. 네놈들이 못하겠거든 내가 직접 그의 팔을 잘라 주마. 생사의 고락을 이미 여러 번 경험한 중년의 여인은 거칠 것이 없었다. 그 기백에 도리어 전장을 구른 병사들이 뒷걸음질 칠 정도였다.
“아, 안….”
우두머리는 숨이 꼴깍 꼴깍 넘어가는 와중에도 죽을힘을 다하여 도리질을 했다. 절체절명의 순간 누군가가 외쳤다.
“잠깐!”
이러나저러나 뒈질 놈은 빨리 뒈져야 한다는 생각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는 주근깨의 목소리였다. 그는 별안간 모두를 멈추더니 갑자기 코를 킁킁거렸다.
“…뭐 타는 냄새 안나?”
타는 냄새? 그의 말에 다른 이들도 킁킁,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덩달아 자미에도 킁킁거렸다. 확실히 매캐한 냄새가 나고 있었다.
그 때 누군가 문 쪽을 가르켰다.
“부, 불!”
확실했다. 문의 틈새로 매캐한 연기가 꾸역꾸역 밀려들어오고 있었다. 주근깨는 일어나 창밖을 살폈다. 불길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밖에 자욱한 연기 덕에 설사 불길이 치솟았다 해도 가려졌을지도 모른다.
그는 이 상황에서도 침착하려 애를 썼다. 맥주에 취해 감각이 둔해졌음에도 맨 먼저 타는 냄새를 알아차렸던 것처럼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신중하게 생각하려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혼자만의 생각이었다.
그가 이렇다 할 계획을 세우기도 전에 이성을 잃은 누군가가 벌컥 대문을 열었다.
주근깨는 허망하게 ‘안돼!’라고 외쳤다. 만일 사방이 불바다라면 문을 여는 순간 불길과 연기가 폭풍처럼 밀어닥칠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너무 늦었다, 기다렸다는 듯 연기가 베어들었고 곧 누군가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그러더니 퉁, 하는 소리와 함께 베어 낸 나무 기둥이 넘어가듯 제 동지 중 하나가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의 등 아래로 핏물이 번졌다. 흉통에 크고 두꺼운 칼날에 꿰뚫린 구멍이 훤히 보였다.
“…….”
연기가 스며든 내부는 한순간 정적에 휩싸였다.
“비, 빌어먹을. 뭐…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누군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더듬거렸다. 칼을 빼든 손에 잔뜩 힘을 주고 사방을 경계하고 있었지만 어디를 경계해야 하는지, 무엇을 조심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또한 그런 점이 더 그들을 두렵게 만들었다. 연기는 계속해서 밀려들었다. 시야는 점점 더 어둡고 좁아졌다.
“뒤, 뒷문.”
뒷문이 있을 거야. 뒷문으로 나가면 될지도 모른다. 아직 뒷문은 안전할지도. 이성으로 생각하기 전에 본능이 먼저 그렇게 말했다. 좀 더 어둡고, 작은 구멍을 찾아. 개구멍 같은 곳으로 빠져나가는 거야. 그러면 좀 더 안전할거다. 그러려면 빨리, 누구보다 빨리 나가야 해. 그러려면 어서 움직여야 한다!
“이봐! 어디 가! 이봐!”
살길을 찾아 동료 한 명이 쏜살같이 뛰쳐나갔다. 이 좁고 냄새나는 푸줏간 안에 뛰어보았자 무엇이 얼마나 달라지겠는가. 생각대로였다. 매짐은 뒷문에 잠복해 있다가 병사가 뛰쳐나오는 순간, 그를 향해 도끼를 휘둘렀다. 어둠속에서 두터운 날이 날아왔다.
“으악!” 하고, 사내는 몸을 숙였다. 혼비백산한 이라도 그는 훈련받은 병사, 매짐의 둔탁하고 둔한 몸놀림에 당할 만큼 어리숙하지는 않았다.
큰일이다! 매짐은 곧바로 정신을 차렸다. 좀 더 빨랐어야 했다. 조금도 망설여서는 안 되었다. 정말로 사람을 죽여야 하는가, 정말로 사람을 죽이는 걸까, 그 짧은 순간의 번뇌가 허점이 되었다. 그러면 안 됐다. 놈을 놓치면 안 된다. 이스바 경에게 그를 도울 이라고는 오로지 저 하나뿐인데, 자신이 실수라도 하면 그것은 곧바로 그의 약점이 될 터였다.
병사는 곧바로 상대가 어설픈 몸동작에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있는 풋내기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살의가 담긴 검은 그 속도부터 달랐다. 부웅, 하고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났다. 매짐이 간발의 차이로 허리를 숙여 그것을 피했다. 칼끝이 아슬아슬하게 아랫배를 훑고 지나갔다. 날카로운 칼날에 종잇장처럼 튜닉이 찢겨나갔다.
매짐은 이를 사리물었다. 죽여야 해. 죽이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다. 병사가 다시 칼을 휘둘렀다. 뒷걸음질 쳐 그것을 피하고 매짐은 놈이 칼을 갈무리하기 전에 무게를 실어 어깨로 그의 배를 받아버렸다. ‘헙’ 하고 숨통이 막히는 소리와 함께 놈이 뒤로 나자빠졌다. 매짐은 그의 몸 위에 냉큼 올라타 검을 쥔 손을 바닥에 몇 번이고 내리쳤다.
“아악! 아악!’
비명을 지르며 병사는 발버둥을 쳤다. 그러나 바닥에 짓이겨지는 힘을 이기지 못하고 그는 그만 칼을 놓쳐버리고 말았다. 매짐이 있는 힘껏 머리로 그의 코뼈를 들이 받았다. 우지끈, 하고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아아아아악!”
놈이 소리를 질렀다. 매짐은 더 망설이지 않았다. 그에게서 빼앗아 든 검을 치켜들었다가 그대로 바닥으로 내리꽂았다.
‘컥!’하고 놈이 피를 토했다. 시뻘건 것이 솟구쳐 올라 매짐의 얼굴을 적셨다. 칼끝이 그의 배를 뚫고 흙바닥에 박히는 느낌이 들 때까지 매짐은 꾸욱, 하고 계속해서 칼을 그의 복부에 짓눌렀다. 그리고 마침내 놈의 사지가 축 늘어졌다. 허억, 허억, 허억. 매짐은 그제야 두려움과 흥분에 떠는 자신의 가쁜 숨소리를 느꼈다. 죽었다. 놈이 죽었어.
사람을 죽였는데 현실감이 없었다. 누군가를 죽였다는 사실보다 자신이 살았다는 안도감이 더 컸다. 그는 놈의 사체에서 몸을 일으켜 아주 천천히 제 손에 쥐어진 검을 보았다.
놈은 죽었다. 그러니 이건 내가 놈에게서 빼앗은 거고 그러니 이건 내 것이다. 내 검. 이 검으로 놈을 죽였으니 이제 이 검은 내 것이야. 희열이 솟구쳤다. 내가 사람을 죽였다. 그것도 검으로.
이제야 사내가 된 것 같았다. 마치 기사라도 된 것 같았다. 뜨거운 희열이 온몸을 감쌌다. 이제 그는 살육의 쾌락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