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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발 아래 은빛 눈-155화 (155/231)

155화

“한 명은 네 몫이었지, 매짐.”

카르낙은 자랑스레 들고 있는 매짐의 검을 주시하며 말했다. 그러자 매짐의 표정은 의기양양해졌다.

“깔끔하게 해치웠습니다, 이스바 경.”

어설픈 촌놈일지는 몰라도 기백은 있었다. 카르낙은 그런 이를 좋아했다. 그것은 대책 없는 자신감이나 혹은 자만과는 달랐다. 이를테면 용기를 내어 자신이 져야 할 희생이나 책임을 감내할 수 있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태도였다.

자신만만한 그의 대답이 마음에 들어 카르낙은 옅게 미소 지었다. 그러자 매짐의 얼굴엔 어떤 자부심 비슷한 것이 솟아올랐다. 그의 가슴이 부푸는 것이 느껴졌다. 매짐은 주변을 빙 한 번 돌아보더니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할까요? 사람들을 데리고 올까요? 놈들의 시체는 어떻게 하죠?”

밖에 널브러진 시체가 다섯, 내부에 있는 것이 셋, 뒷문에도 하나가 더 있었다. 사방에서 매캐한 연기 내음과 함께 피비린내가 났다. 하긴 푸줏간 안에는 늘 도축한 동물들의 비린내가 가득했지. 거기에 사람 피내음이 조금 섞인다고 다를 것이 뭐가 있겠냐마는.

“마을 사람들을 시켜 시체를 소각해. 혹시 모르니.”

카르낙은 멀루아의 역병을 떠올리며 명령했다. 조금이라도 껄끄러울 바엔 애초에 그 싹을 자르는 것이 낫다.

카르낙은 피를 닦아 낸 검을 검집에 넣고 매짐과 함께 푸줏간에서 도망쳐 나온 모녀와 자미에 포드에게로 향했다. 매짐과 카르낙을 보자마자 푸줏간 모녀는 울음을 터트렸다. 아버지를 잃은 슬픔과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이 고통스럽게 교차하는 것 같았다.

자미에 포드는 대장간으로 돌아가는 내내 표정이 좋지 않았다. 카르낙에게 목숨을 빚졌다며 진심 어린 감사를 표하고 다시 남편과 해후해 감격어린 포옹을 나눈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집으로 돌아가 부엌 화로에 불을 피우고 식탁에 둘러앉아 오랫동안 아껴온 포도주를 꺼내 식도를 대우는 내내 멍하게 불길만 바라보다가 그녀가 말했다.

“누군가 푸줏간의 일을 맡아야만 할 거예요.”

그들은 가장을 잃었다. 엘버그에서 여인들끼리 가업을 꾸리거나 장사를 하거나 가정을 지키는 일은 없었다. 모친이 재가를 하거나 아니면 그 딸이 조금 이른 나이에 결혼을 해야 했다.

마을에는 아직 결혼을 하지 못한 늙은 홀아비들이 몇 있었다. 모두 변변찮은 인물로 비렁뱅이나 다름없는 이들이었다. 조만간 그들 중 하나가 푸줏간의 주인이 될 터였다. 모녀의 의견이나 바람과는 상관없이 말이다.

“가여운 아이.”

자미에 포드가 안타까운 듯 탄식했다.

“아직 초경도 치르지 못했을 텐데....”

“부인이 재가 할지도 모르잖아요.”

매짐의 위로에 자미에 포드는 한숨을 쉬었다.

“세상 이치에 따른다면 그것이 맞겠지. 아주 조금이라도 따른다면 말이야.”

하지만 자미에도, 그의 남편도 그의 자식도 그리고 엘버그 왕국에 대해 아직 잘 알지 못하는 릴리조차 안다. 사내들은 결코 늙은 미망인과의 재혼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더 어리고 아름답고 싱싱한 그녀의 딸을 택할 터였다. 세상의 이치가 아닌 자신의 욕망에 충실히 따라서.

“아침이면 주민들이 모여 그 모녀를 위한 현명한 결정을 내리겠지.”

길란이 할 말은 그 정도뿐이었다.

“자신들의 운명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한다니. 그것도 평생 함께할 반려조차 말이에요. 정말이지 비극이에요.”

자미에 포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길란은 그런 아내를 위로하기 위해 그녀의 주름진 손등 위에 제 손을 얹었다. 내내 파상풍에 시달린 탈영병을 돌보느라 끝이 짓무른 손이었다.

“그래도 이만하기 다행이야. 이스바가 없었다면….”

매짐은 뒷말을 잇지 못했다. 차마 끔찍하여 입에 담기도 생각하기도 싫었다.

“다시 한번 고맙네. 자네 덕분에 나는 아내를 지켰어.”

“저도 감사를 표합니다, 이스바 경.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아버지를 따라 매짐도 일어나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매짐의 말마따나 당신이 기사라면, 이스바 경, 당신은 존경을 받아 마땅해요.”

자미에 포드가 갑자기 그를 높이며 공손히 말하기 시작했다.

“예사 분이 아니란 것은 알고 있었죠. 설령 매짐의 말대로 기사가 아닐지라도 당신은 존경을 받기에 충분해요.”

“그 말이 맞습니다, 이스바 경. 당신은 우리 가족의 존경을 받기에 충분하지요.”

아내를 따라 길란도 그를 존대하기 시작했다. 그것에 카르낙은 불편함을 느껴 헛기침을 하며 웃었다.

“그만두세요, 길란. 대우를 받고자 한 일이 아니에요. 말씀드렸잖아요. 아내를 대신해 빚을 갚은 거라고요. 두 분께서 제 아내를 살려주었으니 저 역시 포드 부인을 구한 것뿐입니다.”

“난 목숨을 내놓은 적은 없어요. 하지만 이스바 경은 목숨을 담보로 날 구했잖아요.”

자칫 비명횡사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했지. 그러나 목숨을 내놓고 칼을 휘두른 적은 무수히 많다. 아니 무수히 많다는 표현으로도 부족하다. 그러니까 그것은 일상적이고 매우 익숙한 일이었다. 베거나, 베이거나, 죽거나, 죽이거나. 인생을 통틀어 언제나 그런 상황에 속해 있었다.

코르넬리오로부터 모웨나를 탈환한 이후로 익숙지 않게 평화롭긴 했지. 사냥을 하고 매일 같은 곳, 같은 방, 같은 침대에서 잠들었다 일어나고 결혼을 하구 그 이후로 매일 아내를 품에 안고 잠드는 날들이 익숙해지던 날들.

정말 보기 드물게 일상적이고 평화로운 날들이었다. 어쩌면 인생에 다시 돌아오지 못할 날들을 지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카르낙은 침착한 표정으로 제 옆에 앉아있는 파니릴리를 힐끗 쳐다보았다.

카르낙이 돌아온 이후로 내내 그녀는 말이 없었다. 다시 마주한 그녀의 얼굴은 분명 공포에 질려 있었었다. 시선이 맞닿은 순간 카르낙은 그녀의 투명한 눈동자에서 무언가가 부서졌음을 느꼈다. 아주 얇고 투명하고 섬세한 무언가가 흔들리며 조각났다.

카르낙은 그것을 짐작하기 어려웠다. 아니, 불가능하다고 보아야 맞았다. 릴리의 깊고 복잡한 속을 제까짓 게 어떻게 알 수 있으랴. 다만 어느 때이고 그녀가 자신을 너무 많이 미워하지만 않았으면 좋겠다고 바랄 뿐이었다. 까맣게 잊고 너무 기쁜 듯이 자신을 떠나지만 않았으면 좋겠다고.

추억이 아니라면 차라리 그녀의 마음에 작은 생채기라도 되고 싶었다. 그렇게나마 조금이라도 남을 수 있다면 말이다. 그리고 마주한 순간, 그녀의 눈동자를 보며 적어도 그 바람만은 지켜졌노라 안심할 수 있었다. 기쁘고 씁쓸한 안도감이었다.

“씻어야겠어요.”

다소 고조된 분위기가 민망하여 카르낙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덩달아 다른 이들도 함께 일어났다. 편하게 대하라는 말은 애초에 무리였는지도 모른다. 카르낙이 견갑을 착용하고 검을 허리에 찼을 때나 혹은 온몸에 피를 뒤집어 쓴 채 매짐과 함께 대장간으로 돌아왔을 때부터 말이다.

사실 카르낙을 잘 아는 이라면 모두가 그를 무서워했다. 사람들이 저를 두려워하는 것을 보는 것도 생각해 보니 늘 익숙한 것이었다.

벌레도, 노예도, 괴물도, 악마도 아닌 그저 평범한 사람으로서 대접해 준 이들은 포드 가족이 유일했으므로 그가 ‘사람’으로 산 기간은 아주 짧았다. 그리고 그 짧은 기간이 이토록 쉽고 편안하게 익숙해질 줄은 몰랐다. 마치 제 몸에 꼭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의식하지 않은 새에 그는 그것에 적응해 버렸다.

인간 대 인간으로 사람과 어울리는 것은 얼마나 쉽고 편하고 또한 놀랍도록 빨리 익숙해진다. 그래서 순간, 두려움이 엄습했다. 이 찰나의 평화를 떨쳐 버릴 수 없을까 봐. ‘임시’에 불과했던 삶을 혹여나 원하게 될까 봐. 그것은 자신이 지금껏 이루어 놓은 모든 것을 순식간에 무너뜨리는 일이었다. 지금껏 그를 따라 사지를 넘나든 수많은 전우와 동료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이것은 진짜 ‘삶’이 아니다. 또한 포드 가족은 자신의 동료나 전우도 아니었다. 모두 스쳐가는 인연, 기억도 하지 못할 이들에게 무엇을 기대하는가. 행여 그들의 일부분이라도 되려했다면 지금이라도 정신을 차려야 한다. 저는 낯선 객이었고 그들은 그저 마음씨 좋은 사람들일 뿐이다.

“조금만 기다리면 내가 물을 데워 줄 수 있어요.”

자미에 포드가 말했다. 그녀는 생명을 빚진 은인에게 어떻게든 최고의 대우를 해 주고 싶었다. 그를 위해서라면 아들이 장성한 이후 한 번도 데우지 않은 목욕물을 데우고 그를 위해 새 이불을 깐 침대방도 기꺼이 내어 주고 싶었다.

자미에 포드의 마음에 카르낙은 더 이상 떠돌이 투로가 아니었다. 뛰어난 검술을 지니고 자신의 아내를 진심으로 아낄 줄 아는 고귀한 기사였다. 부려야 하는 하인이 아니라 마땅히 귀한 대접을 받아야 할 귀객으로 대접해야 마땅했다.

“됐어요, 포드 부인. 성치 않은 자신의 몸이나 잘 돌보세요.”

“오늘이니 해 주는 거예요. 신세를 졌으니까. 이런 대우를 나한테 언제 또 받아본다고.”

자미에 포드가 비죽거리며 투덜댔다. 릴리는 이 상황이 우스워 짐짓 입꼬리를 당겼다. 제 기분을 숨기려 해지만 비어져 나오는 미소는 숨길 수가 없었다. 다행히 눈치 챈 이는 없었다.

“그런 대우는 나중에 내가 왕관이라도 쓰면 하시죠.”

“미쳐도 단단히 미쳤네요, 이스바.”

그 무슨 해괴망측한 소리냐는 듯, 자미에 포드는 당장 그 말을 반박했다. 포드 부인은 그가 진정 누구인지 알지 못하니 너무나 당연한 반응이었다. 카르낙은 그녀의 입에서 걸은 소리가 나오니 그제야 만족한 듯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 문을 나섰다. 자미에 포드는 그가 집을 나서자마자 허리에 손을 얹고 눈동자를 굴렸다.

“정말이지 무뚝뚝하기 그지없는 작자야.”

기껏 건넨 부드러운 호의가 딱딱하게만 돌아오니 그녀는 속이 상했다. 릴리는 남편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서며 그녀를 위로 했다.

“부끄러움이 많은 사람이라 그래요, 부인. 실례할게요.”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한번 어루만져 주고 릴리는 몸을 돌려 촛불이 담긴 유리잔과 보슬보슬하고 깨끗한 튜닉과 바지 그리고 린넨 천 몇 장을 주워 집을 나섰다.

서둘러 걸음을 옮기다보니 조금씩 주위가 밝아지기 시작했다. 저 멀리, 지평선 아래로 천천히 해가 떠오르고 있음을 릴리는 느낄 수 있었다. 새까만 밤하늘이 푸른색과 카르낙의 눈동자를 닮은 청아한 보라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이 아름다운 색을 따라 이윽고 붉고 강렬한 태양이 세상을 비추기 시작할 터였다. 그 뜨거움에 별들은 곧 자신들의 색을 감출 것이다. 그러고 나면 청명한 하늘 위로는 새하얀 구름과 끝없이 펼쳐진 하늘만이 가득하겠지.

그러니 이 어둡고 고요하고 평화로운 새벽, 동이 트기 전의 평화는 아주 찰나일 것이다. 릴리는 걸음을 재촉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피 묻은 튜닉을 벗고 있는 카르낙의 뒷모습이 보였다. 릴리는 멈추어 서서 촛불을 껐다. 굳이 불을 켜지 않아도 사방을 식별할 수 있을 정도로 밝았고 구태여 사방을 더 환하게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

다만 어스름한 빛에 굴곡진 그의 등은 그것만으로 충분이 아름다운 음영을 만들어 낸다고 생각했고 곧 그 생각에 아주 깊이 빠져들었다. 그러다가 카르낙이 바지마저 벗어 던지고 웅덩이 안으로 가라앉자 릴리는 곧 정신을 차렸다.

카르낙이 웅덩이를 잠시 헤엄치고 깊이 잠수할 동안 그녀는 곁으로 다가와 옷가지와 촛불을 내려놓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저기 어딘가에서 악어처럼 머리를 내밀었다. 곧 그는 파니릴리의 존재를 알아챘다.

“…….”

그러고는 정말 악어처럼 그는 눈만 내놓은 채 한참이고 제 아내를 주시했다. 물에 젖어 달라붙은 검은 머리가 꼭 검은 실크 커튼처럼 물 위에서 찰랑거렸다. 검은색 비단을 두른 악어는 그녀가 왜 따라 온 것인지 궁금해 하는 것 같았다.

“핏자국을 좀 닦아 줄까 하고요.”

릴리가 대답했다. 그러나 여전히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원하는 답이 아닌가? 아니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리고 깨끗한 옷가지랑 몸을 닦을 것도 가져 왔어요.”

“…….”

“그리고….”

릴리는 내려놓은 옷가지와 천을 뒤적거리며 할 말을 찾았다. 어쩐지 입술이 바짝 마르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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