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발 아래 은빛 눈-152화 (152/231)

152화

카르낙과 매짐은 달빛에 의지한 채 어둠 속을 걸었다. 이토록 새까만 밤 촛불 하나 없이 길을 나선 것이 매짐으로서는 처음이었다. 긴장과 함께 두려움이 엄습했다. 눈앞의 새까만 것들이 모두 자신을 덮치는 검은 괴물처럼 느껴졌다.

“이… 이스바 경.”

차마 앞에 나서지 못하고 카르낙의 뒤를 따라 걷다가 매짐이 그를 불렀다.

“…무사히… 무사히 어머니를 구해 올 수 있을까요?”

이제 막 성년이 된 스무 살 사내의 목소리에는 아직 자라나지 못한 소년의 것이 묻어 있었다. 카르낙은 스무 살 때의 자신을 떠올렸다. 그는 그때 왕이 되었다. 온몸에 피가 묻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인간이라기보다 살육에 미친 금수와도 같던 때였다. 분노란 광증에 미쳐 아무리 날뛰고 날뛰어도 그 갈증이 사라지지 않았더랬다.

나는 소년이었던 때가 있었나? 카르낙은 스스로에게 물었다.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소년이란 늘 ‘이스바’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때론 화를 내고, 겁쟁이라 비웃고, 그러다가도 때가 되면 저의 뜨거움을 식혀 주던 그늘 같던 소년.

“그러길 바라야지.”

카르낙은 뒤돌아보지 않고 답했다. 뒤이은 침묵이 꽤나 우울했다. 그는 말을 보탰다.

“너의 신에게 기도라도 해 보지 그래. 아마네스 여신은 앨버그인이라면 누구든지 자식처럼 품어 준다며.”

“…제 피의 반은 투로잖습니까. 이스바 경.”

“절반이라도 품어 주겠지.”

카르낙의 농담에 매짐이 소리 내어 웃었다. 긴장이 한풀 꺾인 것 같았다.

“저기입니다. 이스바 경.”

매짐이 손을 들어 멀리 푸줏간을 가리켰다. 사위가 어두운 가운데 그 주변만 밝았다. 감시를 위해 사방으로 횃불을 켜 둔 것이 틀림없었다. 도끼를 든 매짐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언젠가 눈앞의 기사처럼 멋진 검을 들고 싸우고 싶다는 꿈을 늘 품고 있었지만 막상 싸울 때가 오니 검을 들 용기가 나지 않았다. 다루어 본 적이 없는 것보다, 손에 익숙한 것이 나을 것 같아 그는 칼 대신 손에 잘 익은 도끼를 선택했다.

게다가 포드가의 대장간에는 애초에 기사의 검 같은 칼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대부분 짐승을 도축하거나 사냥할 용도로 쓰는 칼과 쟁기 따위의 농기구였다. 개중 엇비슷하게 보이는 칼도 있긴 있었지만. 그래 보았자 빛 좋은 개살구 아니던가.

카르낙이 몸을 더 숙이고 보폭을 좁혔다. 매짐도 그를 따라 몸을 바짝 숙였다. 카르낙의 민첩한 발걸음이 깃털처럼 가벼웠다. 저 크고 무거운 덩치가 어찌 이렇게 재빠른가. 매짐은 그의 기민함에 감탄하였다. 첫눈에 그의 남다른 풍모에 대해서는 알아보았다. 그리고 지금은 아마 자신이 알고 있는 것보다 그가 더 대단한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노라, 매짐은 확신했다.

카르낙은 나무나 바위, 키가 큰 풀숲 등에 은신하며 푸줏간과의 거리를 좁혔다. 매짐도 뒤질세라 그를 따라 움직였다. 가슴이 너무 뛰어 심장이 입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들킬까 숨까지 참으니 버거운 호흡으로 가슴뼈가 쪼개질 것만 같았다.

카르낙은 커다란 바위 뒤에 자신의 몸을 숨기고 적들의 동태를 살폈다. 작고 외딴 마을에 왔기 때문인가 놈들에게 긴장감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만일을 위해 횃불만을 밝혀 두었을 뿐, 저들끼리 모여 앉아 질 나쁜 맥주에 훈제한 고기를 안주 삼아 질펀한 술자리를 갖고 있었다. 한 명은 자신의 검까지 의자에 기대어 놓았다. 그가 카르낙의 병사였다면 그 자리에서 목이 날아갔을 것이다.

모닥불 위로 큼지막한 고깃덩어리들이 꿰인 꼬챙이가 돌아갔다. 작대기를 돌리는 자의 안색이 파리했다. 그 옆에서 맥주와 요리를 나르는 여인 둘의 얼굴도 마찬가지였다. 어두운 밤중에도 한눈에 알아볼 만큼 핏기가 가신 낯빛이 꽤나 닮아 한눈에 보기에도 모녀지간임을 알 수 있었다.

“매짐.”

카르낙이 단도의 위치를 확인하려 허리춤을 매만지며 그를 불렀다.

“네. 이스바 경.”

“내가 놈들을 처리할 테니 네가 주민들을 데리고 가.”

“제가요?”

“그래. 비명을 질러 온 동네를 다 깨우기 전에 말이야.”

아아, 매짐은 그제야 카르낙의 말을 이해했다. 자칫 일이 더 복잡해지면 안 될 테니까.

“네. 알겠습니다.”

매짐의 대답에 카르낙은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는 몸을 움직였다. 바람이 일 만큼 쏜살같은 몸놀림이었다. 매짐은 넋을 빼고 그 자리에 앉아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눈을 들었다. 이스바 경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가늠도 못 하고 있는데 그가 푸줏간의 뒤편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더니 소변을 누러 무리에서 이탈한 병사 하나의 목을 땄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목에서 피가 흘러내리는 동시에 커다란 덩치의 남자가 바닥으로 쓰러지는 모습은 비현실적일 지경이었다. 카르낙은 사내의 시체를 어둠 속으로 밀어내고 나무 벽으로 바짝 몸을 붙였다.

그는 호흡을 고르며 동시에 단도에 묻은 피를 제 허벅지께에 문질러 닦아 냈다. 익숙하다 못해 인이 박인 것 같은 행동이었다. 매짐은 그의 몸에서 아지랑이처럼 피어나는 무언가를 보았다고 확신했다. 마치 뜨거운 태양 아래에 작렬하는 일렁임 같은 것을 말이다.

이제 남은 적의 인원은 셋. 누구 하나 일어설 기미 없이 왁자지껄 한가운데 카르낙이 다시 상체를 숙이며 이동했다. 무리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카르낙은 더 기다리지 않고 나머지 인원을 기습하기로 마음먹은 것 같았다.

매짐도 그를 따라 이동했다. 마음 같아서는 놈들 중 하나를 찌를 때 자신도 한 놈의 등 뒤에 도끼날을 박아 주고 싶었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로 그를 ‘돕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욕심부릴 수 없었다. 살인의 경험조차 없는 저가 나섰다가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싶진 않았다. 무엇보다 모친의 목숨이 달린 일이 아니던가.

카르낙은 소리 없이 다가가 한 놈의 등 뒤로 긴 칼을 찔러넣었다. 맥주를 들이켜던 병사가 난데없이 술과 함께 피를 뿜어 댔다. 등을 관통한 칼날이 가슴을 뚫고 나왔다. 그것을 본 나머지가 술잔을 던지며 혼비백산했다. 카르낙은 발로 이미 숨이 다한 사내의 등을 밀어 검을 그의 가슴에서 뽑아냈다. 핏물을 뿜으며 놈은 바닥으로 쓰러졌다.

선혈이 낭자한 카르낙의 검은 공중으로 반원을 그리며 들렸다가 가로로 선을 그리며 허공을 갈랐다. 동시에 칼을 추켜들며 자리에서 일어선 사내의 머리통이 그의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투르르르, 동그란 것이 바닥을 허망하게 구르기 전에 매짐은 정신을 차리고 모닥불 근처로 다가갔다. 혼비백산하여 비명을 지르려던 주민들에게 그는 검지를 추켜들며 ‘쉬’ 소리를 냈다. 낯익은 자의 등장이었다.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매짐은 가장 가까이 있는 자의 옷깃을 끌어당겼다. 아직 반쯤 넋이 나간 그의 몸이 휘청거렸다.

남은 적은 한 사람, 놈은 칼을 찾아 더듬거리다가 의자에 받쳐 놓은 검을 바닥으로 떨구고 말았다. 정신없이 그것을 집어 들려는데 별안간 발이 날아들어 놈의 얼굴을 강타했다. 코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놈은 포물선을 그리며 뒤로 발라당 넘어갔고 카르낙은 그의 가슴팍에 칼날을 박아 넣었다. 그러고선 각혈하며 사지를 떨다가 바닥으로 축 늘어졌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동작으로, 숨 한번 흐트러뜨리지 않고 카르낙 발투만은 장정 셋을 순식간에 제거해 버렸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매짐은 경악을 하는 동시에 자신이 맡은 임무를 되뇌었다. 겁에 질린 주민들을 안전하게 대피시키는 것.

“따라와요.”

매짐이 다시 한번 주민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그의 독촉에 사람들은 하던 것들을 손에서 놓고 허겁지겁 매짐을 따랐다. 매짐은 그들을 어둠 속으로 이끌어 커다란 바위 뒤에 숨겼다.

죽은 푸줏간 주인의 아내와 그의 장성한 아들, 그리고 난데없이 끌려와 고기를 손질하던 자는 그 바로 옆집에 기거하던 이였다. 그에겐 아내와 아직 젖먹이인 어린 아들이 있음을 매짐은 잘 알고 있었다. 비록 모두가 등한시하는 대장간의 아들이나 또한 한동네에 사는 이웃이 아니던가.

“…아내와… 아이에게 가고 싶소.”

거친 숨을 들썩이며 남자가 말했다. 매짐은 그의 부탁에도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안 돼요. 자칫 모두가 위험해질 수 있어요.”

아직 상황은 끝나지 않았다. 푸줏간 내부에 해치워야 할 병사들이 남았다. 게다가 무엇보다 모친이 그 안에 있었다. 그녀를 무사히 구출해 내는 것까지 도와야 모든 일이 마무리될 것이다.

“저, 저 남자는 누구요?”

남자는 카르낙에 대해 물었다. 귀신같이 나타나 홑몸으로 무장한 군인 넷의 몸을 순식간에 가른 이에 대한 공포가 물씬 풍겼다.

“분명 투로예요. 그렇지, 매짐?”

남편을 잃은 푸줏간 안주인은 장성한 제 딸자식을 부둥켜안고 덜덜 떨면서도 확신에 찬 음성으로 말했다. 호기심은 목숨이 경각에 달린 때에도 그 성질을 숨기지 못하는 것 같다. 별로 대답하고 싶지 않아 매짐은 도끼를 고쳐 들며 그들에게 경고했다.

“여기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말아요. 내가 나오라고 할 때까지 절대로요. 알겠죠?”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놈들이… 남편을 죽였어.”

푸줏간의 안주인은 울음을 터트리자 품에 안겨 있던 딸아이도 함께 울음을 터트렸다. 매짐은 ‘쉬’ 하고 검지를 들어 입가에 댔다. 살았다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엔 아직 일렀다. 아직 제거해야 할 적들이 있었고 카르낙과 마찬가지로 매짐의 전투도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다시 돌아올게요. 쥐 죽은 듯 계세요. 아셨죠?”

매짐이 대답을 종용하자 여자는 조금 진정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매짐은 카르낙을 돕기 위해 푸줏간으로 향했다. 그가 어떤 방식으로 내부에 침입할지 궁금했다. 대문을 활짝 열고 들어가는 무식한 방법은 택하지 않을 것 같았다.

매짐이 막 푸줏간의 앞에 도착했을 때 카르낙은 미리 준비해 둔 지푸라기 한 뭉치를 꺼내 끝에 불을 붙였다. 매짐은 순간 카르낙이 이 푸줏간을 아예 불태워 버리려는 것은 아닐까 겁이 났다. 한번 타오르기 시작한 불은 쉽사리 꺼지지 않고 옆으로. 앞으로, 뒤로 옮겨붙을 것이 자명했다. 설마, 그는 병사들을 죽이기 위해 마을 사람 모두의 목숨을 담보로 삼으려는 걸까 덜컥 불안이 몰려오기까지 했다.

그러나 카르낙은 지푸라기가 자작하게 타오르자마자 그것을 흔들어 불씨를 모두 꺼뜨렸다. 그러자 반쯤 타들어 가던 것들이 희뿌연 연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매짐은 그제야 그의 심중을 알아차렸다. 그는 자신이 내부로 쳐들어가는 대신, 내부의 적을 밖으로 유인해 내기로 결정한 것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