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카르낙은 아내의 속이 타들어가고 있다는 것은 까맣게 몰랐다. 제 아내는 늘 예쁜 어투로 애정 어린 걱정을 뱉어 내곤 했고 지금도 여느 때와 다를 것 없다고 믿고 있었다. 언제나 상냥하고 자비로운 파니릴리였다. 그는 어깨를 한번 으쓱했다.
“걱정 마. 난 아무리 밟아도 죽지 않는 투로잖아?”
릴리에게는 성의 없는 대답으로 보였다. 그러나 길란과 매짐은 웃었다. 미안함과 안쓰러움이 섞여 있다 하여도 그의 말을 유머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렇지 못한 것은 릴리 하나뿐이었다. 그녀는 초조함에 목이 타들어갔다. 혹여 다른 방법은 없을까? 조금 더 안전하고 그럴싸한 방법.
“그냥, 그냥 기다리는 것은 어때요? 부상을 회복하면 조용히 떠날 수도 있잖아요.”
“이미 사내 둘을 죽였어. 조용히 빠져나갈 생각이었다면 그런 짓을 저지르지도 않았을 거야.”
“만약 자칫 병세가 악화되어 죽기라도 하면…. 그땐 어머니의 목숨도 장담하지 못해요.”
카르낙의 말을 매짐이 거들었다. 모친의 안위를 위한 그의 초조함을 릴리는 이해했다. 그가 인내하길 바라는 것은 사치였다. 그 인내로 얻을 수 있는 것이 불확실한 상황에서는 더욱 그랬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 차라리 포드 부인 대신 자신이 잡혀 갔더라면 모든 일은 더 쉬워졌을까. 그래. 아마도 그랬으리라.
지금이라도 포드 부인과 자신을 맞바꿀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다. 그녀를 안전하게 돌려보내 줄 순 없을까? 더는 말썽 없이 순순히 이곳을 떠나 줄 수는 없을까? 원하는 것을 얻고 나면 그걸로 만족하고 나머지는 그대로 두면 안 될까?
‘필요한 것만 취한다’. 그 단순하고 쉬운 방법이 어째서 이 엘버그 대륙에선 통하지 않는 것일까. 왜 모두 더 욕심내어 모든 것을 망칠까.
자칫 잘못하여 모든 것이 망가질 수 있었다. 포드 부인을 구해내지 못하고, 카르낙이 죽고, 그치들은 자신들을 공격한 것에 분노하여 마을사람들을 모조리 죽일 수도 있었다. 매짐도, 갈란도 그 칼날을 피하지 못하고 어쩌면 자신조차 죽을지도 몰랐다. 차라리 그편이 속이 편하리라. 모두가 죽고 저 혼자 살아남는 것이 가장 최악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그렇게 발투만 왕가는 끝이 나겠지. 이름도 제대로 없는 오지 마을에서 누군지도 모르는 낭인들의 손에, 무덤도 없이 쓸쓸하게.
끔찍해. 너무 끔찍한 일이다. 이 자리에 핀이 있었다면, 로로가 있었다면, 에이가가 있었다면, 누군가 이곳에 있는 사내가 ‘이스바’가 아니라’ 카르낙 발투만’이라는 사실을 아는 자가 있다면 이런 터무니없는 계획을 세우도록 놔두었을 리 없다. 자신의 목숨을 걸고 반대했으리라.
그러면, 그러면 자신은? 명목상은 그의 아내이나, 이미 왕에 의해 그를 떠나기로 결정되어 버린 자신은? 엘버그의 사람이지도, 더는 그의 아내이지도, 더하여 엘버그의 왕비이지도 않을 자신은 이런 때 어떤 것을 결정해야 할까.
그를 말린다 하여 그 대안을 내놓지도 못하는데, 그 대신 칼을 쥐고 적진으로 뛰어들지도 못하는데 말이다. 이런 상황에 그 어떤 도움도, 희생도, 가치도 되지 못하는 자신이 릴리는 무기력하고 한심하게 느껴졌다.
자신이 카르낙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때란 사방이 태평하고 모든 것이 안전하고 모두가 평화롭고 풍족할 때뿐이었다. 그때가 되어서야 쏟아 낼 수 있는, 잡히지도 않을 허무맹랑한 조언들. 그가 살아온 인생과 너무나 동떨어진 도덕과 사랑에 대한 모호한 이야기들을 꺼내 놓을 수 있었다.
그를 위한답시고 통하지도 않을 이야기들을 얼마나 많이도 늘어놓았던가. 이렇게 추락해서 살아가고자 투쟁해야 할 때가 오면 강하지 않고는, 잔인하지 않고는, 비정하고 날카롭지 않고는 제 목숨조차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데 말이다.
그러므로 칼을 들고 싶었다. 방법이 오직 그것뿐이라면 차라리 함께 칼을 들고 싸우고 싶었다.
“제가 먼저 마을의 동태를 살피고 올게요.”
매짐은 그들이 기거하는 집안으로 들어가 한바탕 난장을 치룰 생각이었다. 어머니를 돌려 달라 발광을 해대면 그들이 몇인지, 누가 우두머리인지, 어떤 자가 부상을 당했는지, 무기는 얼마나 가지고 있으며 어떤 사람들인지 대강 알 수 있을 터였다. 그렇게 몇 대 얻어터지고 난 후 이곳으로 돌아오면 된다. 누구도 그의 행동이 이상하다 생각하지는 못하리라. 그 후엔 이스바 경을 따라 칼을 쥐고 어머니를 구하러 가면 될 테지.
“괜찮겠어?”
길란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아들을 보았다. 매짐은 확신에 차 있었다. 젊은이답게 투지 같은 것이 불타오르는 것 같았다.
“어머니의 목숨이 달린 일이에요. 지금이야말로 당신의 아들이 진정한 사내답게 행동해야 할 때입니다. 그러니 염려 마세요.”
단단히 각오한 듯한 매짐의 목소리에 길란의 얼굴이 어두웠다. 그의 얼굴에서 근심과 두려움을 읽은 카르낙은 눈앞의 어린 청년, 매짐에게 물었다.
“검은 쓸 줄 알아?”
“배운 적은 없지만 칼질은 익숙합니다. 그러니 사람을 베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어요.”
매짐은 고개를 저었으나 자신감은 가득해 보였다. 글깨나 읽은 이들이라면, 혹은 명예와 품위를 아는 명망 있는 가문의 사람이라면 아들의 패기와 자신감을 칭찬하며 사내답게 맞서고 오라 그의 등을 두드려 주었을 것이다. 아들의 드높은 이상은 곧 가문의 명예이자 그 유산일 테니.
그러나 하잘것없는 초라한 신분인 자들에게 지킬 것이라고는 제 품으로 낳은 자식뿐이었다. 그 외에는 지켜야 할 것이 없어서 어미를 구하러 떠나겠다는 아들의 등을 두드려 줄 수는 없었다.
자식의 목숨을 위해서라면 설령 그것이 비열하고 비겁한 짓일지라도 스스럼이 없었다. 그래서 길란은 제 아들을 만류하고 싶었다. 혹시 아내를 잃고, 거기에 더해 너까지 잃으면 어쩌느냐며 나서지 말라 붙잡아보고 싶었다. 아내라면 필시 그렇게 했으리라.
그러나 본디 타고나길 사내로 타고나서일까, 길란은 아들을 붙잡을 수가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걱정과 근심으로 그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기보다 무사히 돌아오라며 담담한 얼굴로 그를 배웅하고 싶었다. 그러나 길란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서 입을 꾹 다물 뿐이었다. 얄팍한 입술에 힘을 주어 주름이 파일 정도로 세게.
한 시간을 채 넘기지 않고 마을로 향했던 매짐이 돌아왔다. 어딘가 쥐어 터져 험한 꼴로 돌아올 줄 알았지만 다행히 그의 사지는 멀쩡해 보였다. 그는 긴장이 한시름 가셨는지 가죽 물주머니를 꺼내 다급하게 목을 축였다.
“어때요?”
릴리가 조급함에 기다리지 않고 물었다. 매짐은 꿀꺽 물을 삼키고 손등으로 입을 훔치며 답했다.
“사내 둘을 죽여서인지 더는 말썽을 일으키고 싶지 않아 보였어요. 놈들 중 하나가 심한 고열과 구토에 시달리고 있는 것 같대요. 모두 전염병일까 무서워해요. 어머니는 마을 푸줏간에서 병자를 돌보고 있고 밖을 지키는 자가 넷, 나머지 넷은 모두 집 안에 있다고 했어요. 오자마자 고기와 맥주를 동내고 있대요.”
당연한 이야기다. 머무는 곳이 푸줏간이라면 더욱 그렇다. 머지않아 그들은 이 마을 사람들의 다른 식량을 축낼 것이다. 더는 얻을 것이 없으면 떠나겠지. 소속이 없는 군인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노략질밖에 더 있겠는가.
릴리는 혹여 그들이 멀루아에서 탈출한 군인일까 생각했다. 그러나 고열과 구토라면 그곳의 풍토병과는 증상이 전혀 달랐다. 어쩌면 제법 지독한 고뿔 혹은 그저 앓고 지나가는 고열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만에 하나 전염병이라면 그를 돌보는 포드 부인 역시 위험한 상황이었다.
때가 안 좋았다. 극심한 가뭄, 그 이후의 폭풍, 그로 인해 시작된 기근. 이 상황에 병이 돌기 시작하면 살아남을 자가 없다. 그러나 재앙은 늘 한꺼번에 덮친다. 마치 둑이 무너지길 기다린 것처럼 말이다. 릴리는 자연이 되돌려 주는 인간의 죄악에 대해 생각했다. 그 중 자신의 가문은, 자신의 몸에 타고 흐르는 핏줄의 죗값은 얼마나 될까. 제 몸의 피를 다 뽑아내도 결코 그를 잠재울 순 없으리라.
“여덟….”
카르낙이 조용히 사내들의 수를 읊었다. 놈들이 뭉쳐있지 않을 때를 노려야 한다. 흩어져 있을 때 다가가, 한 놈씩 처치하면 되리라. 그 후 실내에 들어섰을 때가 문제다. 놈들은 넷이나 되었고, 밖의 일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을 때엔 그보다 많은 수를 저 혼자 상대해야 했다.
“작은 단검이 여러 개 필요해요. 그것이 안 되면 손도끼라도요. 무게는 상관없습니다. 날카롭고 어디든지 특히 사람의 뼈에 잘 박힐 정도면.”
길란은 카르낙의 주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카르낙은 매짐을 보았다. 그에게 자신의 흉갑이라도 줘 볼까 생각했지만 그의 덩치와는 맞지 않았다. 몸에 맞지 않는 흉갑은 오히려 움직이는데 방해만 될 터. 하나뿐인 외아들을 황망히 잃게 하고 싶지 않지만 지금 같은 때에는 고사리손이라도 필요했다. 게다가 모친에 대한 일이니 자식이라면 응당 해야 할 일이기도 했다.
그 후 카르낙의 시선은 릴리에게 향하지 않았다. 어쩐 일인지 그녀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릴리의 곧고 바른 시선을 피하고 싶었다. 혹여 그 맞닿는 시선에서 그녀의 감정이나 생각을 반추하게 될까 겁이 났다. 부끄럽거나 비난받을 짓을 하는 것도 아닌데 왜 그런지 알 수 없었다.
하늘에 반쯤 가려진 달과 별이 떴다. 어두운 동굴 안에 촛불을 모두 끄자 찰나의 어둠이 내려앉았고 카르낙이 나뭇가지를 걷어내자 어둠 위로 달밤의 볕이 들었다. 신비롭고 은은한 빛이었다.
카르낙은 제 허리춤과 손목, 정강이에 넣어 둔 단검들을 매만져 확인하고 매짐을 향해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때가 되었다는 표시였다.
사위가 어두워지고, 그곳에 남은 이들은 그들뿐임에도 누군가에게 들킬세라 숨을 죽이고 움직였다.
카르낙은 어둠속에 남아 메마른 얼굴을 하고 있는 노인, 길란에게 고개를 움직여 인사했다. 희망이나 확신은 없는, 그러나 분명 단단하고 곧은 시선이었다.
그 후 카르낙은 어렵게, 아주 어렵게 릴리를 보았다. 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눈동자는 고요히 일렁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