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최근 머리를 모두 밀어 멀리서도 유독 눈에 잘 띄었다. 카르낙은 서둘러 삽을 놓고 손을 털었다.
혹시나 대장간에 마을 주민이 와 릴리와 마주칠까 걱정이 되었다. 엘버그에서 민머리의 여자는 흉보기 딱 좋은 대상이었고 그치들이 릴리를 보면 수군거릴 것이 분명했다. 그 꼴은 못 보지. 죽는 한이, 아니 죽이는 한이 있어도 못 본다.
카르낙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릴리가 ‘아’ 하며 아는 체를 하기도 전에 그는 릴리의 손에서 묵직한 바구니를 낚아채어 갔다.
“날 불렀어야지.”
걱정이 되어 하는 소리임에도 퉁명스럽게 튀어나왔다. 릴리가 멋쩍게 웃어 보이자 카르낙은 그제야 제 행동을 후회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아져야 하는데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더 벽이 생기는 것만 같았다. 이대로 영영 멀어져 버리는 것이 돌이킬 수 없는 수순이라고 받아들여야만 할 때가 온 지도 모른다.
“식사 때가 되어도 돌아오질 않아서 포드 부인께서 먹을 것을 가져다주라 하셨어요.”
그러고 보니 사위가 어둑했다. 노을이 지고 있던 것은 분명 알았는데 벌써 이렇게 늦었을 줄은 몰랐다. 이곳에 와 길란의 일을 도우며 시간이란 것이 이토록 빨리 간다는 것을 처음으로 느꼈다.
“불렀으면 분명 내가 갔을 텐데….”
“그렇게 오나, 이렇게 오나 어차피 누군가 와야 하는 거잖아요.”
“달라.”
당연히 다르다. 이제야 조금씩 체력을 회복하고 있는데, 이 무거운 바구니를 들고 오다 넘어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간신히 제구실을 하는 팔이 어디 뼈라도 다치거나 관절이라도 상하면 어쩌려고. 그냥 산책을 하다가 풀이나 꽃 같은 걸 따 오는 정도가 딱 좋았다. 포드 부인도 아내의 상태를 생각해 적당히 눈치껏 그녀를 부리고는 했다.
그런데 왜 보리 맥주가 가득 든 이런 무거운 것을 들려 보냈는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어쨌든 이런 일은 용납할 수 없다. 릴리의 몸이 어서 멀쩡해져야 리오에 갈 방법을 모색할 수 있다. 그렇게 리오에 가야 핀을 만날 수 있고 또 릴리를 그라타로 보낼 수 있다. 그리고 테이먼 테르조에게 이 값을 치르게 하리라.
릴리는 씩씩대며 앞장서는 카르낙의 뒤를 따르며 말했다,
“부인께서 저도 함께 먹고 오래요.”
“대장간에서?”
“네.”
카르낙은 그녀의 말을 곰곰이 곱씹다가 내뱉었다.
“‘부인께서’라. 당신의 입에서 그런 존칭이 나오다니 좀 어색하네.”
얼마 전까지 이 나라의 모든 이들이 그녀에게 극존칭을 사용하였다. ‘전하께서, 부인께서, 왕비 전하께서’란 말을 듣는 이는 릴리뿐이었고 그보다 높은 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때문에 카르낙이 아는 한 릴리는 누구도 존대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까.
“그런가요? 하지만 전 엘버그에 온 1년여를 빼고는 평생 존칭을 써 왔는걸요. 그래서 익숙하고 편안해요. 누구도 나를 어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요. 궁에서는 모두 날 어려워했고 그래서 나 또한 그들을 대하기가 어려웠거든요.”
릴리는 걷는 제 발자국을 세며 말을 이어갔다.
“지금은 누구도 나를 어려워하지 않아서 좋아요. 내게 다정하게 말을 걸어 주기도 하고, 도움이 필요할 때 기꺼이 내게 부탁도 하고요. 누군가는 나를 필요로 하고 그래서 나를 인정해 주는 기분은 정말 오랜만에 느껴 보거든요.”
나 역시 네게 다정하게 말을 건넸어. 네가 모를 뿐이야. 네가 나의 다정함 같은 것을 깨닫지 못했던 것뿐이다. 그리고 여전히 내가 얼마나 너를 필요로 하는지 넌 모르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영원히 모르겠지. 그래도 네가 행복하다면. 릴리. 그것으로 된 거야.
“왕비로서의 삶이 즐겁지 않았다는 건 알아.”
또한 내가 아무리 너를 즐겁게 해 주려 노력해도, 내 곁에 붙들어 놓을 수 있는 행복을 찾아주려 해도 소용없었다는 것도 안다. 그리고 너는… 너는.
“당신은 내내 자신이 인형 같다고 여겼던 것 같아. 나를 돋보이게 해 줄 인형.”
“…….”
“그래서 외로웠을 테고, 영혼이 맞닿을 수 있는 사람을 찾고 싶었겠지. 나는 그게 혹 세바스탠이 아닐까 생각했었어.”
“왕실 대장간에 있는 스탠 말인가요?”
“응. 그놈.”
단순한 질투는 아니었다. 내가 채워 주지 못한 것을 그놈이 채워 줄까 두렵고 불안했다. 그를 볼 때 한껏 화사해져 빛나던 네 얼굴에 나는 몹시도 겁이 났었다,
“그는 그나마 날 친근하게 대해 줬어요. 또 내게 유리 공예를 알려 줬고 검과 철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이야기해 주었어요. 난 그런 것을 좋아해요. 새로운 것을 배우는 거, 새로운 것을 아는 거. 직접 만지고 느끼고 보며 경험해 보는 그런 것들이요.”
카르낙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리오의 새로운 길드장 오르티스가 가지고 온 석양의 열매를 보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정말 기쁘고 힘이 넘쳐 보였더랬다.
언젠가 그녀가 다시 그런 모습을 찾기를 원한다. 그것을 목격하지 못해도 괜찮았다. 그 모습을 떠올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어느새 둘은 대장간에 당도했다. 매짐이 기다리지 않고 뛰어와 그의 손에서 바구니를 빼앗다시피 받아들었다. 얼굴빛이 환한 것이 무척 배가 고팠던 모양이었다.
“어머니가 보내신 저녁거리네요. 그렇죠, 이스바 부인?”
릴리는 부드럽게 웃었다.
“네 맞아요. 부인께서 가져다주라고 하셨어요.”
“아버지, 식사 왔어요!”
길란이 무두질을 하듯 두껍고 거친 가죽에 문지르던 카르낙의 단검을 작은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일어섰다.
매짐은 벌써부터 대장간 한가운데 바구니의 내용물을 늘어놓고 있었다. 치즈, 빵, 맥주에 몇 가지 과일까지 한가득이었다.
“이 무거운 것을 혼자 들고 온 거요?”
길란이 아연한 표정으로 물었다. 저 가느다란 팔뚝으로 가져오긴 꽤나 버거웠으리라.
“네. 별로 멀지 않아서요. 수월하게 왔어요. 또 남편이 도와주었고요.”
그 대목에서 포드 부자는 씨익, 입가를 올리며 은밀하게 웃었다. 릴리는 그들의 반응이 의아했고 카르낙은 그런 분위기가 불편하여 짧게 숨을 뱉으며 양손으로 제 허리를 집었다. 괜스레 바지를 조금 추켜올리고 제 코끝을 훔치기도 하였다.
“같이 드시겠어요?”
보따리를 다 푼 매짐이 릴리에게 물었다. 마침 반가운 소리였다. 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물론이죠.”
매짐이 아버지 쪽으로 더 붙으며 릴리의 자리를 만들어 주었고 그녀는 남편의 곁에 앉으며 대장간을 둘러보았다. 무두질을 할 수 있는 작은 움막, 곳곳에 놓여 있는 크고 작은 테이블에는 온갖 연장과 쇠들이 가득했다. 그 맨 끝에는 지글지글 타오르는 화로와 벌겋게 타오르는 숯덩이들이 자리했다. 제법 익숙한 풍경이었다. 또한 좋아하는 풍경이기도 했다.
“이곳은 쇠만 다루나요?”
매짐은 릴리의 잔에 맥주를 채워 주고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요. 부인. 저희는 쇠도 다루고 근근이 가죽도 다루고 있어요.”
“가죽이라면….”
“동물 가죽을 깨끗하게 손질해서 사람들에게 팔지요. 그걸로 허리띠도 만들고. 가방도 만들고, 옷도 만들고, 모자도 만들고, 아주 쓸 데가 많은 물건이에요.”
“그러면 혹시 사냥도 하시나요?”
“사냥이요? 네. 하죠. 가끔은 동네 사람들이 잡아 와 가죽으로 만들어 달라기도 하고 사람들이 많이 찾을 때는 아버지와 둘이 숲에 나가 사냥을 해 오기도 해요.”
“사슴이나, 토끼 같은 동물들이요?”
“네. 맞아요. 사슴, 토끼, 날이 추울 땐 늑대의 가죽이 아주 인기가 많아요. 가죽이 있는 동물이라면야 무엇이라도 돈벌이죠.”
“사람의 가죽은요?”
풉, 하고 카르낙이 먹던 맥주를 뿜었다. 여인의 입에서 나오기엔 지나치게 잔인한 이야기 아닌가! 매짐도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몇 번이나 깜빡였다. 그러고선 얼떨떨하여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런 것은 한 번도….”
설마, 설마 그라타 이야기는 아니겠지. 제발 그라타 이야기는 하지 마. 제발 거기서 사람을 죽여 가죽을 벗기는 게 관습이었단 이야기를 할 거라면 하지 마. 노인과 청년이 결혼한다거나, 여러 사람과 결혼이 가능하다거나 그런 이야기를 했듯이 제발 이 자리에서 그라타 이야기는 안 돼.
카르낙은 여차하면 그녀의 입을 틀어막을 기세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렇군요.”
다행히 릴리는 그쯤에서 물러났다. 벌어진 입 안에 무상한 손길로 치즈 조각을 가져가는 것을 보며 카르낙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새삼스럽다.
본래 이런 여자였던 것을, 엘버그의 사람들과는 완전 다른 정신을 가진 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문뜩 몰랐던 것을 깨달은 듯 행동하는 자신의 모습이.
“자네는 어떤가, 이스바? 사람 가죽을 본 적이 있는가? 가령 가죽이 벗겨진 투로나, 혹은 그런 소문이나… 사막에서 떠도는 이야기 같은 거.”
입을 열기 전에 카르낙은 조금 뜸을 들였다. 그러나 숨기는 것도 이상하다 생각되어 그는 곧 대답했다.
“예전에 들은 적은 있어요. 알기어스 왕이 몇몇 사람의 가죽을 벗겼다고요. 특히나 투로의 가죽은 질기고 부드러워 왕이 아주 좋아한다고 했지요.”
“누구에게 전해 들었나?”
“유반 하게너. 한때 우린 그의 소유였거든요. 그리고 그는 왕의 소유였지요.”
릴리가 치즈를 툭, 떨어트렸다. 태연하려 애쓰려는 걸까 냉큼 잔을 집어 들었지만 찰나의 순간 그녀의 손마디가 떨렸고 카르낙은 그것을 보았다.
알기어스 왕. 하게너 가문. 모두 릴리와 관련이 있는 것이었다. 정확히는 그녀의 몸에 흐르는 피와.
“그래. 나도 들은 적이 있어. 워낙 끔찍한 이야기라서 말이야. 어리고 예쁠수록 좋아했다더군. 남녀를 가리지 않고.”
매짐은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들을 싸잡아 천박한 욕이라도 내뱉을 만하건만 무슨 연유에서인지 릴리의 눈치가 보였다. 그녀의 표정이 너무 좋지 않았다. 사람 가죽 이야기를 먼저 꺼낸 것은 그녀인데, 갑자기 겁에 질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렇다고 여느 엘버그의 부인들처럼 끔찍하여 놀란 것도 아닐 텐데.
매짐은 분위기를 풀어 볼 요량으로 가볍게 웃으며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이스바 부인께선 뭐 들으신 이야기 없으신가요? 전 사람 가죽 이야기는 처음 듣거든요.”
“저는….”
“아내는 워낙 호기심이 왕성해서….”
카르낙이 수습하려 했지만 릴리가 말을 이었다.
“책… 책에서 봤어요. 그, 그런 관습이 엘버그에 있었다고. 잘못된 기록이었나 봐요.”
그 책에서는 엘버그의 하층민들의 관습이라 하였다. 배우지 못해 무지하고 궁핍한 자들이 감히 아마네스 여신의 자식인 인간의 가죽을 벗겨 비싼 값에 내다 팔고는 한다며. 특히나 투로들은, 여신의 저주를 받은 그자들의 썩은 영혼은 기꺼이 자신들의 배를 채우기 위해…. 거기까지 떠올리다 릴리는 도리질치며 그 생각을 떨쳐 버렸다.
그 구절에서 그녀는 고통을 느꼈었다. 가난하고 배고프고 꿈도 희망도 없는 처절한 삶을 어떻게든 이어 가기 위한 선택이라고, 비정한 선택이나 비난할 수는 없다고. 그라타에서 이미 진저리 나게 들었었다. 사람의 인육을 먹는 부족의 이야기, 그 가죽을 벗겨 신에게 진상했던 종교들에 대한 이야기. 그러니 놀랄 것도 없었고 무서울 것도 없었다. 사실 그 모든 것이 제 아비와 제 어미가 속했던 가문의 이야기가 아니라면.
배가 고파서도, 무언가를 숭배해서도, 지독한 삶을 이어 나가기 위해서도 아닌 그저 욕망하기 때문에 사람을 죽이고 그 가죽을 취했다는 이야기가 아니었다면.
그러고도 그것을 전혀 수정하지 않은 채 아직 엘버그의 서고에 떡하니 날조된 책을, 그것도 기록물로 남겨 두지 않았다면.
죄책감에 견딜 수가 없었다. 릴리는 잔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시 실례할게요.”
그러더니 서둘러 그곳을 벗어났다. 길란도, 매짐도 영문을 몰라 눈만 껌뻑이는데 카르낙이 짧은 욕설을 한번 내뱉고는 곧바로 그녀의 뒤를 쫒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