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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발 아래 은빛 눈-145화 (145/231)

145화

릴리는 조용히 웃었다. 카르낙과 닮아서인지, 그와 같은 투로여서인지 모르겠지만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되었어도 길란은 여전히 다부진 육체에 건강한 피부빛을 지닌 잘생긴 사내였다.

등이 굽지도 않았고 눈동자가 탁하지도 않았으며 웃을 때 드러나는 이조차 모두 하얗고 단단해 보였다. 언젠가 로로처럼 등이 굽을지도 모르겠지만, 여전히 길란은 노인보다는 건장한 중년의 남자로 보인다.

“좋은 분 같은데요. 따듯한 남편, 다정한 아버지로 보여요.”

“당연하지. 누구도 길란처럼 훌륭한 남편이 되긴 힘들 거야. 사내가 아내의 존경을 받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 줄 알아? 엘버그의 어느 여편네도 자기 남편을 존경하진 않는다고.”

맞는 말이다. 남편이자 엘버그의 왕인 카르낙을 믿고 헌신하고자 다짐했던 자신조차도 그를 존경해 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다만 제가 생각했던 것만큼 옹색한 사내는 아니구나, 그렇게 느낄 때마다 안도하고 기뻐했을 따름이었다.

“버들초는 빻아서 즙을 내면 되는 건가? 아니면 말려서 가루로 먹어야 하나?”

풀잎을 다 골라낸 포드 부인이 물었다. 릴리는 ‘아’ 소리를 내며 대답했다.

“뿌리는 우려서 차로 마시는 게 좋아요. 아니면 스튜나 요리를 할 때 육수로 사용해도 좋고요. 그리고 잎은 개어서 돼지기름과 섞어 고약을 만드는 편이 가장 좋을 거예요. 아픈 부위에 바르면 통증과 부기가 가라앉는대요.”

“고것 참, 쓸모 있는 놈이로세.”

릴리의 설명에 포드 부인은 혀를 차며 버들초를 이리저리 살폈다. 쓸모없는 잡초라고 여겼건만 의외였다. 그러나 그보다 더 의외인건 제 눈앞에 있는, 남편이 일컬어 ‘판’이라고 하는 이 여인이었다.

“멀루아엔 이 약초가 많았나 봐? 내가 알기로 그곳은 꽤나 척박한 땅으로 알고 있었는데.”

“…그냥 책으로만 봤어요.”

“그림으로만 몇 번 본 것을 구분한단 말이야? 이 흔하디흔하게 생긴 것을?”

사실은 캘던성에서 이미 질릴 만큼 보았던 약초이지만 털어놓을 수 없으니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러다 포드 부인이 저를 약초 찾기 영재라 생각하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다.

“아무튼 간에. 내 말 잘 들어. 판. 결혼 선배로서의 조언인데 지금같이 서먹한 관계로 부부 사이를 유지하기는 힘들어. 이미 결혼을 했고 아이를 잃었으니 파혼 같은 건 있을 수 없는 일이고, 귀족 영애가 아니고서야 남편과 갈라서는 것도 힘들어. 알잖아. 이 나라에선 남자의 보호 없이 여자 혼자 살기 힘들다는 거.”

릴리는 문뜩 로리아나를 떠올렸다. 천한 직업이지만 그녀가 겪어 본 이 중 누구에게도 귀속되지 않은 채 사내들을 부리며 사는 여인은 그녀 하나였다. 그녀가 곁에 있었다면 아마도 지금 같은 상황에 가장 많은 조언을 해주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카르낙과의 사이도 지금보다는 덜 서먹했으리라.

포드 부인은 버들초의 뿌리를 잘라 흙을 털어 내며 말을 이었다.

“사내들이란 본디 멍청하고 미련한 족속들이야. 누구보다 천치 같은 것들이 또 자존심은 강하다니까. 길란도 그래. 우직하고 성실하고 섬길 만한 남자이지만 종종 미련하고 천치같이 굴 때가 있어. 그럴 때면 내가 왜 이런 사내랑 결혼했나 속상해지기도 해. 그렇지만, 어쩌겠어? 내 남편이니 내가 보듬고 사는 수밖에 없잖아. 그러니 남편이 좀 마음에 안 들어도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해. 안 그러면 그 천치들은 평생 그렇게 멍청하게만 굴 거야. 내가 장담해.”

사내의 곁이 아니면 과년한 여인이 살아가긴 힘들고, 그렇다고 이제 와 없던 결혼으로 물릴 수도 없으니 미워도 고와도 그저 그 천치 같은 것들을 받아들이며 사는 수밖에 없다고. 그러니 새끼를 보듬듯 사내를 보듬으라고. 마음을 넓게 쓰라고. 포드 부인은 그렇게 충고를 했다.

릴리는 그녀의 말이 일리가 있다 생각하였다. 더는 자신의 마음에 카르낙에 대한 미움이나 원망도 남지 않았다. 다만 앞이 보이지 않을 뿐이었다. 그를 어떻게 보듬어 어떻게 다시 마음에 담고, 그에게서 기쁨과 희망을 얻어야 하는지. 그것을 찾을 수가 없었다.

땅거미가 다 질 때쯤에도 집안 남자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점심도 건너뛴 채였다. 포드 부인은 한참을 창가에서 서성이다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안 되겠어. 일이 너무 바쁜 모양이야. 내가 먹을거리를 좀 싸 줄 테니 대장간에 좀 가져다주고 너도 거기서 같이 먹고 와.”

“그러면 부인은….”

“네가 올 때까지 나도 배고파서 못 기다려. 혼자 느긋하게 먹을 테니 서둘러 대장간으로 가.”

포드 부인은 바지런히 바구니에 먹을 것을 챙겨 릴리의 손에 들려 주었다. 장정 셋을 먹일 양이어서인지 제법 묵직했다. 릴리는 떠밀리듯 집에서 나와 대장간으로 향하는 오솔길을 따라 걸었다. 사방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나무와 바람에 너울거리는 풀잎들, 그리고 산새의 그림자뿐이었다. 어느덧 귀뚜라미가 울기 시작했다. 조금 더 깊은 밤이 되면 반딧불이 꽁지에 불을 켤 것이다.

얼마 전까지 그녀가 보던 것은 썩어 가는 땅, 굶주리고 병약한 사람들, 어둡고 더럽고, 피비린내만 나는 것들이었다. 그와 같은 대륙에 펼쳐지는 이 평화는 그렇기에 더 소중하고 또한 슬펐다. 불길 속에서 타들어 갔을 그들의 비명이 귀뚜라미 날갯짓 함께 들려왔다. 환청임을 알면서도 고통을 피할 순 없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의식의 흐름은 카르낙에게 닿았다. 그에게 느껴지는 것은 분노가 아니었다. 원망도 아니었다.

제 멱살을 쥐고 흔들며 왜 그랬냐고 묻는 그는 분명, 슬픔과 괴로움에 조각나고 있었다. 그를 배신하는 행위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를 보며 그녀 자신도 부서지고 있다는 것에 놀랐다.

그의 괴로운 모습을 보는 것이 그토록 고통스러울지 몰랐다. 제발 죽여 달라 빈 것도, 텅 비어 껍데기만 남은 듯 행동한 것도 다만 도망치고 싶어서였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돌이킬 수도 없는 일을 저지르고 고통에 매몰되어 가는 그를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두렵고 암담하여.

달리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모든 것이 파국에 치닫게 될 거란 것을 알면서도 자신이 낼 수 있는 유일한 해답은 왕을, 남편을 배신하는 일이었는데.

그것으로 끝일 줄 알았다. 그 이후에도 그가 저를 놓지 못해 여전히 그와 함께일 줄은 몰랐다. 또한 여전히 자신이 그에게 의지하고 있음을, 어둠 속에서 오로지 그의 이름만을 불러 댈 만큼 그를 필요로 하고 있음을 이렇게 늦게 자각하게 될 줄도 몰랐다.

언제나 이랬다. 꼭 이미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멀어지고 나서야 뒤를 돌아보게 된다. 후회해도 소용이 없을 때 늘 후회하고야 만다. 달리 택할 방법이 없었으면서도 말이다.

그가 조금만 더 자비로웠거나, 아니면 자신이 조금 더 유연했다면 그랬다면 분명 지금 같지 않았을 거라고 릴리는 생각했다.

카르낙은 오전 내내 동물 가죽을 발라 무두질을 했다, 무두장이는 대장장이가 가진 또 다른 직업이었다. 종일 소변과 똥물에 가죽을 담그고 말리기만 반복하다가 해가 질 무렵부터는 화로 안으로 새빨갛게 타오르는 숯덩이들이 꺼지지 않게 관리했다. 열심히 삽으로 퍼 나르고 바람을 불어넣고 있으니 어느새 그을린 얼굴에 새까만 숯검정이 잔뜩 달라붙었다. 목이 말랐다.

빌어먹을 엘버그 왕국. 안 그래도 더운데 가뭄까지 겹쳐서 평소에 흔하게 먹었던 얼음은커녕 이곳에선 제대로 된 물 한잔을 못 마셔 봤다. 그는 콧등에 달린 땀방울을 닦아 내며 쇠를 두드리는 일에 골몰 중인 길란과 매짐을 보았다.

그들은 이 찌는 듯한 더위에도 물 한 모금을 찾은 적이 없었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그들이 마신 거라곤 볕 아래 미적지근하게 데워진 보리 맥주 몇잔이 전부였다. 그마저도 정오를 넘어가면서부터 쉰 맛이 났다.

문뜩 지난 3년을 떠올렸다. 한때는 물이 없어 제 소변이라도 먹어야만 할 때가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그는 원하는 때에 얼음을 먹고 원하는 때에 깨끗하고 시원한 물을 당연하다는 듯 마시게 되었다.

엘버그인 따위, 투로처럼 물이 없으면 제 소변이라도 퍼먹으면 될 것 아니겠느냐 한껏 비아냥거렸지만 이젠 조금씩 의문이 들기 시작한다. 이게 정말로 내가 원하는 모습인가. 매짐과 길란이 갈증에 익숙해져 이미 다 쉬어 버린 보리 맥주 한 모금으로 하루를 버텨 내는 것이 정말 내가 원하고 바라왔던 현실일까.

릴리는 언제나 그들 모두 폐하의 사람들이라 하였다. 돌보고 지켜 주어야 할 존재들. 언젠가 세상은 그토록 흑과 백으로 선명히 분리되지 않노라 이야기했던 적도 있었던 것 같다. 그때엔 그 뜻을 몰랐다. 그러나 지금은 아주 천천히 그 말을 곱씹으며 다시 생각했다.

이들은 엘버그인이지만 정체도 모를 자신을 자비롭게 받아들여 대가 없이 돌보아 준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사고방식대로라면 카르낙은 그들을 미워하고 증오해야 맞았다. 미움을 받아도, 받아도, 그들이 고통을 받고 또 받아도 모두 응당 그래야 한다고, 분명 원하는 것이 있으니, 받아 처먹을 것이 있으니 베푸는 자비이고 친절이라고 의심하고 또 의심해야 맞았다.

“이스바.”

쇠를 물에 담그다 말고 길란이 그를 불렀다. 카르낙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답했다.

“네.”

“그 허리에 찬 단도 말이야. 그것 좀 줘 봐.”

카르낙은 제 허리춤을 더듬거렸다. 본디 차고 다니던 큰 칼은, 이곳에 오는 길에 묻어 놓았다. 아무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라 판단된 곳에 아주 깊이 말이다. 갑옷은 모두 벗어 그곳에 같이 묻었다. 그렇게 모든 것을 벗어 두고도 완전히 무장을 해제하진 못해 허리춤에 단도는 계속 차고 있었다. 이 정도의 단도는 엘버그의 사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이것 말입니까?”

“그래. 무두질을 하느라 칼날이 꽤나 무뎌졌을 거야.”

카르낙은 아무 말 없이 제 허리춤에서 단도를 꺼내 길란에게 넘겼다. 노인은 칼을 들어 불빛에 날을 비추어 보고는 ‘흠.’ 하고 아랫입술과 턱에 힘을 주었다.

“무척 좋은 칼이군. 웬만큼 숙련된 대장장이도 만들 수 없을 만큼 단단하고 깨끗하고 날카로워. 이 칼은 어디서 났는가?”

그야 왕실 대장장이인 스코크가 공들여 만들어 준 것이지만 그것을 입 밖으로 낼 수는 없어서 카르낙은 대충 머리를 굴렸다.

“주웠습니다. 오다가.”

“이렇게 좋은 단도를?”

“네, 반짝이길래 보석인 줄 알았거든요.”

태평한 답에 길란은 혀를 찼다.

“참 운도 좋은 놈이구만. 이런 것을 길에서 줍다니 말이야. 그것도 이렇게 인적 드문 산골에.”

“저 같은 놈도 가끔 운이 좋을 때도 있어야죠.”

“내 보기엔 이스바, 자네는 지금도 지독하게 운이 좋아. 안 그러면 저렇게 아름다운 아내를 자네 같은 놈팡이가 어떻게 얻었겠어?’

저렇게? 카르낙은 길란의 시선을 따라 뒤를 돌아보았다. 멀리서 희미하게 릴리의 실루엣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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