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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발 아래 은빛 눈-147화 (147/231)

147화

부르면 들릴 만큼 거리가 좁아졌을 때, 카르낙이 그녀를 불렀다.

“릴리.”

그러나 릴리는 대꾸하지 않았다.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보폭을 줄이지도 않았다.

“릴리.”

카르낙이 한 번 더 그녀를 불렀다. 마찬가지였다. 하는 수 없이 그는 보폭을 넓혀 더 가까이 다가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챘다. 릴리의 몸이 그에게로 확 돌아섰다. 붉게 달아오른 눈시울은 분명 고통으로 격양되어 있었다. 카르낙은 그녀를 자극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를 울게 하거나 고통스럽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이미 지나간 과거의 일이야.”

“끔찍한 일이에요.”

그러나 릴리는 카르낙의 말을 귀담아듣는 것 같지 않았다, 그녀는 발작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이 일을… 이 일을 내가, 내가 어떻게 속죄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난….”

어떤 마음으로 이곳에 왔던가, 운명을 받아들이겠노라, 갚아야 할 빚이 있다면 모두 갚겠노라, 그렇게 마음먹고 그라타를 떠나왔다.

“당신이 속죄해야 할 건 없어. 당신이 한 짓이 아니잖아.”

“알기어스가 벌인 짓이에요! 하게너 가문이, 내 어머니가 속했던 가문이 벌인 짓이에요! 내겐 알기어스의 피도, 로레인 하게너의 피도 흘러요! 이런 끔찍한 죗값을… 난 죽음으로도 대신할 수가 없어요!”

“당신의 어머니는 하게너이기 전에 라미레스였어. 로레인 라미레스. 파니릴리의 피에 하게너의 것은 흐르지 않아.”

“알기어스는요…? 내 모든 육신과 머리카락과 눈동자로 대변되는… 그의 피는….”

“그와는 달라. 파니릴리 발투만은 그와는 완전히 달라. 네가 다르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여기에 있는 거야.”

릴리는 도리질을 했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위로다.

“난 이곳에… 파니릴리 알기어스로 왔어요. 왕의 이름으로, 하나밖에 남지 않은 알기어스의 딸자식으로 이곳에 왔어요. 그 운명을 받아들이고, 당신과 결혼해서 당신에게 정통성을 만들어 주는 것이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면, 기꺼이… 기꺼이 그것을 하겠노라….”

그래서, 그래서 모든 일이 끝나면 마음의 짐을 털어 버리고 자유를 얻겠노라. 언젠가 살아서 모든 죄에서 해방되면… 그땐… 그땐 죽어 뼛가루가 되어서라도 그라타로 돌아가겠노라. 늘 그 마음을 품고 살았다.

그렇지 않으면, 그렇게라도 마음속에 작은 희망을 품지 않으면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서, 온통 속죄와 죄책감으로 가득한 이 나라에서 도저히 살 수가 없을 것 같아서.

그런데 아니었다. 전혀 알지 못했다. 아비라 불린 자가 저지른 그 극악무도한 악행을 그토록 많이 보고 읽고 들어 왔건만. 그럼에도 더한 밑바닥이 있었다. 이젠 너무 깊어서, 도저히, 도저히 그곳을 헤쳐 나올 수가 없다.

“내겐 그의 피가 흘러요. 내겐… 언젠가 나도… 언젠가 나도 그처럼 미쳐 버릴지도 몰라요.”

오래전 스코크에게 물었다. 내가 아비와 같은 짓을 하면 나를 죽여 줄 수 있겠냐고. 그는 절대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라 했다. 나는 그와 다를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원한다면 그리 해 주겠노라고 답했다. 그도 알고 있을까. 아버지가 자신의 쾌락을 위해 사람의 가죽을 벗겼다는 것을? 그리고 그 외에도 자신은 상상조차 못 할 더 많은 악행들을 저질렀다는 것을…?

“…날 죽여요, 카르낙.”

“…뭐?”

겁에 질린 릴리의 눈동자가 유리알처럼 흔들렸다. 곧 깨져 조각날 듯 아슬아슬하였다.

“날 죽여요. 당신 손에 죽을래요. 차라리 그럴래요.”

“…정신 나갔어?”

카르낙이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제정신이 아닌 거야, 지금.

“난 저주받은 존재임이 틀림없어요. 그래서, 그래서 아이도… 언젠가, 언젠가 당신도… 내가 모든 걸 망칠 거예요. 분명해요. 여신은 날 미워해요. 내 아버지가 저지른 짓에 대해 내게 벌을 내린 거예요. 언젠가 나도 미쳐서…”

카르낙은 참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나 있을까. 그 이야기를 듣는 저의 마음이 어떨지 헤아려 보긴 했나?

“벌써 미쳤어?! 그래?”

카르낙이 그녀의 가녀린 어깨를 잡아 흔들며 고함쳤다.

“내가 널 죽이면? 그럼 나는 뭔데! 나는 어떻게 되는 건데? 지금까지 너 하나 살리겠다고 이 지랄을 떨었는데! 그럼 나는 뭐야! 나는 네 목숨 하나에 모든 걸 다 거는데, 너는 어떻게 그걸 나한테 끊어 달라고 해!”

“…….”

“내 생각은… 조금이라도 해 봤어?”

“…….”

“내가 널 어떤 마음으로 이곳까지 데리고 왔는지, 그건 한 번이라도 생각해 봤어?”

“…….”

릴리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여전히 아프고 고통스러운 얼굴로 그를 올려다볼 뿐이었다. 그래, 고통. 너에게는 오직 고통뿐이지. 누구보다 고귀하고 아름다운 아마네스 여신의 피조물일진대, 그녀가 만든 세상에서 너는, 너는 오로지 아파하기만 할 뿐이다.

“널 사랑해. 릴리.”

“…….”

“네가 내 목숨이고, 내 인생이야.”

순간 릴리의 얼굴에서 모든 감정이 빠져나갔다. 마치 몰랐던 것처럼. 단 한 순간도 느껴 본 적이 없는 것처럼. 하지만 거짓말. 넌 알고 있었잖아.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해 왔는지… 분명 너도 알고 있었잖아. 믿으려 하지 않았겠지. 왜냐하면 나 같은 놈에게 사랑은 사치니까. 나는 감히… 감히 널 사랑해서도 안 될 비천한 것이니까.

“리오에 가는 대로 널 그라타로 돌려보낼 거야.”

이제, 릴리는 눈을 깜빡거리는 것도 멈추었다. 지금껏 들은 것 중 가장 뜬금없고 놀라운 이야기이리라. 죽어서도 자신의 옆에 있게 될 것이라, 분명 그런 치기 어린 말을 했었다. 늘 네가 갖고 싶었지. 언제나 손에 넣어도 품에 안아도 도저히 내 것 같지가 않아서.

그래서 알았다. 나는 너를 가질 수 없다. 너를 보내 주어야만, 그래야만 내 사랑은 완성되는 거다.

“네가 이 땅에 갚아야 할 빚 따윈 없다. 더는 내게 아내란 이름으로 속박될 일도 없어. 파혼이든, 이혼이든, 우리 사이는 내가 정리할 거야. 그리고 너는 이곳을 떠나, 릴리. 이곳을 떠나 네가 행복할 수 있는 곳으로 가.”

“…칼…”

“이제야 알게 되었어, 파니릴리 알기어스. 당신이 가르쳐 주었지. 사랑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행복을 빌어 주는 것이라는 걸.”

카르낙이 손을 들어 도무지 무슨 말을 들은 건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한 릴리의 보드라운 뺨을 쓸었다.

“릴리, 나의 아름다운 아내.”

“…….”

“당신이 죽는 꼴을 보느니 차라리 영원히 보지 않는 편을 택하겠어.”

급작스럽고 놀라운 이야기라 릴리는 무어라 대꾸해야 할지 몰랐다. 한순간, 너무나 많은 것이 변하여 눈앞에 닥쳤다. 눈을 감았다가 눈을 떠 보니 그토록 저에게 집착하던 남편이 이제는 저를 떠나라고 말하고 있었다. 모든 것을 체념한 듯한 어투로, 완전히 비어 버린 눈동자로.

“바래다줄게. 가자.”

카르낙이 고개를 까닥이고 앞장섰다. 어깨를 강하게 움켜쥐었던 손이 마치 언제 그랬냐는 듯 가볍게 떨어져 나갔다. 간신히 시선을 움직여 보니 그는 벌써 저 앞까지 가 버렸다. 릴리는 한참 만에야 그의 뒤를 따랐다.

집에 도착하는 동안 릴리는 계속해서 카르낙의 뒤통수만 쳐다보았지만 카르낙은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각자의 상념으로 대화는 단절되었고, 침묵 속에 서로의 생각만이 요란하였다. 집의 문 앞에 서서 카르낙이 부드럽고 건조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잘 자, 릴리. 내일은 당신의 얼굴이 좀 더 밝아지길 바랄게.”

그러고는 온 길을 되돌아가는 그를 릴리는 멍하게 바라만 보았다. 낯설었다.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여 덜컥 겁이 나기도 했다. 그가 한 말을 아직 제대로 곱씹어 보지도 못했다. ‘무슨 말을 했더라?’ 하고 떠올려 보아도 자꾸만 얼떨떨했고, 자신이 착각한 것은 아닐까 의심하게 되었다. 아니 어쩌면, 어쩌면 차라리 착각이라고 여기고 싶어 하는지도 모르겠다고. 그녀는 혼란스러운 마음에 밤잠을 제대로 이룰 수가 없었다.

***

잠을 설치고 난 새벽, 눈을 뜬 순간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다. 카르낙이 했던 말이 내내 그녀의 심중을 괴롭혔다.

보내 준다잖아. 매일 매일 꿈꾸어 왔던 일이잖아. 그라타로 돌아가는 것. 죽어서도 돌아가고 싶어 했던 곳이잖아. 지독한 괴로움에서, 죄책감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속죄의 덫에서 꺼내 주겠노라. 그러니 모든 것을 여기 두고 달아나라고. 그렇게, 그래. 그렇게 힘껏 도망가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이것이 마침표가 아니라서, 제대로 끝맺은 것이 아니라서 이토록 찜찜하고 기분이 안 좋은 것일까.

카르낙의 말이 맞다. 이곳에 온 후로 자신은 제대로 한 일이 없었다. 무엇이든 열심히 하고자, 언제나 최선을 다하고자 노력했지만 제대로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카르낙을 곤란하게 만들고, 그를 위험하게 만들고, 또 그에게 짐이 될 뿐이었다. 차라리 인형으로 살걸. 캘던성의 탑에 갇혀 허울뿐인 왕비로 아무것도 모른 채 시키는 대로만 했다면 차라리 그에게 도움이 되었을지도 몰랐다.

어제 그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는 날 사랑한다고 했지. 그리고… 내가 죽는 꼴을 보느니 차라리 영원히 보지 않겠다고 했다. 옷을 갖추어 입고 방을 나섰으나 집 안엔 아무도 없었다. 시선을 돌려 창밖을 보니 이미 식사를 마친 포드 부자와 함께 카르낙은 분주히 대장간으로 갈 짐을 챙기고 있었다. 지난밤에도 그는 분명 문가에 이부자리를 폈을 것이다. 명목상 부부이지만 멀루아를 떠나온 뒤 단 한 번도 부부로 지내 온 적이 없다.

이대로 그를 떠나도 괜찮은 걸까? 늘 그와는 겉도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진심으로 서로를 마주 보고 대화한 적이 있었던가. 부부이면서도 단 한 번도 부부다웠던 적이 없었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하며 또 앞으로도 영영 그럴 일이 없을 것이다.

그가 대장간으로 향하고 나면 늦은 밤이 되도록 볼 일이 없겠지. 몇 마디 대화조차 제대로 나누지 못하고 또 잠이 들고, 그렇게 하루하루를 의미 없이 시간을 보내기만 할 것이다.

“이스바!”

릴리는 다급하게 대문을 열고 소리 질렀다. 카르낙뿐 아니라 매짐과 길란 역시 그녀의 고함에 놀라 하던 일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너무 격양된 목소리였던 게 틀림없었다.

“…저…”

자각하고 나니 당황스러워 그녀는 입을 뻐끔거렸다. 그가 그렇게 가 버릴까 조급하여 일단 부르긴 했는데 그 후에 어떻게 할지는 생각해 두지 못한 것이다.

“…그러니까….”

무슨 말을 하지? 잠깐 이야기 좀 하자고? 아니면 아침은 먹었냐고 물어봐야 하나? 그게 아니면… 잠깐만 같이 있자고? 아니면 무엇을 좀 도와 달라고…? 그게 아니면….

“씻… 씻고 싶어서요. 혹시… 어디에 가면….”

“아. 물웅덩이를 찾으시는군요! 저쪽 숲으로 가면…”

“매짐.”

길란은 손가락까지 뻗어 보이며 친절하고 상세한 설명을 이어 가려던 제 아들을 만류했다. 영문도 모르고 말문이 끊긴 매짐은 두 눈을 껌뻑이며 제 아비를 바라보았다.

“이스바, 자네가 아내를 데리고 다녀오도록 해.”

“…….”

카르낙은 별다른 대답이 없었다. 별로 내키지가 않는 것인지, 아니면 꺼려지는 것인지… 분명 기꺼운 반응은 아니었다.

“이왕 씻는 거, 자네 남편을 하인 삼아 머리빗과 기름도 챙겨 가 느긋하게 즐기다가 오시게. 요즘 같은 때에 물이 언제 마를지 모르니 있을 때 담뿍 즐겨야지. 가자, 매짐.”

그는 지팡이로 아들이 등에 멘 짐 꾸러미를 툭툭, 쳤다. 마치 망아지를 모는 것과도 같은 움직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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