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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발 아래 은빛 눈-144화 (144/231)

144화

포드 내외는 두건을 벗은 릴리의 민머리를 보고 당황한 듯 보였으나 그리 내색하진 않았다. 대신 전혀 놀란 적이 없었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걸고 무사히 깨어나 다행이라는 덕담만을 짧게 건넸다.

릴리는 포드 내외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네려다 길란 포드를 보고 그대로 시선을 멈추었다. 갈색 피부에 보라색 눈동자, 어쩔 수 없이 기시감이 들었다. 제 남편의 것 이외에 이 같은 라일락빛 눈동자는 처음 보았다.

“이쪽은 길란 포드 씨와 그의 아내 자미에 포드 부인, 대장간을 운영 중이셔. 그리고 이쪽은 제 아내… 판.”

이름을 지어내느라 말끝을 흐렸다가 끝맺었다. 엘버그 왕비의 이름을 아는지 모르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본명을 쓰긴 껄끄러우니까. 영 동떨어지지 않은 별칭 정도가 괜찮을 성싶었다. 그리고 릴리는 카르낙의 말이 끝나자마자 일부러 환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두 분의 도움 덕에 저와 남편이 목숨을 구할 수 있었어요.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어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지만….”

평소처럼 치장을 조금이라도 한 차림이었다면 옷에 달린 브로치나 반지, 목걸이 같은 것을 답례로 모두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내내 앓았고 그동안 내내 아무런 치장 없는 슈미즈 한 장 차림이었다. 그들에게 보답하기는커녕 포드 부인의 옷을 빌려 입어야 할 처지다.

“하지만 반드시 갚을게요. 반드시.”

릴리의 말에 길란은 씨익, 하고 대문니를 보이며 웃었다.

“염려 말아요. 이스바 부인, 덩치도 좋고 힘도 좋은 당신의 남편이 대장간 일을 도와 갚을 거야. 안 그런가, 이스바?”

그는 장담했다. 투로란 애초에 불에 가깝게 태어난 존재라고. 그러니 분명 이스바, 그러니까 카르낙도 대장간의 일과 아주 잘 맞을 것이라고. 어쩌면 제 아들인 매짐보다 훨씬 더 잘 맞을 수도 있었다.

사실 카르낙은 딱히 대장간 일을 도울 생각은 없었다. 가능하면 릴리의 곁에 머물며 그녀의 수발이나 들어 줄 생각이었다. 그렇게 아내의 몸이 빨리 나아야 이곳을 떠날 수 있고 이곳을 한시라도 더 빨리 떠나야 포드의 가족들 모두 안전할 수 있었다.

만약 자신이 붙어 있지 않다면 아내의 성치 않은 몸은 누가 돌봐 줄까, 그녀의 표정이나 낯빛이 변하는 것은 누가 읽을 수 있을까.

하지만 길란이 그것으로 값을 받겠다면 카르낙은 꼼짝없이 그를 도와야 했다. 이곳에 조금 더 머물러야 했고 포드 부인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그리하여 카르낙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스바 경, 아내분의… 왁!”

뒤늦게 방으로 들어온 매짐이 릴리의 몰골을 보더니 곧장 비명부터 질렀다. 그러고 나니 민망한지 그는 손을 휘저으며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아닙니다! 제가 절대로 지금, 지금 이스바 부인을 보고 지른 것이 아닙니다, 절대로요! 다만, 제가 하, 한 번도 대머리를 보, 본 적이, 아니 그러니까 이스바 부인을 보고 지른 것이 아니라, 그러니까 말하자면 대머리를 보고, 아니 그 물론 그것이 이스바 부인의 것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제 처음 보는 거라, 절대 흉하다거나 이상하다거나 그런 게 아니라,”

“그만하면 되었다. 매짐.”

아들이 식은땀까지 흘리기 시작하자 길란이 점잖게 그를 만류했다. 그러자 매짐은 황망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어 댔다.

“죄, 죄송합니다. 이스바 경, 부인.”

“이쪽은 포드가의 장남, 매짐이라고 해.”

카르낙이 잊지 않고 그를 소개했다. 릴리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매짐. 우릴 구해 줘서 고마워요. 당신께도 꼭 은혜는 갚을게요.”

매짐은 손사래를 쳤다.

“아, 아닙니다, 부인. 저는 그저 두 분을 모시는 것만으로도 영광입니다!”

자미에 포드는 제 아들이 또 무슨 철없는 망상을 늘어놓을까 걱정이 되어 눈을 부릅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매짐은 곧 입을 다물었지만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투로인 남편과 머리카락이 없는 부인이라.”

길란은 저 혼자 중얼거렸다. 아무리 봐도 이상한 조합이었다. 엘버그에서 머리카락이 없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다. 엘버그인이라면 누구나 천한 것이든 귀한 것이든 모두 제 머리를 애지중지 아꼈다.

저도 한때에는 검고 흑단같이 긴 머리를 가꾸느라 열심이었다. 이제 늙고 노쇠하여 더는 기르지 않지만 말이다. 새하얀 피부에 뚜렷한 이목구비가 엘버그인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것도 무척이나 미모가 빼어난 여인이었다. 무언가 연유가 있겠지. 필시 말 못 할 사정이 있을 것이다.

“우리 부부만큼이나 독특한 조합이로군. 우리 집은 아무 편견 없이 누구나 환영한다오, 이스바.”

그는 카르낙과 릴리를 묶어 그렇게 불렀다.

“당분간 집 안이 아주 시끌벅적하겠어. 늘 내 아내가 원하던 모습이지.”

그러며 길란은 제 아내를 쳐다보았다. 애정이 가득 담긴 시선이었다. 남편의 말대로였다. 포드 부인은 어릴 때 늘 대가족을 꿈꾸었다. 아이를 갖기 어려운 몸이 아니었다면, 그랬다면 아주 많은 아이들을 낳아 북적거리며 살았을 것이다. 그녀가 꿈꾸던 모습 그대로.

“공짜 밥은 안 줘. 그러니 이스바 부인도 몸이 성해지거든 열심히 내 일을 돕도록 해요. 알겠어요?”

릴리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성안에 잘 꾸며진 인형처럼 앉아 먼 미래에 대해 고민하는 것보다 몸을 움직이며 열심히 사는 것이 더 좋았다. 그렇게 열심히 살며 하나씩 하나씩, 진리를 깨쳐 나가는 것이다. 그라타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러면 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좀 더 강한 여자가 되리라.

“물론이에요. 포드 부인, 아주 열심히 돕겠습니다.”

그날 밤 포드 부인은 다시 릴리의 옆에서 잠을 잤다. 카르낙의 자리는 부부 침실 앞 좁은 복도였고 길란은 그날 밤도 아들의 방에서 함께 잠이 들었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 릴리가 조금씩 걷기 시작하며 건강을 회복하기 시작해도, 카르낙이 무거운 쇳덩이들을 옮기고 커다란 화로에 땔감을 넣는 것이 익숙해져도 그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 덕에 릴리와 카르낙은 부부임에도 한 침대를 쓰지 못했고 대장간 일에 치여 함께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를 나눌 시간도 턱없이 부족했다. 릴리는 남편이 없는 시간 동안 포드 부인을 도와 간단한 집안일을 하거나 포드 부인이 시키는 일이 없으면 근처 숲을 산책하고는 했다. 그러고 나면 한 움큼 이런저런 꽃과 잡초들을 뽑아 왔다.

“몸이 성치 않으니 쉬라고 했지, 나가서 쓸데없는 풀이나 뜯어 오라고 쉬라고 했어?”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또다시 풀과 꽃을 한 아름 내려놓는 릴리를 보며 포드 부인은 혀를 찼다. 그러면서도 변함없이 옆으로 다가와 릴리가 가져온 것들을 꼼꼼히 살폈다.

“버들초네.”

포드 부인이 꺼슬꺼슬한 질감의 길고 말간 풀을 골라냈다. 말려두면 아궁이를 지필 때 쓸 만했다. 그래 봤자 건초보단 덜하지만. 향은 조금 더 좋으려나.

“관절에 좋대요.”

“또 그건 어떻게 알았대?”

“책에서 봤어요.”

릴리는 대충 둘러댔다. 사실 캘던성에서 리쿠스가 알려 준 것이지만 말이다.

“그래서 우리 영감을 위해 가져온 거야?”

“부인을 위해서도요.”

하여간, 약아서 말은 또 이쁘게 하지. 하고 포드 부인은 투덜댔다. 이젠 그것이 기쁘고 멋쩍어하는 행동임을 안다. 누구나 괄시한다는 대장간 집에서 사내 둘과 살다 보면 애정 표현에 인색해질 수밖에 없다고 릴리는 생각했다.

“이건?”

포드 부인이 작은 들꽃을 하나 집어 들며 물었다,

“아, 그건 흰송이 꽃이에요. 말렸다가 차에 우려먹으면 부인병에 좋대요.”

“그럴 리가. 내가 여인에게 좋은 약초와 꽃은 죄다 알고 있는데.”

“그 꽃은 폐경기 여성에게 좋다고 들었어요.”

“아아, 과부를 위한 게로군. 그럼 꽤 쓸 만한 곳이 많겠네. 맛만 괜찮다면 장에 내다 팔아도 되겠어.”

“그럼 일단 골라서 볕에 말려 놓을까요?”

“그래. 하루 나절이면 마르겠지. 볕이 이렇게 뜨거운데.”

“네.”

릴리는 작은 소쿠리를 꺼내 그 위에 꽃송이들을 골라서 가지런히 올렸다. 숲을 누비며 약초를 캐오기엔 지나치게 고운 손이었다. 포드 부인은 내내 그것이 마음에 걸렸다. 포드 부인은 버들초를 골라내며 릴리의 눈치를 보다 툭 뱉듯 물었다.

“멀루아에서는 뭘 하며 산 거야?”’

릴리는 대답 없이 꽃송이만 골라냈다. 곤란할 뿐 무시하려는 낯빛은 아니었다.

“댁 남편은 산적처럼 거칠게 생겼는데 댁은 너무 하얗고 연약해 보여서 그래. 혹시 뭐 강제혼 그런거야?”

따지고 보면 강제혼이 맞긴 하지. 맞긴 하지만… 릴리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포드 부인은 믿지 않았다. 이미 곤란해 보이는 표정에서 딱 답이 나왔다 확신했다.

“그래서 그렇게 서로 서먹하고 그런 거지? 저 덩치는 자기 부인을 무서워하고 댁은 남편을 애써 피하려고 하고. 아무리 보아도 서로 신분이 달라 보인단 말이야. 무슨 빌미가 잡혀서 저치랑 결혼한 거야?”

“…….”

릴리는 멋쩍게 웃기만 했다. 서로 사랑해서 한 결혼은 물론 아니었다. 그러나 릴리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자 했고 카르낙 역시 그러한 릴리를 온전히 받아 주었다. 어느 순간 자신을 믿어 주기 시작했다.

저 역시 언젠가부터 그를 온전히 믿었듯이. 돌이켜 보면 그는 늘 남편으로서는 좋은 사람이었다. 늘 아내를 아끼고 보호하고 넘치는 애정을 주었다. 그렇기에 그가 언젠가 어진 왕이 되리라 믿었던 것 같다. 언젠가 그 가시 바늘같이 뾰족하고 날카로운 증오가 녹아내리고 마음이 평화를 찾을 거라는.

그러나 이제는 포기했다. 아마도 절대 그를 바꿀 순 없으리라 생각하게 되었다. 맹신했던 허상을 놓아 버리고 나니 이제 더는 가야 할 길이 보이지 않았다.

“두 분께선 사랑으로 이루어진 결혼인가요?”

“아버지가 그러셨지, 너 같은 왈패를 데리고 살 놈은 길란뿐이라고 말이야. 게다가 난 불을 만지는 집안의 딸이잖아. 푸줏간 딸내미보다 더 못한 천것. 그래서 내 인생에 남자는 길란밖에 없다고 생각해 왔어. 다른 선택지는 없었지.”

“운명이라 들리는데요. 부인.”

포드 부인은 어깨를 한번 으쓱해 보였다. 그러느라 동그란 턱 아래 볼록한 주름이 졌다.

“뭐 운명이라고 보려면 그럴 수도 있겠지.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길란도 나 아니면 데려갈 여자 없었어. 나야 아버지한테 하도 세뇌를 당해 저놈 아니면 안 된다 여겼지만, 어릴 때 그가 얼마나 맹추 같았는지. 정말 그 꼴을 안 본 사람은 몰라.”

릴리는 조용히 웃었다. 카르낙과 닮아서인지, 그와 같은 투로여서인지 모르겠지만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되었어도 길란은 여전히 다부진 육체에 건강한 피부색을 지닌 잘생긴 사내였다. 등이 굽지도 않았고 눈동자가 탁하지도 않았으며 웃을 때 드러나는 이조차 모두 하얗고 단단해 보였다. 언젠가 로로처럼 등이 굽을지도 모르겠지만, 여전히 길란은 노인보다는 건장한 중년의 남자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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