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카르낙은 매짐이 알려 준 물웅덩이에서 몸을 씻은 후 곧바로 릴리에게 돌아왔다. 포드 부인은 그에게 미지근한 물과 바짝 마른 천 뭉치 하나를 쥐여 주고는 곧장 자리를 떴다.
반갑고 기쁜 마음과는 달리 조금 어색한 조우였다. 둘 사이의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정리되고, 또 정리되지 않았는지 되짚어 내기에도 애매한 시간이 흐른 것이다. 그러니 무슨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하는지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둘은 한참이나 멍하게 서로를 바라보며 우물쭈물했다. 침묵을 깬 것은 의외로 카르낙이었다.
“머리를 잘랐어.”
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머리가 짧아졌다는 것은 그와 이곳에서 처음 마주쳤을 때부터 알았다. 신분을 숨기기 위해 이스바의 이름을 썼으니 외형에 변화를 준 것 역시 당연하게 여겨졌다.
“네. 알아요.”
“당신의 머리카락도.”
릴리는 저도 모르게 머리에 쓴 두건 위를 매만졌다.
“상황이 너무 급해서 아무렇게나 잘랐어. 알잖아. 엘버그에서 그런 머리카락은….”
“알기어스의 혈통만이 가지고 있죠,”
“맞아.”
“거기에 눈동자까지도요.”
“그래서 어쩔 수 없었어. 미안해.”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괜찮아요. 어차피 당신과의 결혼을 위해 길렀던 머리니 어찌 되든 난 상관이 없어요. 조만간 완전히 밀어 버리는 것이 좋을 거예요.”
“그때처럼 말이야?”
“네. 그때처럼요.”
카르낙은 맨 처음 릴리를 보았을 때를 떠올렸다, 머리카락도 없던 그 기괴한 모양새를. 그러나 그 와중에도 그녀의 신비하고 청아한 눈동자만은 눈이 부셨더랬다. 릴리가 말하는 때도 분명 그때이리라.
“이스바라고요?”
“응?”
“포드 부인이 그렇게 말하던데요. 폐하의 아니, 당신의 이름이 이스바라고요.”
“아, 응.”
“그렇다면 역시 머리칼을 완전히 없애는 편이 좋겠네요.”
카르낙은 저 혼자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네 말이 맞아.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천의 끄트머리를 말아 쥐고는 그릇에 담가 약간 물을 묻혔다.
“여긴 멀루아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 숲속 마을이야. 엘버그 지도에도 표시된 적이 없는 곳이니 테이먼 테르조 쪽에서도 이곳의 존재를 모르겠지. 당신 몸이 나아질 때까지 여기서 머물 생각이야.”
“핀이 리오에서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라요.”
“우선 네 몸이 먼저야, 릴리. 네 몸이 좋아지고 난 후에 리오로 갈 방법을 찾으면 돼.”
“그 전에 적의 병사들이 우리를 먼저 찾는다면….”
“…다시 달아나야지.”
대답하는 카르낙의 목소리가 덤덤하여 듣는 이를 더욱 암담하게 했다. 왠지 그렇게 된다면 어찌할 방도도 찾지 못하고 꼼짝없이 죽는다는 소리로 들렸다.
“혹시 몰라 네 얼굴에 잔뜩 진흙을 묻혀 놨어. 손과 발에도. 다행히 네가 남들과 좀 다르다는 것을 포드 가족들은 모르는 것 같아. 아직까지는.”
걱정되는 것은 파니릴리의 눈동자였다. 내내 눈꺼풀 속에 숨어 있었던 이 밝은 회색의 눈동자는 누구나 한 번쯤 시선을 빼앗길 만했다.
하지만 길란의 눈동자 역시 흔히 볼 수 없는 보라색. 그의 가족들이라면 어쩌면 그런 특이한 외형을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게다가 길란은 자신과 같은 투로고, 또 저에게서 동질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괜찮을 것이다. 아차 하는 순간 저를 팔아넘길 가벼운 자로는 보이지 않았다. 웬만한 엘버그인들은 갖고 있지 못한 신의 같은 것이 그에게서는 느껴졌다.
카르낙은 조심스럽게 젖은 천을 그녀의 뺨에 가져갔다. 더럽게 달라붙어 있던 흙덩이 아래 말갛고 부드러운 피부가 진주처럼 드러났다. 그리고 홀쭉하게 꺼진 볼도. 네가 다시 그때로, 눈부시게 건강했던 그즈음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
릴리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완전히 정리되지 않은 많은 이야기들을 하나씩 천천히 매듭지어 놓고 싶었다. 그러나 카르낙의 말대로 몸을 회복하는 것이 지금은 더 중요했다. 그러니 괜스레 카르낙과 다시 말다툼을 하며 속을 끓이고 싶지 않았다. 결국 둘의 갈등과 마찰이 수많은 사달을 일으키지 않았던가.
“지금 잘라 줄래요?”
카르낙이 손길을 멈추자 릴리는 제 머리를 손가락으로 톡톡 쳤다.
“…난 한 번도 사람의 머리카락을 밀어 본 적이 없는데, 릴리.”
너무 긴 머리가 성가셔 단검으로 볏짚 자르듯 제 머리카락을 잘라 본 적은 있지만 남의 머리카락을 잘라 본 것은 릴리가 처음이었다. 그마저도 눈을 질끈 감고 했다. 어쩐지 릴리의 신체를 어디 하나 상하게 할까 봐 두려웠다. 이미 제가 너무 많이 망가뜨려 놨다는 죄의식 때문에 더 그런지도 몰랐다.
“면도하는 것과 똑같아요. 잘 벼린 단도나, 부엌칼만 있으면 나머진 아주 간단하거든요.”
그라타에 있을 땐 부르테와 루나가 늘 머리 손질을 도와주었다. 잘 벼린 작은 부엌칼로 쓱쓱 가뿐하게 밀어 주면 그녀는 어느 연못에나 뛰어 들어가 깨끗하게 몸을 씻고 나오면 그만이었다. 머리를 기르며 매일 손질에 빗질까지 하는 일상에 익숙해졌지만 사실 그때만큼 사는 게 편했을 때도 없었던 것 같다.
그러니 이런 머리카락 따위엔 아무런 미련이 없다. 이런 것으로 혈통이나 권위를 인정받는다는 게 아직도 납득하기 어렵다.
“일단, 기다려 봐.”
카르낙은 물그릇과 천을 바닥에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단단한 각오가 필요한 듯 어느새 두 주먹을 불끈 쥔 채였다.
“포드 부인의 부엌에 쓸 만한 칼이 있는지 좀 찾아보고 올게.”
한참 있다가 그는 부엌칼이라고 부르기엔 크고, 검이라고 부르기엔 작은 칼을 들고 왔다. 무겁고 몸통이 두꺼워 보이는 것이 소나 돼지고기를 뼈째 잘라 낼 때 쓰는 것이 분명했다. 머리카락을 미는 것이 아니라 목을 썰 때 쓰기 적당할 성싶었다.
릴리가 아연한 표정을 짓고 있자 카르낙이 칼을 흔들며 멋쩍게 말했다.
“손에 맞는 것이 이것뿐이라.”
늘 장검만 휘둘렀던 사내다. 그가 늘 허리춤에 함께 차고 있던 단도도 보통의 단도보다는 그 두께나 크기가 남달랐다. 그러니 부엌에서 쓰는 칼 따위를 제대로 잡아 본 적이 없었겠지.
설마 내 목을 썰기라도 할까. 죽기밖에 더하겠어? 릴리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머리를 칭칭 감고 있던 천을 단번에 벗고 이불을 걷었다. 야영지의 천막 안에서 입고 있던 새하얀 슈미즈 차림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토록 많은 일이 일어났건만 그녀의 모습은 그때에서 멈춰 버린 것만 같았다. 릴리는 새하얗고 연약한(적어도 카르낙은 그렇게 생각하는) 두 발을 까슬한 나무 바닥 위에 내려놓았다. 메마른 발목은 조금만 휘청여도 곧 부러질 듯했다. 그녀가 몸을 일으켰다. 아슬아슬한 모습을 더는 두고 볼 수 없어 카르낙이 그녀의 팔뚝을 잡았다.
모든 게 낯설었다. 그가 팔뚝을 잡는 감촉, 또 그녀의 여린 팔뚝을 쥐는 느낌, 몸이 가까이 부딪히고 코끝이 닿을 듯 가까운 거리에서 눈을 마주하는 느낌. 처음처럼 달뜨고 묘한 기분이 아니었다. 오히려 두렵고 죄스러운 감정에 가까웠다.
릴리가 먼저 그의 눈을 피했다. 카르낙은 천천히 그녀의 팔뚝을 놓아주었다. 릴리는 뒤돌아서서 호흡을 골랐다. 카르낙의 시야에 엉킨 실타래 같은 은빛 머리가 가득 들어왔다. 빛을 받아 더욱 탐스럽고 눈부셨다.
“숫돌에 칼을 가는 것과 비슷하다고 했어요. 아니면… 잡초 같은 것을 잘라 내는 거나.”
돌에 칼을 갈아 본 적은 있으나 잡초를 잘라 본 적은 없다. 카르낙은 릴리의 곱슬거리는 은빛 머리카락을 손으로 천천히 빗어 내렸다. 릴리의 목덜미와 어깨가 잔뜩 굳지 않는 것을 보니 이 정도의 손길은 거북하지 않은 모양이다.
한때 이 머리카락은 파니릴리와 결혼을 해야 하는 이유였다. 그녀가 가진 것 중 가장 가치 있는 것이었다. 한때는 그랬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파니릴리의 한 부분, 그녀의 가치를 더할 수는 있어도 그녀의 가치를 떨어뜨릴 수는 없는 것. 그 정도뿐이다. 그러니 괜찮다. 그녀의 가치를 자신은 알고 있으니 그것으로 된 것이다. 다른 이들의 시선 따위, 그들의 편견이나 판단 따위. 그딴 것은 아무것도 아니니까.
카르낙은 그녀의 머리카락 한 움큼을 움켜쥐고 서걱서걱 칼로 잘라 내기 시작했다. 가능한 한 짧게, 또 짧게, 엄지손톱만큼의 길이가 될 때까지 계속해서 잘랐다.
자르는 카르낙도, 제 머리를 맡기고 있는 릴리도 말이 없었다. 침묵에 불편함은 없었다, 오히려 평온하고 고요했다.
이후 카르낙은 칼끝에 물을 묻혀 나머지 머리카락도 모두 잘라 냈다. 릴리가 맨 처음 엘버그에 왔을 때처럼 말갛고 동그란 두상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이 모습에 그는 웃음을 터트렸었다. 크다 만 사내아이 같은, 아직 몸에 털조차 나지 않은 꼬마 아이 같은 모습이 그토록 우스웠더랬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어떤 모습을 하고 있어도 그녀는 파니릴리였다. 사랑하고 또 사랑해 마지않을 자신의 아내. 젖은 천으로 잘려 나간 머리카락을 깨끗이 닦아 주자 릴리는 비로소 손을 들어 제 머리통을 만져 보았다. 어쨌든 카르낙이 칼을 다루는 솜씨는 훌륭했다. 비록 이런 보잘것없는 일일지라도 말이다.
“에이가가 날 죽이려 들겠지?”
카르낙의 암담한 어투에 릴리는 미소 지었다.
“살기 위해 한 행동이니 그러진 않을 거예요.”
“그것 참 다행이네.”
카르낙은 몸을 숙여 바닥에 흩어진 릴리의 머리카락을 그러모았다.
“게다가 머리카락은 또 자라니까요. 그때까지 난 알기어스가 아닌 파니릴리로 존재할 수 있겠죠.”
카르낙은 릴리가 하는 말의 의미를 이해했다. 그조차 한때는 그녀를 혈통으로만 보지 않았던가. 어쩌면 그래서 릴리는 늘 외로웠는지도 모르겠다. 늘 이곳이 낯설고 언제나 답답하고…. 그렇기에 그토록 그라타를 그리워했는지도 모른다. 오로지 머리카락과 피부색만을 위해 살아야 하는 존재. 만일 자신이 그런 존재였다면 어땠을까. 돌이켜 보니 그 무수한 시간을 그녀가 어떻게 견뎌 낸 건지 모르겠다. 그토록 평온하고 고요하게, 말썽 한번 없이 주어진 운명과 역할을 받아들이면서. 만일 카르낙 저였다면 아마 미쳐 버렸을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했다.
“이 마을도 사방이 숲이야. 엘버그에선 보기 드문 곳이지.”
“그런가요?”
릴리가 눈을 반짝였다. 오랜만에 보는 모습에 카르낙은 반갑고 기뻤다.
“그라타라는 곳은 사방이 산과 숲이라지? 이곳이 그곳과 조금이라도 비슷했으면 좋겠어.”
카르낙은 까슬까슬한 릴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럼 당신은 조금이라도 더 빨리 안정을 찾겠지.”
네가 조금이라도 행복했으면 좋겠어, 릴리. 그러면 나는 너의 본모습을 조금이라도 볼 수 있을까. 있는 그대로의 네 모습을 아주 조금이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