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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발 아래 은빛 눈-111화 (111/231)

111화

필시 여인으로서의 삶은 비참했을 것이다. 팔려 가듯 시집을 와 내내 왕에게 유린당했고 남편은 그것을 방조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그것을 빌미로 아내를 괴롭히기까지 했다 들었다. 릴리는 그런 삶을 상상조차 해 볼 수 없었다. 언젠가 끝날 것이란 희망도, 달아날 방법도 찾지 못한 채 희생과 강요로 빼곡히 채워 나가야 하는 삶을 말이다.

남편과 아들을 잃고 함락되어 버린 성안에서 그녀는 가족을 잃었다는 슬픔과 드디어 이 고통을 끝낼 수 있다는 비틀린 희망에 침잠되었을까. 그것이 아니라면 자신을 능욕한 알기어스 왕과 이 세상에 대한 복수를 꿈꿨을까.

릴리는 단단한 벽돌에 새겨진 ‘로레인 하게너’란 글자를 바라보았다. 인간은 누구나 태어나 가장 먼저 배우는 말이 ‘엄마’라고 했다. 살면서 수천 번, 수만 번 부른다는 그 단어를 릴리는 한 번도 불러 본 일이 없었다.

“어릴 때, 유모에게 왜 엄마는 나를 버렸느냐 물었던 적이 있어요. 그럴 때마다 올라는 가엽게 여기라고, 그저 가엽다고 여기라고 했죠. 늘 그것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었어요.”

릴리는 손을 뻗어 비석을 매만졌다. 서늘하고 단단했다. 제 어미에게 지금껏 가졌던 자신의 마음처럼.

“엘버그로 돌아온 후에 그녀에 대해 알게 되면서 그때부터 조금씩….”

아주 조금씩 모호하고 추상적이기만 하던 모친의 윤곽이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했더랬다. 비로소 느껴 보는 모친의 생각과 바람과 마음들.

“진정 어머니를 가엽다 여기게 되었어요. 올라가 말했던 것처럼. 그저 가엽다고요.”

원치 않는 삶. 원치 않던 임신과 출산. 올라의 말처럼 로레인은 단지 자신이 낳은, 자신의 피붙이란 이유로 자신의 딸을 사랑했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슬퍼했으리란 생각은 들었다. 불행한 세상에 태어난 불행한 딸이 앞으로도 변치 않고 불행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 여인이 되리란 것을 분명 가여워했으리라.

로로는 평온한 릴리의 옆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제 아비를 꼭 닮은 듯 새하얗고 눈부신 자태였다.

귀하게 태어나 귀하게 자랐어야 할 고귀한 혈통. 강제로 선택당해 강제로 끌려와 결혼한 것이 아닌, 마땅히 캘던성에서 귀하게 자라 자신의 신분에 걸맞은 사내, 이를테면 테이먼 테르조 같은 이를 남편으로 맞이했어야 할 여자였다.

마땅히 누렸어야 할 것들을 모두 빼앗기고 이렇듯 자신이 원치 않는 삶을 살고 있음에도 그녀는 정말 아무런 미련도 분노도 고통도 없을까.

“전 왕비 전하께서 폐하를 원망하시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녀가 로로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폐하께선 전하를 냉대하셨지요. 탑 안에 가둔 채 오랫동안 방치하셨어요. 전하의 심기를 어지럽힐 만한 말도 많이 하셨고요. 또 그런 행동도 많이 하셨지요.”

릴리는 조용히 웃었다. 카르낙을 처음 마주했던 때가 떠올랐다. 그가 저에게 했던 비수 같던 말들 역시 떠올랐다. 그래. 그땐 그랬었다. 눈앞이 캄캄하고 아득하여 당장 닥친 일들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지 막막했었다. 그때의 카르낙은 잔인하고 비정하고 난폭한 왕이자 차가운 사내였다. 이런 자의 아내가 되어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그조차 까마득한 날들이었다.

“또… 전하의 모친을 직접 처단하셨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런 곳에 와서조차 왕비 전하의 용안은 편안하기 그지없으십니다.”

릴리는 약간의 말미를 두고 대답했다.

“그를 이해해요.”

그럴 수밖에 없었던 그의 상황과 삶을 이해한다. 어쩌면, 운이 나빴다면 자신 역시 카르낙과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를 원망할 이유도 없지요. 그저 삶의 변곡점마다 택할 수 있는 길이 달랐을 뿐이에요. 저도. 폐하도. 그리고 로레인 하게너도.”

“자비로우십니다.”

로로는 그녀의 태도에 감탄하여 말했다. 그러나 릴리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아요. 원망하기에 폐하는 너무 좋은 반려이시거든요.”

그러니 그에게 자신도 좋은 아내이길 바란다. 행복한 왕으로 만들 자신은 없어도 행복한 남편으로는 만들 수 있다. 그것은 온전히 파니릴리, 그녀에게 달린 일이었으므로.

릴리는 로로와 함께 지하 묘지에 조금 더 머물다 하게너성의 안뜰을 산책했다. 성안에 여인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십중팔구가 사내였으며 그나마 눈에 띄는 여인들은 대부분 아주 어리거나 또는 아주 늙은 이들뿐이었다.

창녀로 팔려 나간 투로의 여인들이 아직 하게너의 성으로 돌아오지 못한 까닭이었다. 그곳의 삶에 이미 길들여졌거나 혹은 다시 돌아올 수 없을 만큼 먼 길을 갔기 때문일 거라고 로로는 말했다.

어느 노파가 만들어 준 향이 나는 과일주를 감사한 마음으로 마시고 있는데 누군가 그녀의 치맛단을 툭툭 잡아당겼다.

웬 계집아이였다. 성안 사람들이 그렇듯 아이 역시 검은 머리에 햇볕에 그을린 피부를 하고 있었다. 가을바람을 닮은 다갈색 눈동자는 너무도 맑고 깨끗하여 절로 미소 지을 수밖에 없었다.

“안녕.”

릴리는 다정하게 인사를 건넸다. 그러나 여자아이는 무표정하게 눈을 깜빡거리더니 천연덕스레 물었다.

“여왕님. 여왕님 머리카락 만져 봐도 되어요?”

천진한 물음에 릴리는 웃음을 터트렸다. 노파도 그녀를 따라 웃으며 아이에게 말했다.

“얘야, 여왕님이 아니라 왕비님이란다. 왕비 전하라 불러야지.”

아이는 행간을 구별하지 못한 듯 앙증맞은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릴리는 아이의 호기심에 답하기 위해 기꺼이 몸을 숙였다.

“자, 만져 봐.”

그러자 아이는 환한 얼굴로 고사리 같은 손을 뻗어 릴리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몇 가닥을 조심스레 쥐었다.

“와, 엄청 부드러워요. 왕비님은 머리카락에 별빛을 뿌리신 건가요?”

“글쎄. 잘 모르겠는걸.”

“저도 반짝이는 머리카락이 갖고 싶어요.”

아이는 푸성귀처럼 거칠고 질긴 제 곱슬머리를 긁으며 우울한 낯빛을 했다.

“이름이 뭐니, 꼬마야?”

“이스바요.”

이스바. 익숙한 이름이었다. 릴리는 아이의 보드랍고 말랑거리는 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난 이스바처럼 반짝이는 피부가 갖고 싶은걸.”

그 말에 아이는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렸다. 생전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볕에 잘 그을려 비단처럼 빛나는 네 피부 말이야. 봐 봐, 이스바. 꼭 진주를 개어서 발라 놓은 것처럼 빛나잖아.”

릴리는 볕 아래 아이의 보드라운 손등을 이리저리 기울였다. 릴리의 말대로 다갈색 피부에 빛이 닿는 곳마다 보드랍고 은은한 광택이 났다. 이스바로서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어때? 정말이지?”

릴리가 되묻자 이스바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커다란 눈망울을 굴리고 있었으나 전처럼 우울한 빛은 띠지 않았다. 대신 생경함과 호기심이 가득했다.

“그러니 소중히 여기렴. 언젠가 네 빛나는 피부에 마음이 빼앗긴 사내가 나타날 거야.”

“사내요?”

“그래, 사내. 어쩌면 미래의 네 남편이 될지도 모르지.”

부드럽게 휘어진 릴리의 눈꼬리를 보며 이스바는 눈동자를 연신 깜빡거렸다.

“…전… 고추가 있는데요.”

응?

“보세요.”

아이는 한 겹뿐인 블리오 자락을 위로 휙 걷어 올렸다. 거기엔 어린아이의 것이라고 하기에 그다지 앙증맞지 않은 모양의 것이 달려 있었다.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어요.”

릴리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카르낙은 낮게 웃으며 침대 발치에 앉아 호흡을 고르는 아내에게 과일주 한 잔을 건넸다. 발투만 국왕 부부를 맞이하는 환영 연회는 풍성하고 전체적으로 난잡했으며 몹시도 시끄러웠다. 그런 왁자지껄함을 즐겨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늘 고요한 곳에서만 자라 온 릴리에게는 얼마 지나지 않아 두통으로 번지고 말았다.

“투로족엔 계집이 드물어, 알잖아. 하물며 계집아이는 얼마나 드물겠어.”

“하지만 너무 예쁘게 생겨서요.”

그 커다란 눈망울 하며…. 그 여린 얼굴선이나 새초롬한 입술…. 보드라운 피부까지 어딜 보아도 여자아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불현듯 릴리는 카르낙의 어린 시절을 상상했다. 어린아이였을 때 그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지금도 특출난 미남자이니 어린 시절에도 별반 다르지 않았으리라. 어쩌면 꼬마 이스바보다 훨씬 더 예쁘장한 꼬마였을지도 모른다.

“투로들은 모두 유년 시절부터 특출난 외모를 자랑하나 봐요.”

자할이나 지금은 우락부락한 외형을 자랑하는 자파도 그 생김새만은 오목조목 균형이 잘 잡혀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우월한 유전자를 가진 이종족. 엘버그인들이 투로를 향해 품은 증오와 비틀린 욕망을 릴리는 이해할 수 있었다. 비록 용납할 순 없어도.

“아이의 이름이 이스바라고 하더군요.”

“…….”

카르낙은 침묵을 지키며 릴리의 옆에 앉았다. 그녀는 남편의 옆얼굴을 깊이 바라보았다.

“투로에겐 흔한 이름일까요? 이스바란 이름이요.”

카르낙은 한참 만에 답했다.

“그렇게 흔하진 않지. 그렇다고 아예 드물지도 않지만.”

“그렇다면 폐하와 같은 이름을 가진 투로도 어딘가에 있겠지요?”

그는 어깨만 한 번 으쓱해 보였다. 그다지 경계심이 가득한 얼굴은 아니었다. 예전처럼 거북하거나 불편한 기색이 다분해 보이지도 않았다.

“고향에 돌아온 기분이 어때요?”

아내의 물음에 그는 웃었다. 헛헛하고 다소 공허한 듯한 웃음소리였다.

“묘해. 낯익기도 하고 낯설기도 하고…. 예전과 그대로인 것도 있는 반면 내가 그토록 오래 떠나 있었나 새삼 깨닫게 되는 것도 많고.”

“밝고 눈부시고 광활하고…”

릴리는 이 넓은 영지에 들어서면서 떠올렸던 단어들을 하나씩 내뱉었다.

“뜨겁고 신비롭고. 아주 다른 듯하면서도 또 그리 다르지 않더군요.”

정답고 따듯한 사람들. 꾸밈없이 소탈한 노인들과 정직하고 정력적인 영지민들. 쾌활하고 호탕한 관리자들. 언제 어디서든 땀과 모래와 뜨거운 태양의 향이 났다.

“이곳은 당신과 아주 많이 닮았어요, 칼. 뜨겁고 신비롭고 눈부신 가운데 공허한 것까지 전부요.”

“…….”

카르낙은 고개를 돌려 아내를 보았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묘한 표정.

“놀리는 것인지 진심으로 하는 말인지 영 모르겠는데.”

그러자 히죽, 아내의 눈이 반달처럼 접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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