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더 이상 땅에 작물을 심을 수 없다면… 우린 이 영지를 포기해야만 해. 먹고살 만한 땅을 찾아 북쪽으로 올라가야만 할 거야.”
하게너의 성을 버린다. 상황이 안 좋아지면 그래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게너성 밖의 어디로 간단 말인가. 하게너성처럼 오랜 세월에 걸쳐 만들어진 완벽한 요새를 재현하기란 어렵다. 새로운 영지를 만들기 위해선 아주 오랜 시간, 아주 막대한 자본을 쏟아부어야 할 것이다. 그만한 돈과 물자를 어디서 구할 수 있단 말인가.
왕국 전체가 가뭄으로 인해 쇠락해져 가고 있는 이때에. 그렇다고 다른 영지에서 이 많은 수의 투로들을 받아 줄 리가 없다. 수도인 캘던도 그럴 여건이 못 된다. 결국 그런 때가 오면 이 영지민들은 뿔뿔이 흩어져야만 했다. 도시 하나가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도시 하나가 사라진다고 하여 이 가뭄이 멈출까. 그렇지 않다. 계속해서 땅은 메말라 갈 것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도시가 하나둘 사라지며 결국 땅은 다시 태초의 모습처럼 죽은 땅이 되고 말겠지.
카르낙이 물었다.
“얼마나 버틸 수 있겠어? 지금의 상태라면?”
자할은 자신의 턱을 매만지며 상태를 가늠했다.
“올겨울은 넘길 수 있을 거야. 그러나 내년은 장담할 수 없어. 너도 알겠지만 올해 불어온 모래 폭풍 덕에 추수할 수 있는 작물들이 거의 없거든. 그것으로라도 어떻게든 연명할 순 있겠지만… 사막의 엘버그인들은 올겨울을 버티지 못할 거야. 우리가 먹을 것을 주지 않는다면 모두 굶어 죽겠지.”
“하여간 쓸모없는 약골들이라니까. 평생 맨발로 흙 한 번 밟지 않고 산 놈들이니 말 다 한 거지.”
노예 사업은 하게너 영지의 절대적인 수입원이었다. 과거 투로들을 팔아 유반은 얼마나 많은 부를 축적했던가. 그것에 비하면 자금난에 시달리는 지금의 하게너성은 어이없을 지경이다.
“어린아이들은 모두 팔았어. 사막에 사는 것보다 차라리 어느 집 종놈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 살 만할 테니. 겨울이 오기 전에 쓸 만한 계집들도 모두 처분할 거야.”
“좋아.”
카르낙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은 방법이다. 조금이라도 값을 잘 쳐서 받을 수 있을 테고, 쓸모없는 것들은 알아서 도태되겠지. 앞으로도 하게너 영지로 끌려 들어오는 엘버그인들은 많을 것이다. 아직 테이먼 테르조와 그를 따르는 무리가 남아 있다. 그들을 거두어 해외로 팔아넘기면 조금 더 버틸 수 있을 것이다.
“로로는 당분간 이곳에 머물 거야. 현명한 노인이니 영지의 관리가 어려울 때 그의 도움을 구해.”
자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럴게. 로로는 얼마나 이곳에 머물 거지?”
“글쎄.”
카르낙은 투박한 컵에 든 에일을 마시며 답했다.
“모르겠어. 그의 몸이 건강해질 때까지겠지.”
“최선을 다해 그를 보살필게, 카르낙. 맹세해.”
자할이 그의 등을 두드렸다. 카르낙이 반란을 일으켜 왕좌를 차지한 때 그는 겨우 열아홉이었다, 그때의 카르낙은 어딘지 균열이 가 있는 쇠 같았다. 담금질이 채 되지 않은 거친 무쇠 같았다.
그 모습은 3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했다. 검게 그을린 피부에선 젊음의 풋내가 났고 처연한 보라색 눈동자에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싱그러움이 가득했다. 자할은 그를 사랑했다. 그를 존경하고 숭배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저보다 열 살은 족히 어린 왕이 감히 다른 이들은 꿈도 꾸지 못할 것을 이루어 냈다. 그를 우러러보지 않을 투로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자할은 카르낙의 연약함에 대해서도 잘 알았다.
언젠가 여지없이 무너져 펑펑 울 것만 같은 눈매 역시 가지고 있었다. 붉고 보기 좋은 입술은 언제든 바르르 떨릴 준비가 된 것 같았다. 그러한 위태로움이 그가 가진 마력이었다. 지켜 주고 싶고, 무너지지 않도록 지지해 주고 싶고, 감히 그를 위해 무엇이라도 희생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단단한 껍데기 안의 그 연약한 영혼 때문이었다.
그 영혼 안에 로로가 차지하는 자리는 무척이나 클 것이다. 그러니 약속하는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네가 무너지도록 내버려 두진 않겠노라고,
하게너성은 대체로 어디든 어두웠다. 로로가 말하길 워낙 더운 지역이라 볕을 차단해 온도를 내리기 때문에 부러 이토록 어둡게 지은 것이라 했다. 벽은 대부분 어두운 흑색이었고 드문드문 상아색으로 칠해진 기둥이나 벽들이 보였다. 전체적으로 하게너의 성은 성채라기보다는 토굴에 가까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천장이 아주 높고 기하학적 무늬가 가득해 기묘한 토굴.
“영주가 돈이 되는 귀중품은 모두 처분한 모양입니다. 전하.”
로로가 텅 빈 복도를 거닐며 말했다. 그가 말할 때마다 복도가 메아리쳤다.
“그런가요?”
“예. 원래 벽이 보이지 않을 만큼 많은 귀중품들이 장식되어 있었는데 말이죠.”
과거 하게너성의 화려함이 로레인 하게너의 취향은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냥 막연히 그것은 유반 하게너의 취향일 것만 같았다. 릴리는 차가운 벽을 손으로 짚어 보았다. 흙으로 만든 벽은 무척이나 단단하고 견고했다. 어쩌면 캘던성보다 더 단단할지도 모르겠다.
드문드문 나 있는 아치형 창밖으로 분주한 성의 안뜰이 보였다. 볕을 가리기 위해 베일을 쓴 여인들이 불을 지펴 무엇인가를 요리하고 있었다.
“‘푸치’라고 합니다, 전하. 곡물 가루를 반죽해서 만든 요리로 여러 가지 채소와 곁들여 먹지요. 오늘은 특별히 돼지고기와 함께 나올 겁니다. 귀한 손님이 오셨으니 과일도 빼놓지 않겠죠.”
“하게너에선 과일과 고기가 귀하군요.”
“신선한 과일은 금만큼의 가치가 있습니다, 전하. 또한 닭이나 돼지고기 또한 마찬가지지요. 척박한 땅에서 살아남기 쉽지 않은 가축이거든요. 대신 양고기는 아주 흔하답니다. 양고기가 귀한 캘던과는 다소 다르지요?”
“네. 그렇네요.”
“아아, 여기로군요. 전하.”
로로가 지하로 통하는 입구를 가리켰다.
“저곳에 어머니의 묘지가 있나요?”
“예, 전하. 어두우니 조심하십시오.”
시종 한 명이 횃불 하나를 밝혀 앞장섰다. 릴리는 로로를 부축하며 천천히 그의 뒤를 따랐다.
로레인의 묘로 향하는 길은 시종일관 어둡고 좁았다.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 이토록 어둡고 좁은 곳에 무덤을 만들었을까. 자신이 아는 한 죽은 자를 묻는 곳은 대부분 볕이 잘 들고 따듯하며 습하지 않은 양지바른 곳이었다. 때가 되면 꽃과 풀과 나무가 자랄 수 있는 곳 말이다.
“로로, 당신이 넘어질까 걱정되는군요.”
릴리가 뼈밖에 남지 않은 그의 팔뚝을 꼭 쥐며 말하자 로로는 껄껄 웃었다.
“전하께서 함께 넘어지시지만 않으면 괜찮습니다.”
“차라리 함께 넘어지는 것이 낫겠어요. 아니면 저 혼자 구르든가요. 여긴 성한 사람도 왕래하기 어려운 곳이에요.”
“그러니 무덤으로는 더욱 안성맞춤 아니겠습니까.”
로로는 계단을 한 칸씩 내려갈 때마다 제 무릎을 짚으며 말했다.
“부장품을 탐하여 도굴하기엔 힘든 곳이지요. 그러니 귀한 분의 영면을 오랫동안 지켜 드릴 수 있지요. 또 뜨거운 볕을 피해 서늘하고 어두운 곳에 묻혔으니 죽어서도 더위와 갈증에 시달릴 일 역시 없고요.”
아, 그래. 그렇지. 엘버그에선 무엇보다 불과 뜨거움을 싫어하지. 자신의 생각이 짧았다. 엘버그인들은 모두 어둠 속에서 빛나는 아마네스 여신의 아이들. 그들에게 깊은 어둠과 차가운 눈은 신비함과 안식의 상징일 터였다. 하물며 이 깊은 무덤의 주인은 로레인 하게너. 어쩌면 이것은 카르낙이 할 수 있는 로레인에 대한 최선의 배려와 존경일지도 모른다.
“여깁니다. 전하.”
시종이 횃불을 들고 멈춘 곳은 지하의 깊은 암굴 앞에서였다. 검은 바위의 표면을 깎아 로레인 하게너의 이름을 조각한 후 금색 염료를 덮어 만든 그녀의 비석은 마치 어둠 속을 밝히는 별빛 같았다.
“로레인 하게너의 주검은 이 아래에 묻혀 있습니다.”
제단처럼 층층이 돌이 쌓여 있었다. 양옆에는 무덤을 밝힐 초들이 빙 둘러져 있었고, 각각의 돌에는 모두 달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었다. 보름달에서 초승달까지, 매일 조금씩 변하는 그 모습을 모두 제각기 다르게. 그 앞에서 릴리는 말을 잃었다.
그는 분명 로레인 하게너를 자신의 손으로 죽였다고 말했는데. 가차 없이 죽인 것처럼,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죽인 것처럼 그는 냉철하고도 비정한 어투로 말했었다. 그러고는 때때로 언급하는 것조차 싫어했었다.
릴리는 그것이 자신이나 에이가에 대한 죄책감 때문일 것이라 생각했다. 아내의 모친이자 에이가가 사랑해 마지않던 주인인 로레인 하게너의 무덤을 만들어 준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라 생각했다.
에이가를 달래기 위해, 자신의 편으로 만들기 위해 택한 방책 정도라고 말이다. 하지만 이 무덤은 그것치고는 너무나 과하다. 하게너성 가장 아래, 가장 깊고 내밀한 곳에 이토록 공을 들여 만들어 놓은 무덤이란 마치…
“놀랍네요, 로로. 이 무덤은… 꼭…”
“이 성의 주인 같죠.”
맞아. 꼭 그래. 이곳은 꼭 이 성의 주인이 로레인 하게너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하나부터 열까지 이 하게너성의 뿌리는 이곳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이다.
“그래서 만든 겁니다, 전하. 발투만 폐하께서는 이 성은 로레인 하게너의 것이라 말씀하셨죠. 지금도 그렇게 믿고 계십니다. 이 땅은 로레인 하게너의 것이라고요. 투로가 차지하건, 아니면 다시 엘버그인의 땅이 되건 그것만은 변치 않을 겁니다. 누구도 감히 이 무덤과 이 비석은 없없애지 못할 테니까요.”
“…폐하는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신 걸까요. 당신 손에 죽은 여자인데.”
“폐하는 한 번도 로레인 하게너를 여인으로 대한 적이 없답니다.”
“…….”
“그녀를 하게너성의 부속물이 아닌 성의 주인으로 대하셨지요. 로레인 하게너도 그것을 원했답니다. 여인이 아니라 대등한 인간으로서 끝을 맞이하고 싶어 했지요.”
“…카르낙 발투만의 손을 통해서요.”
“예, 전하. 그렇답니다.”
바보 같은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대등한 인간 대접 따위 목숨보다 귀하지 않다고 여길 수도 있다. 한심하고 멍청하다 비웃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릴리는 로레인 하게너를 이해할 수 있었다. 아니 그녀의 선택이 오히려 그녀의 가슴속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로레인 하게너가 자신의 생을 걸고 간절히 원했던 것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 누군가의 부속품이나, 누구에게서 파생된 것이 아닌, 소나 닭이나 돼지나 금화처럼 사고팔 수 있는 재산이 아닌 사람으로서의 가치였다.
그러니 그것을 위해 삶을 내려놓았으리라. 고통에 몸부림치는 생보단 가치 있는 죽음을 택한 거였다. 그것을 릴리는 이해했다. 그녀가 믿는 것도 그와 다르지 않으므로. 그녀가 평생 배우고 느끼고 보고 깨친 것도 로레인 하게너가 간절히 원했던 것과 다르지 않으므로.
“훌륭한 분이셨지요, 로레인 하게너는. 남자로 태어났다면 필시 큰 인물이 되셨을 겁니다. 왕비 전하께서는 어머니를 정말 많이 닮으셨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