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진심이에요. 이곳에 와서 당신을 좀 더 잘 알게 된 것 같아요. 어디를 보든 카르낙 발투만이 느껴지거든요. 이곳의 사람들은 모두 당신과 닮았어요, 칼. 말하는 어투나 웃는 얼굴이나 웃음소리나 대화할 때의 제스처 같은 것도 전부 다 당신과 비슷해요. 그 보라색 눈동자만 빼면요.”
“…….”
“모두 다갈색 눈동자를 하고 있던데요.
“…….”
“이스바의 눈동자도 다갈색이었나요? 아니면 당신과 같은 색이었나요?”
“…녀석의 눈동자는 새까맸어. 칠흑 같은 밤처럼.”
그가 처음으로 이스바의 구체적인 모습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날 선 반응을 보이거나 그다지 조급하게 굴지도 않았다. 이스바에 대해 떠올리는 카르낙의 모습은 자못 평안해 보이기까지 했다.
“사막의 밤은 아주 짧아. 그 짧은 시간 동안 세상에 새까만 어둠이 드리워지면 비로소 영영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뜨거움이 조금씩 사그라들지. 이스바도 그런 인생을 살았다고 생각해. 짧고 평온하고 아득한 삶.”
“그 친구가 그립진 않으세요?”
특히나 이렇게 함께했던 곳에 근접해 있을 때라면 말이다.
“그다지.”
그는 짧게 답하고 반쯤 채워진 잔을 빙빙 돌리는 것에 골몰했다. 그러다 다시금 입을 열었다.
“이스바의 죽음이 아니었더라면 난 이곳에 없었을 거야. 여전히 먹을 것을 찾아 사막을 헤매고 하게너 영주의 손에 잡히지 않으려 도망 다니고 있었겠지. 그랬다면…”
그랬다면 로레인 하게너. 그 여자를 내 손으로 죽일 일도 없었겠지, 릴리. 어쩌면 네 모친은 천수를 다 누리고 죽었을지도 몰라.
“지금쯤 난 어딘가에 노예로 팔려 갔을 거야. 그것도 아니면 벌써 하게너의 손에 죽었을지도 모르지. 내 인생도 이스바와 별반 다를 게 없었어. 차라리 놈이 나를 먼저 죽였다면 투로가 왕이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겠지. 그로 인해 피눈물을 흘리며 고통받을 일도 없었을 테고 말이야.”
릴리가 조심스레 카르낙의 허벅지 위에 손을 올렸다. 그 다정하고 친밀한 접촉을 카르낙은 참으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폐하는 어떤 경우에도 왕이 되셨을 겁니다.”
진심이었다. 그녀는 확신에 차 있었다.
“어떤 운명은 아무리 꺾이고 채이고 밟혀도 결국 이루어질 만큼 강하거든요. 폐하께선 그런 운명을 타고나신 거예요.”
“난 그저 바닥을 기어 다니던 벌레였을 뿐이야.”
카르낙은 머쓱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선택한 것이 아니다. 왕이 되려고 결심했던 것도 아니다. 살아남기 위해선 기어서라도 꼭대기에 올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살기 위해 몸부림치다 여기까지 온 것뿐이야. 그렇게 휘말리는 것도 운명이라면 분명 운명일 테지. 비록 꿈꿔 온 것은 아닐지라도.
“아주 빛나는 벌레이셨겠죠. 폐하가 가진 빛은 폐하 당신의 것이에요. 결코 왕좌가 만들어 준 후광이 아니랍니다.”
“…….”
그는 천천히 눈을 들어 확신에 찬 제 아내의 두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신실한 빛으로 흔들림 없는 그것을 응시하고 있자면 진실로 그렇다고 믿고 싶어진다. 사탕발림일 뿐이라고 스스로 되뇌면서도 결코 그 달콤함에서 헤어날 수가 없다.
“릴리.”
카르낙은 릴리의 보드라운 뺨과 가녀린 턱선을 손으로 부드럽게 쓸었다.
“네가 나를 그만 녹였으면 좋겠다.”
단단하고 견고하던 것이 너무 말랑거려 종국엔 모두 녹아 없어질까 두렵다. 그럼에도 외면할 수 없겠지. 불빛에 뛰어드는 나방처럼 그 기쁨과 쾌락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 분명하니까.
***
카르낙의 말대로 이곳의 밤은 무척이나 짧았다. 해가 지기 전에 잠들었다가 짧은 토막 잠을 자고 일어났을 때는 이미 해가 하늘 꼭대기에 걸려 있을 때였다.
릴리는 곤히 잠든 카르낙의 천진한 얼굴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홀로 로레인의 묘지를 한 번 더 가 볼까, 하는 생각에 방 밖으로 나왔다.
이른 아침부터 성안은 소란했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 릴리는 제 앞을 가로질러 가는 사람 하나를 붙잡고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결투예요! 결투!”
사내는 두건을 손에 쥔 채 조급하게 대답했다. 흥분으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결투? 갑자기? 성안에서?
“구경거리를 놓치고 싶지 않거든 왕비님도 서두르시는 게 좋을 겁니다!”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걸음을 재촉했다. 몇 마디를 더 묻고 싶었지만 그럴 틈이 없었다. 릴리는 하는 수 없이 인파에 섞여 그들을 따라 이동했다. 성의 안뜰에 사람들이 가득했다.
릴리는 안뜰이 내다보이는 회랑 2층 난간에 다다랐다.
“전하.”
핀이 먼저 릴리를 발견하고 인사를 건넸다. 그는 편안한 차림이었다. 무장하지 않은 그의 모습이 낯설어 잠시 멍하게 쳐다보다가 릴리는 그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어떻게 된 일이에요?”
“재판을 한답니다.”
핀이 안뜰을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막 두 명의 사내가 손에 날붙이를 든 채 자리를 잡고 있었다. 거리를 벌리고 선 두 사내 사이에 자할이 있었다.
무더운 날씨에 사내들은 옷을 껴입는 대신 헐벗은 상반신에 진흙을 바른 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콧등과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혀 있었다. 릴리의 목덜미에도 주르륵 땀이 흘렀다.
“결투를 한다고 하던데요.”
“이곳에선 결투가 곧 재판이라 하더군요.”
핀이 팔꿈치를 난간에 얹으며 대답했다. 릴리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떻게 재판이 결투가 될 수 있느냐 물으려던 찰나, 마침 자할이 목청 높여 외치기 시작했다.
“여기, 자신의 아내와 정을 통한 알탄을 처단하고 싶다는 루거와 루거의 아내를 자신의 처로 들이고 싶다는 알탄의 요청에 따라 나 하게너의 영주 자할이 결투를 진행한다!”
자할의 말이 한 번에 이해가 되지 않아 릴리는 눈을 가늘게 떴다.
“둘 중 살아남은 자가 여자와 재산과 지위를 차지할 것이다!”
마주 선 사내 둘의 안광이 번뜩였다. 장내는 흥분으로 가득했으나 릴리만은 이 비현실적인 광경에 동조할 수가 없었다.
“이건, 이건 불공평해요!”
릴리는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다. 이게 어떻게 재판이 될 수 있는가. 전혀 공평하지 못한 처사였다.
“시작!!”
자할이 힘껏 외치고 뒷걸음질을 치자 기다렸다는 듯 사내들의 날붙이가 부딪혔다.
“핀!”
릴리는 핀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마치 이 상황을 말려야 한다는 듯 말이다. 그러나 핀은 그럴 마음이 없었다. 설령 누군가가 중재할 수 있다고 해도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 이곳에는 이곳만의 절차와 방식이 있다. 그것을 거스를 수는 없다.
승기는 순식간에 기울었다. 광대뼈에 푸른색 문양이 화려하게 그려져 있는 사내가 제 어깨도 채 넘지 못하는 체구의 말총머리 사내의 가슴팍을 순식간에 갈라 버린 것이다. 릴리는 제 입을 틀어막으며 뒤로 주춤 물러섰다. 눈앞에서 사람이 두 쪽으로 갈라지는 것을 보자 정신이 혼미하였다.
자할은 더없이 호탕하고 시원하게 웃었다. 관중들이 손뼉을 치며 사내의 이름을 연호했다.
알탄! 알탄!
“루거의 처와 그의 재산은 이제 모두 알탄의 것이다!”
자할이 알탄의 손을 들어 주자 작고 거무스름한 여자가 뛰쳐나와 와락 그의 목을 껴안았다. 그녀의 남편은 온전치 못한 주검이 되어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데도 아랑곳없이 사내의 목에 매달린 채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그 사내의 몸을 적시는 피가 누구의 것인지 제대로 알고는 있는 것일까. 제 남편에게서 나온 것이다. 그것은 아직도 뜨거울 터였다. 그럼에도 일말의 슬픔이나 동정조차 보이지 않는다. 아내조차 슬퍼하지 않는 이의 죽음을 누가 슬퍼해 주겠는가. 모두가 새롭게 짝지어진 두 남녀를 축하해 주느라 여념이 없었다. 마치 결혼식이라도 치르고 있는 듯한 착각이 일 정도였다. 망자에 대한 예의도 없었다.
분명 그 역시 누군가의 친구이며 형제였을 텐데 이미 루거라는 사내의 존재는 완전히 잊혀진 듯했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자 같았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처사예요.”
릴리는 도리질을 하며 중얼거렸다.
“정말 말도 안 돼요. 전혀 공정하지 못해요.”
처벌을 받아야 할 사람은 혼인한 여자와 정을 통한 사내다. 억울함을 호소하며 동정받아야 마땅한 이는 죽은 루거다. 만일 누군가 죽어 송장이 되어야 한다면 그렇게 되어야 할 사람은 알탄이어야 하고 말이다.
“이곳 사람들은 모두 공정하다 생각하는 것 같은데요.”
핀은 제 입가에 떠오른 웃음도 가리지 못한 채 대답했다. 그런 핀도 릴리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이런 식으로 쉽게….”
너무나 쉽게 사람을 죽인다. 그것을 방지하고 만류해야 할 영주란 자는 오히려 나서서 판을 깔아 준다. 미개한 방식이다. 이런 식이라면 짐승과 다를 바가 없다. 아무리 캘던과 떨어진 사막의 도시라 한들 이토록 사회의 구조와 제도가 다르단 말인가. 지성과 도덕으로 판가름해야 할 일을 오로지 힘과 본능에 맡기다니.
“이것은… 이것은 투로의 방식인가요?”
릴리는 애써 침착한 투로 물었다. 이것이 투로의 방식이라면 곧 카르낙 발투만의 근간을 이루는 뼈대이기도 했다.
“네. 그럴 겁니다, 전하. 이곳은 이제 투로의 성이니까요.”
투로에겐 여자가 귀하다. 여자가 귀하기 때문에 그를 두고 잦은 다툼이 일어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여자는… 누구보다 강한 사내를 자신의 남편으로 맞이하고 싶어 하리라. 생존과 번영의 본능이었다. 강한 짝을 만나 우월한 유전자를 후대에 물려주려는 것은 말이다.
이런 환경 속에서 카르낙 발투만이 성장했다. 무질서하고 저들끼리 칼을 겨누다 언제 죽어도 이상치 않은 상황 속에서. 무자비하기로 소문이 난 발투만 왕의 방식은 그 개인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를 둘러싼 집단의 문제였다. 과연 이러한 배경이 발투만의 왕위를 굳건하게 지지해 줄 수 있을까. 그에게 도움이 되는 환경일까?
“어떠십니까, 전하. 이제 국왕 폐하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되셨는지요?”
핀의 목소리에는 조소가 섞여 있었다. 이것이 카르낙과 그를 둘러싼 사내들이 공유하는 그들만의 세상일까. 난폭하고 단순하고 무자비하기 그지없는 세상이었다. 자신이 살아온 세상과는 너무나 다르다. 그곳에서는 비록 하찮은 존재일지라도 죽음을 맞게 되면 함께 슬퍼하고 아파하고 영면을 기원했다.
서로 부둥켜안고 체온을 나누며 그렇게 죽음에서 온기와 희망을 얻고는 했다. 그러나 이곳에서 죽음이란 발밑에서 채는 돌부리와 다름이 없는 것이다. 성가시면 치워 버리면 그만인 것이었다. 아직 까마득하다. 아직도 갈 길이 멀었다. 카르낙 발투만의 세상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릴리가 다시 방으로 들어섰을 때 카르낙은 잠에서 깨어나 막 식사를 하던 참이었다. 그는 자신이 깨어나길 기다린 자파와 마주 앉아 일찍부터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벌컥 문을 열고 들어선 릴리는 자파의 몸에 밴 지독한 알코올 냄새부터 맡아야 했다.
“왕비 전하!”
호쾌하고 우렁찬 목소리였다. 자파는 술잔을 번쩍 들며 그녀를 반겼다.
“어때요! 전하! 같이 한잔하시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