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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발 아래 은빛 눈-109화 (109/231)

109화

“자파! 자파!”

이 빌어먹을 벌레 놈 어디 있어! 자할은 온 성안을 뒤지다가 설마설마하는 마음에 마구간으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놈은 거기서 발견되었다. 건초 더미에 널브러진 알몸뚱이에서 술 냄새가 질펀하게 피어올랐다.

“자파!”

드르렁드르렁, 코 고는 소리가 요란했다. 정말이지 지긋지긋한 풍경이다. 자할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간밤에 그가 아무렇게나 벗어 던져 놓은 옷 뭉치를 그에게 집어 던졌다. 철퍽, 하는 소리를 내며 안면을 강타하자 그제야 자파는 ‘컥’ 하며 잠에서 깨어났다.

“일어나 이 빌어먹을 주정뱅이야!”

자파는 인상을 찡그리며 제 헝클어진 머리를 벅벅 긁었다.

“…몇 시야.”

“카르낙이 왔어! 그가 도착했다고!”

오오, 드디어?

“그것 봐. 기다리면 으레 알아서 올 거라고….”

“빨리 일어나서 옷을 입고 그를 맞을 준비나 해! 이 멍청아! 발가벗고 왕을 맞이할 셈이야?”

“그놈은 그런 거 신경 안 써. 벗고 맞이하든 입고 맞이하든 똑같이 더럽다고 할 놈이야.”

“이제 그는 엘버그의 왕이야. 하게너성을 떠날 때와는 완전 다른 신분이라고. 그러니 어서 옷을 입어, 자파. 그가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도 네 목이 날아간단 사실을 명심해야 할 거야.”

젠장. 자파는 투덜거리며 주섬주섬 옷을 챙겼다. 대충 바지를 끌어 올려 질끈 동여매고 간신히 발끝만 부츠 안에 넣은 채 일어나 어기적어기적 마구간을 걸어 나왔다.

왕을 맞이하기 위해 하게너성의 도개교가 내려졌다. 쇠사슬이 덜커덩거리며 굴러가는 소리가 요란하였다. 해가 벌써 중천에 뜬 시간이었다. 자파는 인상을 찡그리며 블리오에 머리통을 끼워 넣었다. 그가 지나갈 때마다 사람들이 인상을 찡그렸다. 지독한 술 냄새가 풍기는 것이 틀림없었다.

“물러서! 물러나라! 폐하께서 지나가실 길을 만들어!”

말을 탄 병사들이 몰려드는 인파를 정렬시키느라 열심이었다. 그 가운데 자할이 있었다. 윤기가 흐르는 갈색 말을 탄 그는 판금 흉갑 위에 붉은색 망토를 두르고 비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자파는 종자가 준비해 둔 그의 하얀 말 위에 올라탔다. 몸이 무거워 끙차, 하는 소리가 절로 났다.

“자파님. 망토는….”

“필요 없어. 더워 죽겠는데 망토는 무슨.”

말도 타기 싫은데. 그러자 종자는 미리 준비해 둔 망토를 품에 꼭 안고 뒤로 물러났다. 자파는 말 머리를 돌려 자할의 옆에 나란히 섰다. 긴장감이 가득한 얼굴로 흘깃 옆을 살핀 자할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정말이냐, 자파. 그게 네 최선이야? 그 복장이?”

“그래.”

“확실해?”

“유난 좀 그만 떨어라, 자할. 하게너성의 영주가 되더니 네가 엘버그인이라도 된 줄 아는 모양인데, 우리가 투로란 것을 잊으면 안 되지. 우리에겐 적당히 더럽고 무식한 게 어울려. 그러니 점잔도 적당히 빼.”

혼란한 가운데 다시 한번 뿔 나팔이 울렸다. 자할은 말의 옆구리를 차 도개교로 향했다. 휘날리는 검은 깃발과 함께 새까만 말을 탄 채 검은 망토를 휘날리는 카르낙 발투만은 아주 멀리서도 그 형태가 선연히 드러났다. 화려한 행렬들 사이에서 어둡고 짙은 행색은 오히려 위압감을 자아냈다.

자할은 숨을 죽이고 왕이 가까워지기를 기다렸다. 한때는 사막에서 함께 생존했고 한때는 등을 맞대고 함께 싸웠던 형제. 어린 나이였지만 그 어떤 투로보다 강인하고 지혜로워 아무도 그의 명령에 이견을 달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어질 땐 아직 젖살이 채 빠지지 않은 풋풋한 소년 같던 아이가 이제는 완연한 사내가 되어 돌아왔다. 전보다 더 다부지고 강인한 남자가 되어. 엘버그 왕국의 왕이 되어. 어쩐지 가슴이 벅차 자할은 숨을 몰아쉬었다. 카르낙이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그의 가슴은 더욱더 가쁘게 들썩였다.

카르낙이 도개교 가까이 다가오자 그는 주저 없이 펄쩍, 말에서 뛰어내렸다. 카르낙의 얼굴엔 환한 미소가 가득했다. 그 역시 말에서 내려 저를 향해 다가오는 형제를 맞이했다.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힘껏 껴안았다.

“자할.”

“국왕 폐하.”

그러더니 주섬주섬 말에서 내리는 자파를 발견하고 카르낙은 웃음을 터트렸다.

“자파!”

“카르낙 국왕 폐하! 이 빌어먹을 꼬맹이!”

자파는 어느새 훌쩍 자라 버린 카르낙을 강하게 안았다. 예전 같으면 그 부러질 것 같은 허리를 껴안고 단번에 들어 올리고도 남았을 텐데 이제 그 꼬맹이는 저의 키를 훌쩍 넘어 버리고 말았다.

“젠장. 내 키가 쪼그라든 모양이야!”

“여전하네, 자파. 냄새가 지독한 것도 여전하고.”

그러자 자파는 제 바지춤을 추켜올리며 껄껄 웃었다.

“아무렴. 사람이 어디 그렇게 쉽게 변할까. 세상엔 변하지 않는 것도 있어야 하는 법이거든요, 폐하.”

“말에 다시 오르십시오, 폐하. 제가 성안까지 모시겠습니다.”

자할이 예의를 갖춰 말했다. 카르낙은 기쁘게 그의 말을 따랐다.

검은 깃발을 든 기수와 왕의 근위대가 도개교를 건너 하게너성에 들어섰다. 릴리는 창밖으로 흩날리는 꽃잎들을 바라보았다. 흐드러지게 날리는 꽃잎은 마차 안에도 밀려 들어왔다.

“왕비님을 위해 뿌리는 것이랍니다.”

릴리가 제 무릎에 떨어진 장미 잎을 집자 로로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사람들의 환호성이 들렸다. 박수와 휘파람 소리. 발투만을 부르며 칭송하는 목소리.

이곳이 하게너성인가. 로레인이 살았고, 또 저를 낳았으며, 그리고 카르낙의 손에 죽어 묻힌 곳. 자신이 태어나 피로 이어진 곳. 푸르고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위 태양이 눈부셨다. 붉고 하얀 꽃잎들은 마치 눈송이처럼 날렸다. 덥고 건조하며 광대한 영지 그리고 이곳에 투로들의 사막이 있었다. 모든 것이 시작된 곳이다.

마차가 멈추고 잠시 후 덜컥 문이 열렸다. 카르낙이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의 옆으로 그와 같은 검은 머리를 한 사내 둘이 보였다. 한 명은 날렵하고 진중한 인상이었고, 한 명은 북슬북슬한 털북숭이 같은 인상이었다. 릴리는 카르낙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렸다.

“소개하지. 이쪽은 내 아내이자 엘버그의 왕비. 파니릴리 발투만.”

파니릴리의 새하얀 자태에 모두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쪽은 하게너성의 영주인 자할, 그리고 그의 심복인 자파야.”

정말이었다. 아마네스 여신의 현신 같다더니. 카르낙 발투만은 정말로 신의 아이와 결혼을 한 것이다. 보고서도 믿기지 않는 광경에 전율이 흐를 정도였다. 자할은 몇 번이고 입을 벌렸다 다물기를 반복했다. 자파가 멍하게 중얼거렸다.

“…이런, 염병할. 정말 신의 아이잖아.”

자파의 욕설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자할은 냉큼 고개를 숙여 왕비에게 예의를 갖췄다.

“용서하십시오, 전하. 배운 것이 없는 놈이라 말실수가 많을 뿐, 본성은 선한 자입니다.”

그러더니 자파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내리눌렀다. 그 힘에 비틀거리며 자파는 강제로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릴리는 웃으며 말했다.

“반가워요. 자할, 자파. 국왕 폐하의 친우분들을 만나 기뻐요.”

자파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자할이 다시 그의 머리채를 쥐고 힘껏 내리눌렀다. 자칫 앞으로 꼬꾸라질 뻔하였다.

뒤이어 로로가 마차에서 내렸다. 자할과 자파의 얼굴이 환해졌다.

“로로!”

말리기도 전에 자파가 고함을 치며 종잇장 같은 로로의 허리를 안아 들었다. 노인은 컥 소리를 내며 맥없이 들렸다.

“로로! 이게 얼마 만이야! 로로! 이 늙은이! 그동안 잘 있었어?? 못 보던 새에 더 쭈글쭈글해졌구만! 하하하하!”

급기야 자파는 그를 안고 빙빙 돌기 시작했다.

“…하게너성에 도착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자할은 어금니를 꾹 물었다. 릴리와 카르낙은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하게너성에 도착하여 짐을 푼 후 일행은 간단하게 요기를 했다. 그 후 릴리는 로로와 함께 하게너성의 안뜰을 산책했고, 카르낙은 접견실에서 지난번에 잘라 둔 산적 우두머리의 머리를 꺼내 놓았다.

“…….”

자할은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놈의 머리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고 자파는 깔끔하게 잘린 머리의 절단면을 살피며 감탄했다.

“하여간 칼부림은 잘한단 말이지.”

“영지 근처의 폭포수 주변에서 도적질을 하던 놈이야. 이 성에서 추방되었다고 하더군. 날 알아보지도 못했고 관심도 없어 보였어.”

자파와 자할은 좀 더 유심히 머리통을 쳐다보며 누군지 기억해 내려 했지만 실패했다. 이 영지에서 추방당한 놈들이 너무 많은 탓이었다. 자파는 혀를 찼다.

“정말 머저리 같은 놈이군. 검은 망토와 검은 깃발이 발투만 왕의 상징인지도 몰랐다니.”

“그게 문제가 아니야, 자파. 놈은 상대가 누구든 가리지 않고 덤볐어. 기억나? 그때 넌 분명 내게 다짐했어. 이 영지를 투로들의 고향으로 만들겠다 했지. 검은 피부에 검은 머리를 가진 이라면 누구든 차별 없이 서제로 받아들여 아낌없이 베풀겠다고 했어. 이곳만큼은 투로들의 지상 낙원으로 만들겠다고 분명 내게 그렇게 약속했어. 그렇지?”

자파는 자할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마른 입술 각질을 초조하게 손톱으로 뜯고 있다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어쩔 수 없었어, 카르낙. 영지를 유지해 나가는 것은… 말처럼 그렇게…그렇게 쉬운 게 아니야.”

“그래. 잘 알지, 자할. 나도 내 영지를 가지고 있거든. 엘버그라고 하는 아주 큰 대륙이지. 그 안에 이 빌어먹을 땅덩어리도 들어가 있지, 아마?”

자할이 테이블을 손으로 콕콕 찍으며 한 단어 한 단어 힘주어 뱉었다.

“넌 여전히 정복 전쟁 중이지만 이곳은 달라. 이곳은 불필요한 균열과 갈등을 억누르는 것으로 유지해야 하고, 그걸 위해서라면 재화의 재분배와 새로운 질서가 필요해. 더는 사막에 살던 투로들처럼 제각각 알아서 살아갈 순 없다고,”

“사막에 있을는 동안에는 적어도 투로끼리 죽이진 않았어. 난 내가 살기 위해 놈을 죽여야 했고, 놈은 이곳에서 추방당하는 바람에 도적질을 한다고 했어. 그리고 넌 내게 투로의 지상 낙원을 만들겠다고 약속했잖아. 이젠 여기에도 신분이 존재하나? 고귀한 투로와 고귀하지 않은 투로로 나뉘는 거야? 누가 더 머리가 검고 누가 더 피부가 까만가를 비교하면서?”

보다 못한 자파가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투로들은 굶주려 가고 있어, 카르낙.”

자할에게 향하던 카르낙의 맹렬한 눈이 이번엔 자파에게로 돌아갔다.

“뭐라고?”

“캘던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말이야. 사막은 점점 더 넓어지고 있어. 하게너의 영지는 점점 더 좁아지고 있고. 그리고 엘버그인들은… 투로들만큼 사막의 기온을 견디지 못하는 약골들이라 금방 뒈져 버려. 병든 닭처럼 걸핏하면 픽픽 쓰러져서 제값을 쳐서 팔아먹지도 못한다니까.”

자할이 마른세수를 하며 자파의 말을 이었다.

“작물은 점점 더 수확하기 힘들어지고, 어디서 무슨 소문을 들었는지 영지 안으로 점점 투로들이 몰려들어. 전혀 본 적도 없는 놈들이 계속해서.”

카르낙도 캘던에 있을 때 사막이 아닌 곳에서 자라난 투로를 직접 본 적이 있었다. 투로들의 낙원이란 소문에 모두 살기 위해 하게너의 영지로 몰려드는 건가. 하기야 엘버그인들이 투로 계집의 배를 빌어서 뿌린 씨앗이 한둘이겠는가. 그 중 다시 사막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숨죽여 살던 씨들이 전국에 널렸으리라.

“놈들에게는 동족에 대한 동질감이나 유대감 따윈 없어. 똑같은 것은 겉모습뿐, 잇속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지.”

그의 말에 자파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놈인지는 모르지만 영지 밖으로 추방당했다면 분명 외지에서 온 놈들일 거야. 자할은 영지민들에게 해악을 끼치지 않는 이상 함부로 투로를 쫓아내지 않아.”

“…어쩌면… 이 영지를 버려야 할지도 몰라, 카르낙.”

자할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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