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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발 아래 은빛 눈-89화 (89/231)

89화

석양의 열매는 왕과 왕비를 위한 진상품이었다. 금은보화보다 값비싼 것을 먹을 수 있는 특권은 오로지 왕과 왕비에게만 있었다.

그런데 무슨 영문인지 발투만 왕비는 이 귀하디귀한 열매를 저보다 하찮은 이들의 손에 쥐어 주며 그것을 먹어 보라 권하고 있었다. 그것도 당신은 오로지 딱 한입만 베어 드셨으면서 제 신하들에게는 열매 하나를 통째로 내주는 것이다.

아깝지도 않은가. 그렇게 다 나누어 주면 또 언제 맛볼 수 있을지 모르는 귀한 것인데. 오르티스는 감히 나서서 왕비를 말려야 하는지, 아니면 잠자코 쟁반 위의 열매가 모두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것은 과일을 손에 든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도 왕비가 제 손에 들려 준 이 금보다 귀한 열매를 과연 먹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영 혼란스러운 듯싶었다.

“오르티스.”

카르낙이 그를 불렀다. 어서 먹어 보라며 닦달을 해 대는 파니릴리를 넋 놓고 쳐다보던 그는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왕의 부름에 대답했다.

“예, 예! 폐하!”

“왕비가 네 선물이 무척 마음에 드는 모양이야. 꽤 신이 난 걸 보니.”

릴리는 에이가의 입에 열매를 넣지 못해 안달이었다. 성화에 못 이겨 에이가가 열매를 한입 베어 물자 릴리의 얼굴이 달처럼 환해졌다. 그것을 보는 카르낙의 얼굴에도 어렴풋 미소 같은 것이 어렸다. 한결 부드러워진 왕의 얼굴에 오르티스는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

리오에 대한 그의 분노를 풀어 버릴 수만 있다면 왕비가 금괴를 나누어 준다 한들 무엇이 대수겠는가. 그보다 더한 것을 해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왕과 왕비에게 바친 조공품이니 그것을 어떻게 쓰든 그들의 마음 아니겠는가. 더 내놓으라 엄한 곳에 떼를 쓰지만 않으면 된다.

“저는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폐하. 리오의 모든 형제들은 언제까지고 발투만 왕가의 충직한 아군임을 부디 알아주십시오.”

카르낙은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네 형제들 중에 배신자가 있었다, 오르티스. 그리고 누구도 그것을 눈치 채지 못했지. 다시 또 네 형제들 중 하나가 내 목을 노리지 않는다고 너는 내게 맹세할 수 있나?”

“물론입니다, 폐하. 반역을 저지른 반스 이드위너는 리오로 송환된 뒤 돌팔매질 형에 처해졌습니다. 그의 시신은 반역자라는 팻말을 달고 여전히 광장에 효수되어 있으며 앞으로도 형틀을 내릴 계획이 없습니다. 그것은 리오의 시민 모두가 동의한 바, 모두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었을 겁니다.”

“…….”

왕은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마음이 조급해진 채 오르티스는 말을 이었다.

“리오의 시민들에게 자유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폐하께서는 리오의 자유를 허락해 주신 유일한 왕이시며 또한 폭풍으로 인한 기근에 시달리는 우리를 위해 기꺼이 당신의 식량을 내주신 성군이십니다. 그런 분께 우리가 어떻게 칼을 겨눌 수 있겠습니까. 반스 이드위너 같은 자가 또다시 나타난다면 그땐 리오의 모든 시민을 죽여 주십시오. 도시를 모두 불태워 흔적조차 없이 사라진다 하여도 마땅히 받아들일 것입니다. 허나 부디 이 간곡한 마음을 알아주십시오. 부디 리오의 시민들을 다시 폐하의 충성스러운 신하로 받아주십시오. 그것을 위해 저는 리오를 대표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이 자리에서 목숨을 내놓으라 하면 내놓겠습니다.”

목숨을 내놓겠다… 라. 카르낙은 제 손에 든 단도를 굴렸다. 이것을 던져 주고 증명해 보이라고 해 볼까. 그러면 오르티스는 과연 자신이 뱉은 말을 지킬 수 있을까. 그러나 한껏 들떠 있는 릴리를 생각했다. 여기서 반드시 피를 보아야 할까. 그게 옳은 걸까.

왕의 대답을 기다리는 것은 오르티스뿐이 아니었다. 에이가의 곁에 서 있는 릴리 역시 그의 답을 기다렸다. 여전히 활기를 띤 채 눈을 반짝이며 말이다.

“그럴 필요 없다, 오르티스.”

단검을 품 안에 집어넣는 카르낙의 시선이 릴리에게 닿았다.

“너의 충정은 이미 증명된 것 같으니.”

그러니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감격에 겨운 오르티스가 벅찬 마음을 억누르며 바닥에 엎드렸다.

“감사합니다, 폐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리오의 형제들 모두가 기뻐할 것입니다.”

“언젠가 내가 리오로 향할 것이다. 네 말처럼 반스 이드위너의 시체가 광장에 효수되어 있는지 확인하러 말이야.”

“물론입니다, 폐하. 부디 가까운 시일 내에 리오에 방문해 주십시오. 리오의 모든 시민들은 기꺼이 두 분을 반갑게 맞이할 것이며 온 마음을 다해 극진히 모실 것입니다.”

“자.”

하고 카르낙이 제 손에 든 열매를 그에게 던졌다. 오르티스는 엉겁결에 날아온 것을 품에 받아 들었다. 왕과 왕비가 베어 문 자국이 고스란히 찍힌 석양의 열매.

“이 방의 모두가 열매를 맛보는 것 같으니 네 몫이다.”

가득하던 쟁반 위는 텅 비었다. 핀은 제 손에 들린 열매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건배라도 하듯 그것을 치켜들었다. 뭐,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그렇다면 잘 먹겠다, 오르티스.”

그러고는 핀은 크게 열매를 한입 베어 물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주저하던 이들이 하나둘 열매를 맛보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탄성이 나왔다. 릴리는 마침내 모두와 제 느낌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이 기뻐 환하게 웃었다.

오르티스는 제 손에 든 열매를 소중히 품으로 갈무리했다. 아마 감히 이것에는 입도 대지 못할 것이다. 그저 이 은혜로운 열매가 영원히 썩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폐하.”

꼭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카르낙은 각 영지를 상징하는 깃발을 단 작은 나무토막들을 테이블 한편으로 쓸었다. 커다란 테이블을 모두 차지한 엘버그의 지도 위에 캘던성 보수 공사를 위한 단면도가 펼쳐졌다.

“성벽을 좀 더 증축해야겠어. 만약 적이 안뜰로 들어올 때를 대비해 탑도 재정비해야 돼. 성이 완전히 함락되지 않게 하려면 탑으로 통하는 문의 수를 줄여야 해. 물론 개패도 가능해야 하지. 다행히 리오에서 일찍 빚을 갚아 준 덕에 저장고는 꽉꽉 들어차겠는데 아까부터 왜 그렇게 쳐다보는 거야.”

카르낙이 단면도에 열중하다 도저히 못 참겠는지 핀을 향해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르티스가 리오로 돌아간 다음부터 핀은 입은 꼭 다문 채 눈으로 집요하게 카르낙을 쫓아다녔다. 어찌나 빤히 쳐다보는지 얼굴이 뚫릴 지경이었다.

“내 얼굴 하루 이틀 봐? 아니면 새삼스레 반하기라도 했어?”

“지랄은.”

핀이 더럽다는 듯 욕을 지껄였다.

“그러면 그만 좀 쳐다보시지. 괜한 오해 사기 전에.”

핀은 자세를 고치며 팔짱을 끼었다. 그의 얼굴은 훨씬 집요해졌다. 카르낙은 더욱 짜증이 났다.

“본인이 좀 변했단 생각 안 들어?”

시답지 않은 질문에 카르낙은 다시 단면도에 열중했다. 진중하게 상대할 가치를 못 느꼈다.

“아니. 네놈 덕에 왕이 오해를 피하려 위장 결혼했단 소리가 나돌 거란 생각은 드네.”

“오르티스에게 검을 던졌어야 했어.”

“…….”

카르낙이 다시 고개를 들어 핀을 보았다. 그의 표정은 전에 없이 진지했다. 장난으로 내뱉은 말이 아니었다.

“내가 아는 너라면 마땅히 그랬어야 해.”

내가 아는 너라면 반드시 피를 보았을 거라고, 핀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핀이 아는 카르낙은 자비가 없는 자였다. 자신에게 위협이 될 만한 싹은 가차 없이 제거했다. 그 무자비함으로 여기까지 온 것이다.

“그는 내게 빚을 갚으러 왔어. 뿐만 아니라 진귀한 무역품들을 헌상하러 왔지. 아주 넘치도록. 그런 자리에서 피를 볼 순 없었어.”

핀은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넌 네 결혼식에서조차 사제의 멱을 따 버린 놈이야. 그깟 상인이 헌상 좀 한다고 바뀔 게 뭐가 있어?”

“디셋은 내 잔에 독을 탔어. 그는 날 죽이려 한 반역자라고.”

“저놈은 아니라고 어떻게 믿어!”

핀이 두 손을 들어 허공을 한번 휘저었다.

“리오의 길드장은 이미 널 한 번 배신했어. 두 번은 안 그러겠단 그의 말을 설마 네가 진심으로 믿었을 리 없어. 믿을 수 없었다면, 그것을 확신할 수 없었다면 카르낙, 그를 죽였어야지. 지금껏 네가 그래 왔던 것처럼!”

설마 그 찰나의 망설임을 눈치 채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건가. 손에 든 단도와 릴리의 얼굴을 번갈아 가늠하던 그의 모습을.

아니, 그렇지 않다. 누구보다 그의 가까이에 있으면서 오랫동안 그를 지켜보아 왔다. 단단하던 그의 벽에 금이 가고 있음을 누구보다 먼저 알아차릴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렇게 한 번 벽에 금이 가 버리면 다시는, 다시는 원래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도 말이다.

“내겐 너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어. 네 칼날이 무뎌진다면 억지로라도 나는 그것을 날카롭게 갈아야만 해. 누군가 네 등에 칼을 꽂아 널 죽이기 전에.”

“기세를 보아하니 핀, 아무래도 내 등에 칼을 쑤셔 넣을 사람은 네놈 같은데 말이야.”

“나, 장난할 기분 아니야.”

카르낙은 도면을 돌돌 말았다.

“마찬가지야. 그리고 결정을 번복할 기분도 아니지.”

“놈을 죽여야 해, 카르낙. 사람들은 네가 왕비 때문에 무뎌졌다고 생각할 거야.”

“전쟁터를 비운 지가 꽤 되었지? 네가 피 냄새에 굶주려 있는 걸 보니 틀림없어.”

“빌어먹을 카르낙 발투만! 지금 네가 어떻게 보이는지 알아? 여자 치마폭에서 놀아나는 것처럼 보인다고! 파니릴리 알기어스는 파니릴리 알기어스일 뿐이야! 그녀는 그녀고 너는 너라고! 그러니 그녀는 내버려 두고 제발 너는 너답게 굴어! 네 아내를 지키려고 성벽을 올려 방어할 생각부터 하지 말고 너답게 지랄 맞게 굴란 말이야!”

“이젠 파니릴리 발투만이야, 핀.”

카르낙의 언성이 조용히 높아졌다.

“엘버그의 왕비이고 내 아내야. 더는 목숨을 내놓은 투견처럼 굴 수 없어. 상황이 바뀌었으면 태세도 전환하는 거야. 이제 내겐 공격하는 것만큼 방어하는 것도 중요해.”

“카르낙.”

“내가 여자 치마폭에서 놀아나는 것 같다고? 그게 뭐 어때서? 비천한 왕이든 미련한 사내든 어차피 비웃음을 사는 것은 매한가지인데? 난 약해진 게 아니야. 그것을 걱정하고 있다면 말이야.”

“그럼 뭔데? 네가 더 강해지기라도 했단 말이야?”

카르낙은 대답 대신 무감한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맞혀 보라는 듯, 혹은 대답을 찾아보라는 듯. 핀의 눈동자는 혼란스레 흔들렸다. 도저히 카르낙의 심중을 읽을 수가 없었다.

“네 할 일이나 해, 대장.”

“하고 있잖아. 네놈의 목숨을 구하는 일.”

“누가 내 등에 칼을 꽂나, 안 꽂나 잘 지켜보란 말이야. 그럼 적어도 내가 뒈질 일은 없겠지.”

“…….”

“네놈이 꽂기 전에는.”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자신이 그의 등에 칼을 꽂을 일은 없다는 것을. 그러니 아니라고 부정할 필요조차 없다. 쓸데없는 소모전일 뿐이다. 핀은 입을 다문 채 저를 스쳐 집무실을 빠져나가는 카르낙의 뒷모습을 몇 박자 바라보았다.

크고 거대한 왕의 등은 여전히 강하고 어두우며 또한 암담하였다. 쿵, 하고 문이 닫힌 후 핀은 카르낙의 책상 위에 있는 조잡한 유리 공예품에 시선을 돌렸다. 저토록 조악한 것이 카르낙의 책상 위를 차지한 것이 언제부터던가. 너 같은 놈에겐 지나치게 달콤한 감정이다.

그리하여 그만큼 치명적이기도 하다. 난 단지 네가 나약해지지 않길 바랄 뿐이야, 카르낙. 네놈이 뒈지는 꼴은 정말 보고 싶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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