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근위병들은 섬세하게 용이 세공된 금붙이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오로지 왕만이 드나들 수 있는 작은 곁문이었다. 거대한 알현의 방은 사람들이 거의 없어 썰렁했다. 들은 바, 알기어스의 치하 아래 이 회장 안이 꽉 차고도 문밖까지 인파가 늘어서 있었다고 했다. 그러니까 알기어스 왕이 그들 모두를 죽이기 전까지는 말이다.
쿵, 쿵. 왕비의 등장을 알리기 위해 기수가 대로 바닥을 두 번 쳤다. 카르낙이 일어나 제 아내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릴리.”
“폐하.”
릴리는 공손하게 남편이 내민 손을 잡았다. 아내를 에스코트해 착석을 돕는 모습이 사뭇 왕다워 에이가는 조용히 물러나며 미소 지었다.
“로로는 여전히 감기인가요?”
릴리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남편에게 물었다. 카르낙은 고개만 끄덕였다. 여러모로 걱정이었다. 오랫동안 감기가 나아지지 않으면 곧 큰 병으로 번지는 경우를 여러 번 봐 왔다. 특히 상대가 연약한 노인이라면 더욱. 조만간 리쿠스를 좀 만나 보아야 할 것 같았다.
“들어오라고 해.”
카르낙이 손가락을 까닥이자 근위병들이 힘을 주어 육중한 나무문을 당겼다. 볕을 등지고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웠다. 연회소로 들어선 것은 리오에서 온 상인만이 아니었다. 그가 가져온 화려한 금박의 나무관은 무려 장정 넷이 들어야 옮길 수 있을 정도로 거대했다.
해안의 볕 때문인지 제법 까무잡잡하게 그을린 피부를 가진 작달막한 사내가 새하얀 모자를 벗으며 왕의 발밑에 엎드렸다. 하얗게 바랜 머리카락이 몇 가닥 남지 않은 민머리에 반질반질 윤이 났다. 머리로 가야 할 자양분이 모두 눈썹과 수염으로 간 것인지 길고 덥수룩한 잿빛 털은 주먹만 한 코를 빼 놓고 그의 얼굴 대부분을 덮고 있었다.
“국왕 폐하와 왕비 전하께 인사를 올립니다. 저는 리오에서 온 상인 메디르 오르티스라고 합니다.”
“오르티스.”
왕이 그의 이름을 한번 곱씹었다. 그는 더 바닥에 바짝 머리를 숙였다.
“네가 새로 뽑힌 길드장인가? 상인회의?”
“예, 그렇습니다. 제가 리오의 모든 상인과 시민들을 대표해 이곳에 왔나이다.”
“생각보다 이른 방문이로군. 난 적어도 족히 두세 달은 걸릴 거라 생각했는데.”
카르낙이 턱을 괴며 중얼거리자 오르티스는 황급히 손사래를 치며 머리를 조아렸다.
“감히 어떻게 국왕 폐하를 그토록 오래 기다리게 한단 말입니까. 리오를 향한 폐하의 배려와 자비에 리오의 모든 이들을 대표하여 무한한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또한 응당 폐하에게 진 빚을 갚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폐하에 대한 존경과 충정의 표시로 리오에서 준비할 수 있는 최상의 진상품을 가지고 왔습니다.”
말을 마침과 동시에 사치스러운 나무 관의 뚜껑이 열렸다. 그 안에 태양이라도 들어 있는 듯 내뿜는 휘황찬란한 빛에 망막이 아릴 지경이었다. 장내의 사람들은 모두 그 눈부심에 신음을 흘렸다.
이미 가져간 보급품을 다 갚고도 남을 겔링이 가득 든 주머니뿐 아니라 금화, 금붙이와 보석으로 세공된 화려한 공예품, 색색의 비단과 진귀한 향신료들이 가득했다. 그것을 본 카르낙이 뜻 모를 미소를 지었다. 오르티스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는 상자 안에서 가장 값비싼 목걸이가 든 비단 케이스를 꺼내 들었다. 실처럼 가는 금줄이 나무줄기처럼 얽힌 가운데 눈부신 다이아몬드가 별처럼 촘촘하게 박혀 있었다. 목걸이의 가장 가운데에는 개중에 가장 크고 화려하게 커팅된 다이아가 오색찬란한 빛을 내뿜는 채였다. 오르티스는 릴리의 앞으로 가 몸을 숙이며 상자를 높게 치켜들었다.
“왕비 전하, 이것은 아마네스 님이 잠든 당신의 첫 아이를 데리고 갈 때 바다로 떨구었다던 것으로 혹자에 의하면 바로 이 다이아몬드가 아마네스 님의 눈물이라 합니다. 부디 이 귀중한 선물을 받아 주십시오. 이것은 저 오르티스뿐 아니라, 리오의 모든 시민들이 전하께 드리는 사랑과 존경과 충심의 선물입니다.”
“…….”
릴리는 휘황찬란한 목걸이를 바라보기만 할 뿐 섣불리 손을 내밀지 못했다. 기쁘게 받기에는 선물이 너무 거대하고 화려했다. 거기에 보태진 사연은 또 어떠한가. 모든 것이 너무 과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받아야 한다. 오직 반스 이드위너 때문에 망가진 발투만 왕과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이 끔찍하게 무겁고 화려한 금은보화 리오에서부터 싣고 왔을 오르티스를 생각한다면, 리오의 사람들을 생각한다면 기껍게 받아야 하는데….
“너무도… 너무도 진귀한 선물이로군요, 오르티스. 제가 이런 귀한 것을 받아도 될지 모르겠어요.”
그러자 오르티스가 정색을 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것은 왕비님을 위한 것입니다. 신의 성물을 신의 자녀이신 왕비님이 아니시라면 과연 어느 누가 그것을 소유할 자격이 있겠습니까. 그러니 마땅히 이것은 전하의 것입니다.”
릴리는 저도 모르게 카르낙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무조건 이 성물은 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카르낙의 얼굴엔 미소나 기대감 같은 건 손톱만큼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저 릴리의 표정만을 살폈다. 마치 제 아내가 선물을 거절하거나 조금이라도 곤란한 기색을 보이면 그것을 빌미로 오르티스의 손목이라도 자르려 벼르는 듯 보였다. 그리하여 릴리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너무 과하게 함박 웃어 보이면 억지로 그리하는 것을 카르낙에게 들킬까 싶어 걱정되었다.
“그렇다면 감사한 마음으로 받겠습니다, 오르티스. 정말 아름다운 목걸이군요. 이것은 특별한 날을 위해 아껴 두어야겠어요. 그렇지 않습니까, 폐하?”
릴리가 호응을 유도하기 위해 부러 그에게 물었다. 그 덕에 오르티스의 신경이 온통 카르낙을 향해 쏠렸다.
카르낙은 과하게 눈을 빛내는 제 아내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제 아내의 진심 어린 표정과 가식적인 표정을 구분 짓지 못할 만큼 무심한 사내는 아니다. 오르티스가 내민 선물은 제 아내가 좋아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곤란하게 만들었으면 만들었지, 결코 그녀가 기뻐할 만한 것은 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어떻게든 기쁜 듯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반응을 이끌어 내려는 모습이 퍽 재미있었다. 설마 성물을 거절하면 자신이 오르티스의 목이라도 칠 것이라 생각하는 건가.
하긴 그럴 만도 하다. 또 하려고 들면 못 할 것도 아니라. 카르낙은 릴리의 간절한 눈빛에 비어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대답했다.
“그런데… 그 보석에 어울릴 만한 옷이 없지 싶은데….”
오르티스의 얼굴이 납빛으로 변했다. 릴리는 재빨리 오르티스가 가지고 온 비단을 가리켰다.
“마침 오르티스가 가지고 온 비단이 대단히 훌륭해 보이는군요. 저것으로 옷을 해 입으면 무척 잘 어울릴 것 같아요.”
“물론입니다, 전하. 저 비단은 동쪽 해협 건너 이국에서 가지고 온 것으로 엘버그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훌륭한 것입니다. 이것 역시 특별히 두 분을 위해 공수해 온 선물이랍니다. 전하의 아름다운 피부에는 어떤 색이라도 눈부시게 잘 어울리실 겁니다.”
“엘버그의 동쪽 해협에 또 대륙이 있나요? 카스티 제도 말고요?”
릴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오르티스는 지체 없이 답했다.
“예. 물론입니다, 폐하. 그곳은 대륙이라기보다 여러 섬들이 모인 군도에 가깝지요. 사람이 충분히 살 만큼 커다란 섬이 있는 반면 그렇지 못할 만큼 아주 작은 섬도 있답니다. 그러나 모든 섬이 서로 비할 바 없이 아름답지요.”
“이곳에서 가깝나요?”
“예, 전하. 거리는 가깝지만 유속이 매우 빠르고 험하여 많은 뱃사람들이 군도에 닿지도 못한 채 유명을 달리한답니다.”
“저런.”
릴리는 안타까운 듯 미간을 구겼다.
“그러나 섬나라들은 모두 매우 풍요로워 무사히 닿기만 한다면 온갖 진귀한 것들을 사들여 올 수 있지요.”
그러며 오르티스가 손짓했다. 그와 함께 온 시종 하나가 비단에 싸인 것을 쟁반에 받쳐 들고 왔다. 오르티스는 자부심으로 가득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쟁반에서 비단을 걷어 냈다.
“아마 이것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으실 겁니다, 전하.”
릴리가 궁금하여 목을 길게 뺐다. 아내의 낯빛은 이제야 환해졌다. 호기심으로 가득한 눈동자를 반짝였다.
“그게 뭐죠, 오르티스?”
“그들은 이것을 석양의 열매라고 하더군요.”
오르티스가 다가와 릴리에게 그것을 내밀었다. 주먹보다 작고 동그라며 붉은 빛을 띠었으나 빛이 닿는 곳마다 황금빛이 반짝였다. 꼭 금가루를 뿌려 놓은 듯이. 릴리는 ‘와’ 하는 감탄사를 뱉었다.
“이 빛깔 좀 보세요, 칼.”
릴리는 ‘페하’라는 존칭도 잊은 채 남편의 이름을 불렀다. 에이가, 핀을 비롯해 저 멀리 연회장 구석구석을 지키는 근위병까지 순간 움찔 놀라며 발투만 왕을 바라보았다.
뭐? 방금 왕비 전하께서 뭐라고 하셨지? 칼? 칼이라고? 누가 칼이야? 설마 설마 하지만 그런 애칭을 지닐 사람은 한 사람뿐이었다. 릴리가 제 손에 든 열매를 이리저리 돌리며 보여 주는 이. 그걸 아주 기꺼이 바라보는 이. 카르낙 발투만밖에 없었다.
“이런 건 처음 봐요. 열매라면, 이건 먹는 건가요?”
“물론입니다, 전하. 한입 베어 물어 보시지요. 아주 달고 맛나답니다.”
릴리가 눈을 빛내며 카르낙에게 그것을 권했다.
“드셔 보세요. 맛있대요.”
그러나 카르낙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네가 먹어 봐.”
궁금하고 신기하여 어쩔 줄 몰라 하는 이는 그대 같으니. 릴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열매를 갈무리하려 하자 카르낙이 불현듯 그것을 저지했다.
“아니, 잠깐.”
그러더니 제 허리춤에서 단검 하나를 꺼냈다. 카르낙은 열매를 아주 작게 도려내 오르티스에게 내밀었다.
“알다시피 오르티스, 내가 리오의 상인에게 크게 데인 적이 있어서 말이야.”
오르티스는 카르낙의 말을 잘 알아들었다. 알아들었을 뿐 아니라 매우 잘 이해했다.
“물론입니다, 폐하. 제가 먼저 먹어 보겠습니다.”
그는 공손한 두 손으로 열매 조각을 받아 제 입에 밀어 넣어 꼭꼭 씹은 다음 꿀꺽 삼켰다. 한참을 기다려도 그에게 별다른 변화가 없자 그제야 카르낙은 열매를 릴리에게 건넸다. 겉은 그토록 붉은데 열매의 속은 황금색과 비슷한 진한 노란색이었다.
껍질의 붉은 기가 스며들어 정말로 석양의 빛깔과 꼭 닮아 있었다. 릴리는 신이 나 열매를 베어 먹었다. 달짝지근한 과즙이 그녀의 입술을 타고 흘렀다. 그녀는 손등으로 그것을 훔치며 환히 얼굴을 빛냈다.
“맛있어요! 정말이에요. 정말 달아요!”
그러며 그것을 카르낙에게 내밀었다. 그러고는 이 맛을 나누지 않고는 못 견디겠다는 듯 독촉했다.
“어서요!”
카르낙은 하는 수 없이 릴리가 건넨 열매를 한입 베어 물었다. 과연 달고 부드러웠으며 과즙은 풍부하다 못해 넘쳐흘렀다.
“어때요? 맛있죠?”
릴리가 흥분하여 묻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르티스, 하나만 더 주겠어요?”
“아, 예. 물론입니다, 전하.”
오르티스의 시종이 접시를 들고 다가왔다. 릴리는 에이가에게 다가가 선뜻 열매를 건넸다.
“먹어 봐요, 에이가.”
“…예?”
그러더니 쟁반에서 하나를 더 집어 핀에게 건넸다.
“여기요.”
“…….”
“정말 맛있어요.”
또 하나를 집어 이번엔 세일린에게 건넸다.
“자요, 먹어 봐요. 정말 달아요.”
“…….”
거침없이 과일을 나누어 주는 왕비의 모습에 오르티스는 당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