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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발 아래 은빛 눈-90화 (90/231)

90화

릴리는 날카롭게 갈린 칼에 홀린 듯 다가갔다. 분명 처음엔 시커먼 쇳덩이였겠지. 이렇게 예리하고 매끄러운 검을 만들려면 몇 번을 담금질하여 두드려야 할까. 게다가 이토록 균일하게 직선을 이루게 하려면….

“만지시면 안 됩니다, 전하.”

릴리는 화들짝 놀라 검의 칼날로 향하던 손을 갈무리했다. 그때까지 릴리는 자신이 손을 뻗는지도 몰랐다. 그녀는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세바스탠이 다소 굳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스탠!”

하고 릴리가 가슴을 집고 숨을 한번 크게 골랐다.

“깜짝 놀랐어요.”

머쓱하게 웃으며 말하자 그도 미소 지었다.

“잘 벼려진 검은 허공에 날아다니는 먼지도 가르니까요. 그러다 귀한 손이 베이기라도 하시면 큰일 납니다.”

“아름다워서요. 이런 단단하고 매끄럽고 예리한 검날이요. 보고 있으면 하염없이 보게 돼요.”

“여인들은 대부분 동그랗고 화려하게 반짝이는 것을 좋아하던데요. 반대로 이렇게 길고 날카롭고 예리한 것은 무서워하고요.”

“그런가요? 하지만 여자들도 칼은 써야 하잖아요. 요리를 할 때라던가 풀이나 가지를 자를 때라던가…. 물론 이렇게 크고 긴 칼은 필요 없겠지만요.”

하며 릴리는 다시 날카로운 검으로 시선을 돌렸다. 세바스탠의 눈길도 곧 잘 벼려진 양날 검으로 향했다.

“제대로 들기도 힘들 겁니다. 이런 검은 건장한 사내들도 날렵하게 다루려면 기술이 필요하니까요.”

“이건 누구를 위한 거죠?”

“루이스 경을 위한 겁니다. 조금 더 크고 무거운 검이 필요하다 하셔서요. 잘 다루기만 한다면 검은 무거울수록 더 빠르고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거든요.”

릴리는 루이스가 그라타에서 검을 휘두르던 모습을 떠올렸다. 지금 와 생각하자니 그의 덩치에 비해 검이 조금 작았던 것 같기도 했다. 그라면 좀 더 크고 무거운 것도 잘 휘두를 수 있겠지. 예를 들면 카르낙 발투만의 검 정도. 단 한 번의 가벼운 휘두름으로 디셋의 머리가 잘려 나갔다. 꼭 종잇장처럼 말이다.

“하지만 폐하의 검보다 크진 않네요.”

“그 누구의 것도 폐하의 것과 견줄 수 없을 겁니다. 그런 검은 만들 수 없거든요. 저도 그리고 스승님도요.”

카르낙의 검은 만들 수 없다고? 스코크도?

“폐하의 검은 누가 만들었나요?”

세바스탠은 고개를 저었다.

“모릅니다, 전하. 루이스 경이 말씀하시길 그 검은 맨 처음부터 폐하와 함께했다더군요. 스승님이 칼자루를 몇 번 손보신 적은 있다 하십니다만 그 외에는 손도 대지 못하셨대요. 한 번도 보지 못한 종류의 것이라 하셨습니다.”

스코크는 칼날의 폭이나 엣지, 혈조의 위치와 깊이까지 모두 처음 보는 방식이라 혀를 내둘렀다. 게다가 그 두께와 날 폭은 또 어떠한가. 카르낙과 함께 수많은 전장에서 적을 베었을 텐데 칼날의 손상은 전무했다.

아무리 정성 들여 만든 완벽한 검이라 할지라도 지속적인 관리가 없다면 녹슬고 무뎌질 만도 한데 카르낙의 검은 여전히 예리하고 매끄러웠으며 단단했다. 마치 이제 막 생산하여 검집에서 처음 뽑아 든 검과 같은 상태였다.

아무리 두드리고 담글수록 강해진다 하지만 리쿠스는 스탠에게 네가 지금부터 오로지 하나의 쇠붙이를 가지고 죽을 때까지 두드리고 담그기를 반복한다 하여도 카르낙 발투만의 검 같은 칼날은 만들 수 없을 것이라 했다.

그 이후 스탠은 카르낙의 검을 한 번 만져 보는 것이 소원이 되었다. 늘 왕의 허리춤에 매달려 좀처럼 볼 수 없는 그 검을 가까이서 만지고 보며 그와 같은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 세바스탠 평생의 목표인 셈이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시종도 없이….”

“아, 세일린이라면 밖에 있어요. 여길 무서워하는 눈치예요.”

아아, 하며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엘버그인들은 뜨거운 곳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까요.”

시끄러운 소음에 사방에 불꽃이 튀어 다니고 사내들의 욕설과 땀내에 절은 곳을 어떤 여인이 좋아하겠는가. 그에 비하자면 발투만 왕비는 좋은 말로는 특별하고 좀 더 완곡히 표현하자면 별난 사람이었다.

“아, 부탁할 것이 있어서요, 스탠.”

릴리는 제 주머니를 뒤져 무언가를 내놓았다. 스탠은 호기심을 느끼며 그것을 받아 들었다. 사내의 손에나 꼭 맞을 굵은 반지. 그는 몇 번 미간을 찌푸리더니 넋이 나가 더듬댔다.

“…저, 전하, 이것… 이것은….”

“알기어스 가문의 인장이라지요?”

“…이것을 어디에서….”

알기어스 왕이 죽으며 그와 함께 사라진 것을 파니릴리 발투만이 어떻게 갖고 있는 것일까. 알기어스 왕의 핏줄이니 그녀가 소유할 명분이야 충분하다지만 어쨌든 발투만에 의해 끌어내려진 자의 것. 갖고 있기만 해도 반역죄가 될 것이 자명했다.

“이것은 없애야 합니다. 제가 용광로에 던져 넣겠어요. 저 말고 또 누가 알고 있습니까? 이 반지에 대해 혹여 알고 있는 다른 사람이 있습니까?”

릴리가 웃으며 그의 팔뚝을 다정하게 두드렸다.

“걱정 말아요, 스탠.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아요. 다 이야기할 순 없지만 딱 하나는 확실히 말할게요. 난 안전해요. 앞으로도 안전할 거고요.”

이 반지를 갖고 안전하다고? 그녀는 발투만 왕과 결혼했다. 그 피도 눈물도 없는 자가…. 무엇보다 반역에 관해서는 무자비하게 도륙하는 자가 바로 자신의 옆에서 잘 텐데 어떻게….

“…혹시 폐하께서도 이 반지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이 반지의 인장을 다시 만들고 싶어요. 가능한 원래의 모양을 훼손하지 않고요. 가능한가요?”

릴리는 세바스탠의 물음에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고 질문했다. 원래의 모양을 훼손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러니까 알기어스의 문장을 훼손하지 않는다는 것 말고 다른 뜻이 없어 보였다. 반지에는 그것 말고는 별다른 장식조차 달리지 않았으니…. 스탠은 스코크가 보았다면 분명 감히 왕비님을 그렇게 쳐다본다고 혼을 낼 만큼 물끄러미 릴리를 쳐다보았다.

“전하께서 명령하시는 것은 무엇이든 기꺼이 합니다. 전하에게 해가 되는 것만 아니라면요.”

“그렇다면 잘되었네요.”

릴리가 활짝 웃으며 반색했다.

“이 일은 꼭 스탠에게 부탁하고 싶었거든요. 당신의 미적 감각이 절대적으로 필요해요!”

곤란하다 느끼면서도 세바스탠은 허탈하게 웃었다. 참으로 당해 낼 수 없는 사람이었다.

***

카르낙은 도면을 들고 성벽을 가로지르다 대장간 문 앞에 서 있는 세일린을 발견했다. 뭐야. 왜 또 저기 서 있어. 세일린이 저기에 서 있다는 것은….

“릴리가 여기 있어?”

성큼성큼 세일린에게 다가가더니 다짜고짜 물었다. 세일린은 얼굴을 붉힌 채 어설프게 고개만 몇 번 끄덕였다. 예의에 어긋나고 도리에도 어긋나는 행동임에 틀림없으나 카르낙은 상관하지 않았다. 다만 릴리가 또 대장간을 찾았다는 사실에 콧김을 뿜을 뿐이다.

쇠나 두드리는 대장간에 여자가 드나들 일이 대체 뭐가 있어! 차라리 방직소나 음식 저장고를 이렇게 드나드는 거라면 이해라도 하겠다! 카르낙은 씩씩거리며 대장간으로 향했다.

마침 겨우 허리를 펴고 땀을 닦아 내는 리쿠스가 왕의 등장을 알아차리고 한달음에 달려갔다.

“폐하, 어쩐 일이십니까?”

아직 그가 주문한 신형 무기들은 설계도도 도착하지 않았는데…. 왕의 눈은 기민하게 대장간 내부를 훑고 있었다. 리쿠스에게 부탁해 둔 무기를 위해 왔다면 하지 않을 행동. 리쿠스는 곧 그의 목적을 알아차렸다.

“왕비 전하를 찾고 계신 거라면… 전하께서는 지금 세바스….”

“폐하.”

공손하게 아뢰는 리쿠스의 목소리가 높고 상냥한 목소리에 묻혔다. 파니릴리가 때마침 대장간을 나서는 중 카르낙을 발견한 것이다.

“릴리.”

“내내 근위 대장과 공무를 보실 거라 들었습니다. 혹 벌써 일을 마치셨는지요?”

표정이나 말투에는 제 남편을 만나 반가운 기색이 역력했다. 카르낙은 릴리의 뒤를 따르다 자신의 등장에 고개를 숙이고 있는 세바스탠을 쳐다보았다. 눈이 절로 가늘어졌다.

“어느 정도. 그런데 여긴 어쩐 일이야? 오후 내내 책상에 앉아 있어야 한다고 하지 않았어?”

“여종 하나가 아이를 낳았거든요.”

그런데? 카르낙의 한쪽 눈썹이 의아하게 들렸다. 여종이 애를 낳았는데 뭐? 그게 무슨 중요한 일이라도 되나?

“그래서 아이도 볼 겸 축하도 해 줄 겸, 세일린과 숙소로 향하다 잠시 들렀어요.”

“왜?”

카르낙의 표정은 더 의아해졌다. 숙소로 향하는 중이었으면 그냥 숙소로 가면 되지, 굳이 이곳에 들를 이유가 뭐야?

“잠시 볼일이 있어서요.”

“무슨?”

“곧 알게 되실 겁니다.”

“뭐?”

릴리는 알쏭달쏭한 말을 하고 알쏭달쏭한 미소를 지은 채 그를 스쳐 지나갔다. 황당했다. 뭐야? 그러니까? 곧 알게 될 거지만 지금은 말 안 하겠단 거야? 그러니까, 지금은 그게 세바스탠과 둘만의 비밀이란 거야? 황망하게 릴리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카르낙은 고개를 휙 돌려 세바스탠을 쳐다보았다.

“릴리가 너에게 무슨 볼일이 있는 거지?”

세바스탠은 곤란한 듯 입술을 씹으며 더 깊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폐하. 왕비 전하께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겠노라 맹세하였습니다.”

“네놈의 주둥이가 건방진 소리를 하네.”

“…죄송합니다, 폐하.”

“그것을 좌우로 찢어 놓아도 같은 소리를 할까?”

“…죄… 죄송합니다, 폐하.”

카르낙은 노기를 가라앉히느라 제 어금니를 씹었다. 과연 공중에 거꾸로 매달아 머리를 양동이에 처박아도 같은 말을 하는지 실험해 보고 싶었지만 참아야 했다. 그런 일을 했다간 십중팔구 릴리가 가장 먼저 알아차릴 것이 뻔했다. 약속을 지키지 않은 놈보다 놈을 괴롭혀 그것을 알아낸 저에게 더 실망하고 화가 나겠지.

카르낙은 떨어지지 않는 시선을 갈무리했다. 놈을 더 오래 보고 있다간 기어코 무슨 짓이라도 할 것 같았다.

“곧 병력을 보강할 거다, 스코크.”

“예, 폐하.”

노인이 구부정하게 몸을 수그리고 냉큼 그에게 한 발짝 다가왔다. 덕분에 세바스탠의 실루엣이 절반 정도 가려졌다.

“도검과 방패를 비롯한 무기들은 가능한 빨리 만들어 두도록 해. 언제까지 훈련병들에게 목검만 들게 할 순 없으니.”

“물론입니다, 폐하. 당부하신 대로 따르겠습니다.”

아침나절에는 분명 기분이 좋았다. 오르티스를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오후 나절부터 핀이 제 속을 긁더니 이젠 세바스탠이란 놈이 제 속을 아예 뒤집어 놓았다. 더는 도면을 가지고 씨름할 생각이 없었다. 카르낙은 손에 들린 종이 뭉치를 스코크에게 건넸다.

“이걸 보리스에게 주고 성벽은 지금보다 한두 자 정도 더 높이라고 전해.”

“예, 폐하.”

스코크는 왕이 준 도면을 성심껏 받아 들고 내내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왕의 망토 자락까지 대장간에서 사라지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전하께서 절 찾으신 겁니다.”

스승의 따가운 눈초리를 느꼈는지 세바스탠이 두 손을 들어 보이며 항변했다.

“절 찾아와 부탁하시는데 제가 뭘 어쩔 수 있겠습니까?”

“당분간 발투만 왕의 눈에는 띄지 않도록 해라. 아까운 숙련공을 잃기는 싫으니까.”

리쿠스가 도면을 세바스탠의 가슴팍에 밀었고 그는 어쩔 수 없이 그것을 받아 들었다.

“보리스에게 전해 줘라. 폐하의 말씀도 함께.”

“그가 어디에 있는데요?”

“낸들 어찌 알겠어. 폐하께서 알려 주지 않으셨는데.”

“그럼 어떻게 찾습니까. 보리스가 뭐 하는 작자인지도 모르는데.”

“건축가다. 캘던성의 보수를 총지휘하고 있지. 아무나 성내 사람들 잡고 물어봐. 어디든 틀어박혀 있을 테니.”

무책임한 말을 던져 놓고 스코크도 거칠게 회반죽을 칠해 놓은 두꺼운 벽 뒤로 사라졌다. 욕이 절로 나왔다.

“젠장.”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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