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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발 아래 은빛 눈-87화 (87/231)

87화

“로로의 감기는 곧 괜찮아질 거예요. 리쿠스는 훌륭한 치료사잖아요.”

과연 그럴까. 최근에는 전혀 도움이 안 되고 있는데 말이다.

“어쩌면… 그를 돌려보내야 할지도 몰라.”

“사막으로요?”

“하게너의 성으로.”

“…….”

“그곳이 모든 것의 시작점이지. 아주 많은 투로의 형제들이 그곳에 머물고 있고 말이야. 그리고….”

“…….”

“로레인 하게너의 비석이 있지.”

“…어머니의 비석이 있다고요?”

릴리가 헛말을 들었나 싶어 되물었다. 카르낙은 연약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로레인 하게너의 비석이 있어. 장례는 치르지 않았지만 무덤은 만들어 주었지.”

“…로레인 하게너는… 폐하의 손으로 죽였다고….”

처음 만났던 때에 그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을 도발했었다. 루이스가 자신의 신념을 위해 그라타에서 어떻게까지 했는지 보았던 터라 릴리는 카르낙의 말이 허풍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신하가 그럴진대 그가 모시는 주군은 분명 더 잔인하고 비정한 사내이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새로운 시대의 왕이, 자신의 적을, 원수와 그 식솔을 죽인 뒤 장례를 치러 준다는 이야기는 듣도 보도 못 했다. 대부분 성문에 효수되었다가 태워 버리거나 독수리 밥으로 던져 주거나 둘 중 하나라고 들었다.

서슬이 퍼런 카르낙의 치하 아래에서 그것도 투로들이 다스리는 곳에서 영지민들이 십시일반 손을 보태어 로레인 하게너의 무덤을 만들어 주었을 리는 더더욱 없었다. 그렇다면 로레인 하게너의 무덤은….

“좋은 여자였어. 존중받아 마땅했지.”

“…….”

“아마도 네 외모는 알기어스를 빼닮았을지라도 네 성정은 로레인에게서 왔을 테지.”

부르테는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라 했다. 릴리는 그녀에게서 비록 악인일지라도 동정하고 이해하는 법을 배웠다. 사람들의 마음에는 저마다의 다채로운 사연과 색이 있어 누가 보느냐에 따라 그 빛깔이 달라 보인다고 말이다.

그리하여 릴리는 카르낙을 증오하지 않았다. 처음엔 저와는 결이 맞지 않는 이라 생각했고 저가 좋아하는 빛깔의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부르테의 말처럼 카르낙이 지닌 빛은 너무도 다채로워 릴리는 그가 어떤 이인지 아직 정의할 수 없었다.

그것을 정의할 때가 올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다만 그가 지닌 빛깔을 가능한 많이 알고 싶었다. 그에겐 수많은 붉은빛이 보였다. 강렬하게 타오르는 색, 은은하게 피어오르는 감미로운 색, 눈이 아플 만큼 선명한 핏빛의 색. 그리고 지금은….

자신이 죽인 여인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는 무슨 빛을 띠고 있을까. 그것은 자비의 빛일까, 아니면 강렬한 붉은색일까, 아니면 선명하고 비린 핏빛일까.

“솔직한 이야기가 듣고 싶어요, 칼. 정말로 로레인 하게너가 죽기를 택해서 그녀를 죽였나요? 에이가의 말이 사실인가요?”

카르낙은 그때를 떠올렸다. 로레인 하게너가 성문을 열어 둔 덕에 카르낙은 별다른 전투도 치르지 않고 하게너의 성을 차지했다. 그야말로 무혈입성이었다. 제 남편과 장자를 죽인 새까만 사내들이 들이닥쳤는데도 로레인 하게너는 눈 한 번 찡그리지 않았다.

그 어떤 미움도 분노도 두려움도 없는 평안한 모습이었다. 카르낙은 그때부터 로레인에게서 죽음의 그림자를 보았다. 그녀에겐 그 어떤 퇴로도 없었다. 오로지 죽음밖에.

“그녀가 죽기를 택해 그녀를 죽인 건 아니야. 내게 죽음을 청한 적도 없었고. 그녀가 살아남을 방법은 오로지 나와 결혼하는 것뿐이었는데 그녀는 그것을 거부했어.”

“로레인 하게너가 당신을 위해 성문을 열어 놓고 당신을 위해 군대를 끌고 왔는데도… 그래도 죽였어야만 했나요?”

“…….”

카르낙은 복잡한 표정으로 릴리를 보았다. 처음의 의도대로 그녀를 꼭두각시처럼 여겼다면 이런 상황을 맞이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조금만 덜 아름다웠어도, 조금만 덜 선하고, 조금만 덜 현명했더라면… 그랬다면 모든 것이 쉬웠을 것이다. 이제와 과거의 일 따위를 후회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단지, 단지 미움받고 싶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무언가를 주저하게 되는 일 따위는. 결코 없었을 것이다.

“그래. 그래야만 했어. 죽여야만 했어. 그것이 최선이었어.”

단호한 대답에 릴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한참 동안 그를 쳐다볼 뿐이었다. 그의 심연이라도 들여다보는 듯이.

“그것을 알고도 날 받아들였잖아, 릴리.”

그의 음성이 위태로웠다.

“처음부터 말했잖아.”

“그 일로 왈가왈부하려는 게 아니에요, 칼.”

릴리는 달래듯 그의 팔을 쓰다듬었다.

“그저 폐하를 좀 더 잘 이해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어떤 일을 행할 때, 그러니까 명분 같은 거요. 어떤 것이 폐하의 심중을 움직이는지 뭐 그런 것들이요.”

“…….”

명분? 카르낙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거 없어.”

대체 그것들이 다 무엇이란 말인가. 거대한 대의나 도덕 따위를 일컫는 건가.

“내가 살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했어. 그러니 로레인이 죽인 이유를 굳이 꼽아야 한다면 위협이 될 만한 싹이라면 그것이 아주 미미하더라도 완전무결하게 제거한다는 것이 그 이유야. 지금도 난 그것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해.”

“무덤은요?”

뭐?

“어머니의 무덤은 어떤 이유로 만든 건가요? 왜 로레인 하게너는 유반 하게너처럼 목을 잘라 효수하지 않았나요?”

“에이가의 부탁이었어.”

“…….”

“내겐 에이가가 필요했고. 밑질 것이 없는 장사였지.”

“…….”

“난 너처럼 선하지 않아. 단지 남을 돕고 싶다는 이유로 내가 가진 것을 아낌없이 내놓지 못해. 오로지 빼앗기지 않기 위해 아등바등할 뿐이야.”

그러니 평생 너에게 존경받는 남편은 될 수 없겠지. 그런 생각이 들자 기분이 침울해졌다. 투로 주제에.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는 천민왕인 주제에 감히 존경받길 원하는 스스로가 기가 막혔다.

그러기엔 너무 많이 지나왔다. 그녀에게 존경을 받으려면 왕이 아니라 다른 것을 해야 했다. 리쿠스 같은 치료사나 스코크처럼 칼을 만드는 대장장이나 그것이 아니라면 차라리 보통의 농부. 뭐가 되었든 살생을 행하지 않는 자여야만 했다. 이미 너무 많은 피를 묻혔다.

“그게 너와 나의 다른 점이지, 릴리. 그래서 나에겐 네가 필요한 거고.”

“감사합니다, 폐하. 그렇다니 기뻐요.”

릴리가 미소 지으며 부드럽게 대답했다. 그러나 그 미소와 목소리가 쓰디쓰게 느껴지는 것은 기분 탓일까. 내겐 네가 절실한데 너에게 나는 스스로는 풀어 버릴 수 없는 족쇄 같은 존재일까. 하지만 릴리 그렇다 해도. 오로지 그 때문에 남았다 해도….

카르낙은 릴리의 가느다란 어깨를 끌어안고 입술을 부딪쳤다. 뱀이 똬리를 틀듯, 그녀의 몸을 꽉 감은 채 허겁지겁 입술을 빨며 혀를 집어넣고는 풀썩, 침대에 쓰러뜨렸다. 그는 릴리의 허벅지를 벌리고 손으로 그 사이를 매만졌다.

어쩌면 이것만이, 이 방법만이 그녀가 자신을 받아들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를 젖게 하고, 그리하여 기쁘게 하고, 그렇게 내가 그녀의 안을 파고드는 것만이 유일하게 그녀를 온전히 소유할 수 있는 방법일지도 모른다.

네가 아닌 다른 여자는 필요 없어. 네 구멍이 아닌 다른 이의 구멍은 필요 없어. 죽을 때까지 너만이 유일한 내 아내야. 내 가족이고, 내 사람이다.

카르낙은 별다른 준비 없이 그녀의 안으로 파고들었다. 릴리가 ‘흑!’ 하며 제 입술을 꽉 물었다. 카르낙은 갑작스러운 삽입에 일그러진 릴리의 주름진 콧등에 입을 맞추었다. 릴리의 몸이 삽입에 익숙해질 약간의 말미를 준 후 그는 릴리의 귓불을 씹으며 천천히 허리를 움직였다.

릴리는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 고통스러울 법한데도 릴리는 그를 밀어내는 대신 그의 옷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카르낙은 거기에 깊은 안도감을 느꼈다. 장자를 낳기 위해서라도 저를 거부하지 않을 것이란 확신이 어렴풋이 들었다. 카르낙은 릴리의 손을 잡아 제 어깨로 이끌었다.

“꽉 안아 줘, 릴리.”

그가 속삭였다. 릴리는 정신없는 와중에도 그의 말을 따랐다. 두 손을 둘러 그의 어깨를 꽉 안았다. 그 감촉이 좋아 카르낙은 느른한 숨을 내쉬었다.

“더 꽉.”

릴리는 있는 힘껏 그를 죄어 안았다. 카르낙이 다시 그녀의 귓불을 씹으며 아주 천천히 허리를 움직였다. 그렇게 꽤 오랫동안 카르낙은 릴리의 침대 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

친애하는 로리아나에게.

로리아나, 당신과 편지를 주고받으려면 조금 더 인내하며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소식이 궁금하여 이렇게 견디지 못하고 서신을 전합니다.

어떻게 지내고 있나요? 몸은 건강한가요?

비가 내린 이후로 요 며칠 바람이 꽤 차진 탓에 성에는 감기로 고생하는 이들이 많답니다. 성 안의 이들이 그러할 텐데 성 밖의 사람들은 어떨지 궁금하고 또 걱정됩니다. 곡식이 여물 때를 지나 내린 비가 오히려 작물을 썩어 버리게 한 것은 아닌지도 걱정되고요.

에이가와 세일린은 이런 저에게 걱정을 사서 한다고 하더군요. 그러나 내가 아니면 누구도 걱정해 주지 않을 것 같아서 남들의 몫까지 걱정해 보려고 합니다. 그렇다고 답이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요.

로리아나가 보내 준 고약 덕분에 나의 건강은 많이 좋아졌습니다. 짬이 날 때마다 정원을 거닐며 싱싱한 풀들의 냄새를 맡고는 한답니다. 그러고 나면 한결 마음도 몸도 건강해지는 기분이 들어요.

얼마 전 루이스를 통해 당신이 사창가에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무료 교습소를 차렸다는 이야기는 전해 들었습니다. 창녀뿐 아니라 그들의 사생아와 가난한 자들도 무료로 배울 수 있도록 아주 넓고 깨끗한 건물을 빌려 단장했다고요.

정말이지 훌륭한 일을 해냈어요. 로리아나, 적지 않은 돈과 노력이 들었을 텐데 당신의 대범함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당신이야말로 진정한 발투만 왕가의 충신입니다. 다른 그 누구보다도요.

폐하께서도 분명 당신을 자랑스러워할 거예요.

거기까지 쓰고 릴리는 문뜩 카르낙이 로리아나에게 갚아야 할 대금은 모두 지급했는지 궁금해졌다. 교습소를 차려 무료로 운영하려면 돈이 만만치 않게 들 텐데….

똑똑. 누군가 침실의 문을 두드렸다.

“전하.”

에이가의 목소리였다. 릴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세일린이 곧 문을 열어 주었다. 에이가의 등장에 릴리는 반색하며 말했다.

“에이가, 안 그래도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는데 잘 왔어요.”

“어떤 것을요, 전하?”

“폐하께서 로리아나에게 지급해야 할 대금은 모두 지급하셨나요?”

“아, 지급하셨을 겁니다. 혹시 아직 지급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제 곧 지급할 수 있을 겁니다, 전하. 리오에서 상인이 도착하였거든요. 엄청난 양의 돈과 진귀한 물품들을 싣고서 말이지요.”

“지금 말인가요?”

에이가는 빙그레 웃었다.

“네. 지금 그가 국왕 내외분을 뵙기 위해 기다리고 있답니다. 그러니 저와 함께 연회소로 가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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