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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발 아래 은빛 눈-84화 (84/231)

84화

릴리는 침대에 앉아 로리아나가 주고 간 케이스를 매만졌다. 머리맡에는 리쿠스가 가지고 온 약초가 타고 있었고, 세일린은 미지근하게 식은 물 위에 몇 번이고 뜨거운 물을 붓느라 주전자를 들고 벽난로와 작은 사이드 테이블을 분주히 오갔다.

향초의 덕인지 아니면 세일린이 만들어 내는 듣기 좋은 소음들 때문인지 릴리는 기분 좋은 노곤함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엘버그로 온 후 처음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침대에서 뒹굴뒹굴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평생을 통틀어 처음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하루를 보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도 이토록 편안히. 누군가에게 보호받고 있다는 아늑함 속에서 말이다. 제법 호사스러운 일이었다. 사치스럽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폐하께서 뜨거운 물과 보드라운 천을 준비해 두라 하셨는데… 어쩐지 좀 늦으시네요.”

세일린은 다시 난로 위에 철 주전자를 올리며 말했다. 얇은 두건 밖으로 삐져나온 잔머리는 땀에 젖어 있었다.

“이제 그만 쉬는 게 어때요? 아침부터 한 번도 쉬지 않았잖아요. 그러다 병나겠어요.”

릴리의 걱정 어린 말에 세일린은 씩씩하게 이마를 훔치며 웃어 보였다.

“전 괜찮습니다, 전하. 다만 전하께서 어서 좋아지시길 바랄 뿐이에요.”

“죽을병도 아닌데 괜한 호들갑이에요. 며칠 쉬면 나아질 것인데요.”

“아주 작은 생채기도 저에겐 큰일입니다. 전하는 엘버그의 왕비님이시니 전하의 안위는 곧 엘버그의 안위이니까요.”

그것은 참 부담스럽네요, 세일린. 같은 말은 속으로 삼켰다. 까닭도 모른 채 끌려와 그저 한 남자와 결혼을 하고 아이만 낳아 주면 될 것 같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의 역할엔 더 많은 의미가 담겼다. 때로는 방패가 되고, 때로는 날카로운 검이 되고, 또 때로는 엘버그 그 자체가 된다니. 자신의 이런 미래를 상상이나 했을까.

씩씩하게 웃는 세일린의 모습을 고맙고도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벌컥 문이 열렸다. 세일린은 곧바로 몸을 숙였다. 몹시도 민첩한 몸놀림이어서 그보다 한참 후에야 릴리는 방 안으로 들어서는 카르낙을 발견할 수 있었다.

“칼.”

“미안. 생각보다 일이 많아서.”

카르낙은 망토를 벗어 의자에 걸쳐두며 사과했다.

“다시 오실 줄 몰랐어요. 다시 오겠다 말씀하지 않으셨잖아요.”

“무슨 소리야. 일이 끝나면 난 무조건 돌아와. 할 일이 아무것도 없거나. 짬이 나도 마찬가지야. 당연하잖아. 그럼 내가 어디서 시간을 보낸단 말이야?”

그는 엉뚱한 소리를 한다는 듯 실소를 하고는 소매를 걷고 보드라운 천 뭉치를 들었다. 세일린은 때맞춰 물그릇에 더운물을 한 번 더 부었다. 뜨거운 증기 때문인지 그녀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카르낙은 제 손등으로 물의 온도를 가늠해 본 후 천 뭉치를 물에 담그고 말했다.

“고마워, 세일린. 이제 나가 보아도 좋아.”

“네, 폐하.”

세일린이 예의 바르게 인사를 한 후 방을 나갔다. 카르낙은 물에 젖은 천 뭉치를 꽉 짜고 반듯하게 접어 든 후 릴리의 몸을 덮은 공단 이불을 젖혔다. 하얀 슈미즈 아래 가녀린 허벅지와 무릎이 뽀얗게 드러났다.

카르낙은 침대맡에 앉아 그녀의 슈미즈를 말아 올리기 시작했다. 릴리는 그가 하는 것을 뻔히 바라보다 확신 없이 물었다.

“폐하께서 직접 하시게요?”

“그럼? 이걸 누가 하는데?”

그러자 오히려 카르낙이 반문했다. 그는 따끈한 천을 릴리의 허벅지 위에 눅진하게 누르며 말을 이었다.

“릴리, 네 허벅지는 내가 만질 수 있는 유일한 허벅지야.”

“…….”

“네 입술은 내가 입 맞출 수 있는 유일한 입술이고, 네 피부는 내가 맛볼 수 있는 유일한 피부지. 별다른 일이 없다면 난 그 점을 마음껏 즐길 생각이야. 그러니 너도 가능한 내게 많은 기회를 제공해 주었으면 좋겠어.”

그렇게 이야기하면 기꺼이 뭐든지 주고 싶어진다. 카르낙 발투만이 이토록 다정한 사내였던가. 마냥 대하기 어려운, 처치하기 곤란한, 어떻게 해도 그 마음 한 자락 얻지 못할 이라고만 생각했었다. 어쩌면, 그의 아내가 되지 못했다면 여전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분명 그의 이런 모습은 그의 여자가 아니고는 볼 수 없으리라.

카르낙은 릴리의 허벅지를 뜨거운 수건으로 덮고 아주 부드럽고 정성스레 주무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올라와 부르테와도 달랐다. 그들의 보살핌은 그녀에게 편안함과 아늑함은 주었어도 가슴을 뛰게 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카르낙이 그녀에게 베푸는 보살핌은 그녀의 가슴을 기분 좋게 간지럽혔다. 눈앞의 남자가 너무도 사랑스러웠다.

“아직도… 아직도 저와 아이를 가질 생각이 없으세요?”

“…….”

카르낙은 생각할 시간이 조금 필요했는지 잠시 머뭇거리다 답했다.

“모르겠어, 릴리. 그땐… 그게 그렇게 기분 좋은 것인 줄 몰랐거든. 그런데 지금은 알게 되었지. 그래서 잘 모르겠어. 하지만 언젠가 생기면… 그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 다만 그로 인해 우리가 멀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럴 리가요.”

“난 여자아이가 좋아.”

“…….”

“이왕이면 여자아이가 많았으면 좋겠어.”

카르낙은 열심히 릴리의 허벅지를 누르며 대답했다. 그래야 그녀가 장자를 낳아 주었다는 것을 이유로 자신을 떠나지 않으리라. 그러니 할 수만 있다면 줄줄이 여자아이만 낳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릴리는 불현듯 카르낙의 앞에 무언가를 내밀었다. 뚜껑이 열린 붉은색 조개 케이스.

“이것을 좀 발라 주었으면 좋겠어요.”

카르낙은 그 흰색 고약과 릴리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로리아나에게 이 고약을 어디에 발라야 하는지 들었다. 같은 자리에 있었으니 릴리도 분명 들었을 거다.

“…어….”

그래서 카르낙은 눈을 굴리며 망설였다. 초조한 기색의 카르낙과 다르게 릴리의 표정은 평온했다.

“어디에 발라야 하는지 알 수가 없어서요. 역시… 볼 수가 없는 곳이라.”

그렇지. 스스로는 볼 수가 없는 부분이지. 그러나 카르낙은 그녀의 은밀한 부위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내내 만지고 맛보고 보아 왔던 곳이니. 또한 주저하는 연유도 같았다. 보고 만지면 맛보고 싶어질 것이 분명한 까닭이었다.

“그렇다면 역시 세일린이나… 리쿠스에게….”

“이리 줘.”

그건 안 되지. 목숨이 경각에 달린 때가 아니라면 가급적, 릴리의 몸은 저 혼자 사유하고 싶었다. 그게 아니면 말 그대로 제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진 누구도 안 된다.

릴리는 카르낙에게 고약을 건네주고 편한 자세로 침대에 누웠다. 무릎을 세우며 흘러 내려간 슈미즈 사이로 그녀의 하얀 속살이 보였다. 그것을 보고 있자니 벌써부터 열기가 몰려 아래가 홧홧하였다.

“가끔은 릴리, 네가 나를 괴롭히려는 것 같아.”

“그럴 리가요. 전 언제나 폐하께 충직하답니다.”

그래, 바로 그런 태도가 말이야. 그렇게 천연덕스럽고 화사하게 웃는 것 말이야. 카르낙은 침대 위로 올라가 릴리의 무릎을 벌리고 그 사이에 앉았다. 뽀얀 둔덕 아래 예민한 살덩어리들이 부풀어 오르고 지나치게 붉은색을 띠었다. 카르낙은 여러 의미로 신음을 흘렸다. 첫째로는 안쓰러움, 둘째로는 놀라움. 셋째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가 동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환멸 등등….

카르낙은 제 검지에 고약을 묻히고 가랑이 사이가 더 벌어지도록 팔뚝으로 릴리의 사타구니를 바깥쪽으로 밀어젖혔다. 붉은 속살이 훤히 드러났다. 그는 침을 꼴깍 삼키고 손가락을 밀부로 가져갔다.

“아프면 말해.”

그러고는 좁은 구멍의 가장 바깥쪽부터 천천히 고약을 펴 발랐다. 카르낙의 손길은 부드럽다 못해 간지러웠다. 릴리는 편하게 등을 대고 누워 침대의 휘장을 바라보았다. 꼭 물감을 바르는 듯 꼼꼼한 남편의 손길로 인해 고통에 긴장되어 있던 몸이 비로소 노곤하게 풀렸다. 그녀는 얕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러다 돌연….

“읏!”

하고 움찔 몸을 떨었다. 남편의 손가락이 부풀어 오른 클리토리스에 닿은 것이다.

“아.” 하고 카르낙은 잠시 그곳에서 손가락을 떼어 냈다.

“미안. 하지만 여기도 바르는 편이… 아파?”

지극히 예민해져 있긴 해도 아프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 릴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괜찮아요.”

“그럼….”

하고 카르낙은 다시 한번 손가락에 고약을 발라 클리토리스를 문질렀다. 눅진하게 비비는 손길이 부드러우나 집요했다. 반복될수록 야릇한 감각이 강해졌다. 열감에 등줄기가 얼얼하여 릴리는 제 눈을 질끈 감고 입술을 물었다.

“…릴리.”

저를 부르는 카르낙의 숨소리가 가빴다. 그의 손이 더 아래로 향했다. 아직 얼얼하고 따끔거리는 밀부로 향하는 손길은 촉촉하고 매끄러웠다. 아직 거기엔 고약을 바르지 않았다. 그것을 카르낙이 알아차렸고 그의 손길에 릴리도 알아차렸다.

그녀의 밀부는 그의 것이 그러하듯 이성으로 통제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는 것은 카르낙도 알고 있었다. 다만 신체적인 반응일 뿐이라는 것을.

그러나 릴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러한 반응은 카르낙의 이성을 와르르 무너뜨렸다. 카르낙은 덮치듯 몸을 숙여 릴리의 입술을 머금고 정력적으로 빨았다. “응!” 하고 놀란 릴리의 외마디 비명은 카르낙의 입 안에서 공명하다 먹혔다.

카르낙은 연신 손으로 그녀의 도독한 살점을 문질렀다. 성급한 손길에도 그녀의 아랫도리는 더욱 매끈하게 젖어 들었다. 그것을 느끼고 있자니 머리가 핑 돌았다. 아랫도리를 세우고 달려드는 자신이 짐승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어쩔 도리가 없는 자신이 더 한심했지만 그럼에도 역시 어쩔 수가 없었다. 차라리 짐승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말겠다.

“릴리.”

카르낙이 그녀의 얼굴 여기저기에 입술을 비비고 정신없이 핥으며 고통스레 말했다.

“싫다고 해 줘….”

릴리가 싫다고 거부하면 멈출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못 멈출까. 그래도 멈추지 못하면 욕지거리를 하며 저를 있는 힘껏 밀어냈으면. 그래도 정신을 못 차리면 제 뺨이라도 때려 주면 좋겠다. 그러면 정신이 번쩍 들겠지.

“안 된다고 하면 멈출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릴리에게 애원했다. 제 아랫도리는 제발 좁고 따듯한 곳에 집어넣어 달라고 애원하고 있는데 말이다. 그 간절함에 못 이겨 이젠 손으로 그녀의 젖가슴을 그악스럽게 주무르면서도 뚫린 입이라고 잘도 지껄이고 있었다. 자신이 대단히 야비하고 교활한 철면피라는 것을 그는 이제야 알았다.

그러나 릴리는 그를 밀어내는 대신 손으로 그의 허리춤을 더듬었다. 카르낙은 그것의 의미를 기민하게 파악했다. 그는 재빨리 제 허리띠를 풀어 아무렇게나 던져 버렸다. 그러고는 제 조끼의 단추를 풀어 마찬가지로 던졌다. 머리 위로 블리오를 벗어 버리는 몸짓이 자못 서툴고 초조하였다. 재빠르게 상반신을 탈의하고 몸을 숙이는데 릴리가 그의 어깨를 잡았다.

“폐하.”

설마 이제 와 싫다는 건가 싶어 그는 멈칫했다. 눈을 깜빡이며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 시간이 억겁처럼 느껴졌다. 릴리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제가 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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