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로리아나가 얌전히 그를 따라 걸음을 옮기려는데 핀이 조용히 왕을 불렀다.
“폐하.”
그 바람에 걸음은 다시 멈췄다. 핀은 로리아나를 한번 힐끗 보고 왕의 곁에 가까이 다가가 말했다.
“봐야 할 게 있어.”
봐야 할 것?
“뭔지는 모르지만 바쁘니까 나중에 보지. 네가 저 여자와 하룻밤 뒹군 값을 치러야 하거든.”
“거기에 약값도 잊지 마시구요.”
태연한 목소리로 말을 덧붙이니 카르낙은 지독한 여자라며 눈을 굴렸다. 한 번쯤 픽 웃음을 터트릴 만도 한데 핀의 얼굴에는 여전히 웃음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심각한 분위기는 그렇게 감지되었다. 카르낙이 낮게 물었다.
“뭔데?”
“다미앵이라는 귀족이 찾아왔어. 투로가 제 가족을 모두 죽였대.”
“무슨 이유로?”
“몰라. 원한 관계는 아니라는데 놈을 처리해 달래.”
카르낙과 반목하는 도시이면 몰라도 그의 치하 아래에 있는 도시들에서 투로는 더 이상 노예가 아니었다. 노예가 아니었으므로 사람들은 저와 동등한 지위를 가진 투로를 처벌할 수 없었다. 보통의 경우 사제나 법관, 혹은 영주에게 찾아갔고, 캘던에는 사제도 법관도 없으니 영주인 왕을 찾아오는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카르낙이 왕이 된 이후, 사람들은 투로에게 해코지하는 것을 두려워했고 또한 그것이 당연했다. 발투만은 투로들의 왕이 아닌가. 그러니 투로의 처분을 물으려거든 마땅히 그를 찾아와야만 했다.
“어디에 있는데?”
“두 번째 문루 앞에.”
카르낙은 결국 발걸음을 옮겼다. 로리아나도 그를 따라 성채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근위병들이 씩씩거리는 다미앵과 그에게 포박되어 붙들려 온 산짐승 같은 투로를 에워싸고 있었다. 명망 있는 귀족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만큼 투박한 손으로 다미앵은 몇 번이고 마른세수를 했다. 짧게 손질된 그의 적금발에는 그동안의 마음고생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 듬성듬성 하얗게 센 머리가 섞여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새까만 머리를 휘날리며 등장한 투로의 왕을 보고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그는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폐하! 부디 억울한 저의 사연을 들어주십시오!”
카르낙은 굵은 밧줄에 사지가 묶인 비렁뱅이 같은 투로와 제 앞에 납작 엎드려 울음을 터트리는 사내를 무감한 표정으로 내려보았다.
“저는 캘던에 살고 있는 클레제 다미앵이라고 합니다! 저의 가문은 한때 많은 노예와 재산을 갖고 있었으나 폐하께서 왕좌에 오르신 후, 폐하께서 제정하신 칙령에 따라 데리고 있던 노예들에게 정당한 품삯을 지불하여 풀어 주었나이다! 거기에 어떠한 불만도, 억울함도 품지 않았다 감히 저는 맹세할 수 있습니다. 그 후 저희 가문은 폐하의 종으로서, 또 백성 중 한 사람으로서 언제나 성실하게 폐하의 뜻을 따르며 살아왔습니다. 귀족으로서 늘 타인의 모범이 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그것은 이 캘던의 모든 사람들이 알 것입니다!”
다미앵의 눈은 분노와 슬픔으로 붉게 충혈되었다.
“그런 저의 처와 아무런 죄가 없는 어린 딸아이를….”
다미앵은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부르르 떨다가 피를 토하듯 소리 높였다.
“짐승만도 못한 저자가… 겁간하고 살해하였습니다! 차라리, 차라리 저를 죽였다면, 집에 남은 것이 딸과 아내가 아니라 저였다면 하고 매일 매시간 아마네스 님께 부디 과거를 되돌려 달라고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다못해 누군가… 누군가 노략질을 하러 들어왔거든 가진 것은 모두… 모두 내놓고 다만 목숨이라도 부지하라고…. 그렇게 한마디라도 해 줄 수 있었으면….”
“…….”
사내의 비통한 하소연에 사방은 침묵에 휩싸였다. 젖은 땅을 짚은 그의 투박한 손등 위로 눈물이 떨어졌다. 카르낙은 덜덜 떨리는 다미앵의 굽은 어깨를 바라보았다. 흙과 물이 지저분하게 얽혀 있었다. 그토록 괴로움을 토하는 다미앵을 바라보는 투로의 얼굴엔 아무런 표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마치 남의 일인 양, 저와는 상관없는 일인 양.
“사흘 밤낮을… 저놈을 찾아다녔습니다. 사흘 밤낮을… 먹지도 자지도 쉬지도 않고… 그러니 부디, 부디 저놈을 단죄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캘던의 신실한 시민으로서, 엘버그 왕국의 충직한 백성으로서 폐하께 자비를 구합니다. 부디… 제 손으로 저놈을 죽이도록 해 주십시오.”
“…네놈의 이름은 무엇이냐.”
카르낙이 투로를 향해 물었다. 며칠간 씻지 않은 듯 그의 몸에선 냄새가 났고, 아무렇게나 묶어 올린 머리는 빗질도 하지 못한 짐승의 털처럼 너저분하게 얽혀 있었다. 사내는 누런 눈알을 굴려 카르낙을 쳐다보았다. 왕을 올려보는 눈에는 왕을 향한 존경도, 예의도, 겸손도, 또한 두려움이나 괴로움도 없었다. 모든 것에 달관한 것처럼 그저 무심히 입을 열었다.
“없다. 그런 것.”
불경하기 이를 데 없는 대답에 핀이 조용히 제 검집을 잡았다. 여차하면 그것을 꺼내 놈의 목을 벨 작정이었다.
“이름이 없다.”
카르낙이 그의 대답을 되풀이해 중얼거렸다. 노예가 된 투로에게도 이름은 있다. 간신히 하루하루를 연명하며 살아가는 투로들에게도 이름은 있었다. 그런데 이름조차 없다라.
“다른 이들은 너를 무어라 불렀지?”
“아무렇게나. 되는대로 불렀다. 검둥이, 썩은 나무, 지렁이, 말똥, 아무렇게나 불렀다.”
“너는 살인마다! 살인마! 더러운 살인마!”
다미앵이 악을 쓰자 사내는 새까맣게 썩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지저분한 얼굴에 듬성듬성 주름이 졌다.
“피도 눈물도 양심도 없는 미치광이 같으니! 너같이 세상을 더럽히는 추잡한 오물 덩어리는 죽어 없어져야 마땅하다!”
다미앵이 악을 쓰면 쓸수록 그의 웃음도 히스테릭해져 갔다. 핀은 그 모습에 실소했다. 정말로 미치광이가 따로 없었다. 결국 참지 못한 다미앵이 제 허리춤에서 칼을 빼 들었다.
“검을 다시 검집에 넣어 둬라, 다미앵.”
그것이 카르낙이 처음으로 다미앵에게 건넨 첫마디였다. 그리 피를 토하며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였건만 저 살인마의 이름만을 물었을 뿐, 저의 이야기는 제대로 들어주지도 그에 제대로 된 답을 해 주지도 않았다. 그러며 건네는 말이라고는 분에 이기지 못해 든 검을 내려놓으라니.
“놈을 죽여야 합니다, 폐하! 죽이게 해 주십시오! 놈은 죄의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카르낙이 얕은 한숨을 내쉬며 핀에게 손바닥을 내밀어 보였다. 그러자 핀이 그의 손에 자신의 검을 들려 주었다. 카르낙이 검을 바로 쥐고 둘을 향해 걸음을 내딛었다.
왕이 나서자 다미앵은 검 끝을 내리고 주춤 뒤로 물러났다. 카르낙의 그림자가 투로의 위에 드리웠다. 위압적인 모습에 모두 숨을 죽였다. 다미앵조차 순간 살기를 잊었다. 그러나 놈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광기에 젖은 탁한 눈동자를 들어 그를 비웃을 뿐이었다. 악, 놈에게 남은 것은 끝없는 악뿐인 것처럼.
카르낙은 검을 치켜들었다. 다미앵은 빛을 뿜어내는 그 선연하고 날카로운 단면을 응시했다. 드디어 살인마를 단죄할 때였다. 저 칼끝이 놈의 심장을 관통하고 도려낼 때였다.
높게 치켜든 카르낙의 검은 단번에 사선을 내리그었다. 쉬익, 하고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찰나 모든 소음이 소멸하였다. 그 후 두 동강으로 갈라진 것은 이름 없는 살인마가 아니라 서글프게 일그러진 다미앵의 얼굴이었다.
울컥 피를 토하며 그의 몸은 두 쪽으로 갈라져 바닥으로 낙하하였다. 핏물이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근위대는 그것을 피하려 한 발 더 뒤로 물러섰다.
“…….”
이름 없는 투로의 얼굴은 그제야 굳었다. 비소도, 희열도, 광기도 일순 멎었다. 다미앵의 핏물을 그대로 뒤집어쓴 그는 넋이 나간 채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다미앵의 시신을 바라보다 카르낙에게 시선을 옮겼다. 왜. 대체 왜.
그러나 카르낙은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핀에게 검을 돌려주며 더는 볼일이 남아 있지 않다는 듯 심드렁히 명령했다.
“놈을 풀어 줘라.”
“예, 폐하.”
근위병들이 달려들어 그의 포박을 풀기 시작했다. 왕은 군중의 사이를 가르며 멀어졌다. 핀이 제 망토 자락에다 검에 묻은 핏물을 한번 닦아 검집에 넣고 그의 뒤를 따랐다. 로리아나는 황망한 눈으로 왕의 뒷모습을 쫓는 투로의 얼굴을 쳐다보다 비틀비틀 왕을 따라갔다.
다미앵은 명망 있는 귀족이다. 그의 아내와 딸자식까지 투로의 손에 잃었으니 모두가 그 일에 공분하며 다미앵의 처지를 딱하게 여길 것이다. 한데… 왕은 그런 자를 죽였다. 죽어 마땅한 자는 살아서 두 발로 걸어 나가게 하고 정작 억울함에 땅을 치는 자를 죽였다.
처와 딸자식을 잃은… 부유하고 모범적인 귀족을…. 로리아나는 머리가 띵했다. 둔탁한 것에 얻어맞은 다음엔 날카로운 것이 제 살갗을 찌른 듯 온몸이 따끔하였다. 이제야 현실이 제대로 눈앞에 보이기 시작했다.
저가 지금껏 누구를 상대하고 있었는지. 감히 다미앵에 관하여 말할 수가 없었다. 그를 죽인 것은 잘못된 일이고, 곧 캘던 사람들의 공분을 사게 될 것이라고. 그것을 말하는 것이 마땅함에도 감히 그럴 용기가 나질 않았다.
제 앞에 걸어가고 있는 저 사내는 카르낙 발투만. 밑바닥에서 기어 나와 마침내 왕좌를 차지한 잔인하고 흉폭한 자. 이제야 무서워 온몸이 덜덜 떨릴 지경이었다.
그래, 이제야 제대로 그를 보게 된 것이다. 지금껏 멋대로 짖고 까불어도 살아남은 것은 로리아나 자신이 그 이름 없는 사내와 마찬가지로 투로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마음에 들어서도, 혹은 그녀에게 인간적 호의를 느껴서도, 혹은 그녀에게 원하는 것이 있어서가 아니라 오로지 그 이유 하나로 지금껏 목숨줄이 붙어 있는 것이다.
찬물을 얻어맞은 듯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차마 그의 그림자조차 밟기 두려워 로리아나는 아주 멀찍이 그의 뒤를 따랐다. 성을 나설 때까지 로리아나가 고개를 들어 카르낙의 얼굴을 보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