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창부와 국왕의 거리는 하늘과 땅의 차이이나 투로의 사내와 투로의 계집의 사이는 다르다. 어차피 둘 다 진창이었다. 그래. 내가 그래서 당신을 좋아하지, 카르낙 발투만. 그 비틀린 심성을 말이야.
“그렇다면 원하는 만큼 값을 쳐 주세요.”
“형제끼리 야박하게 굴지 말자고.”
“형제가 내게 돈이 되는 것도 아니잖아요.”
“서신을 주고받는 것 정도는 어떨까요, 로리아나?”
둘의 흥정에 릴리가 조용히 끼어들었다. 카르낙과 로리아나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
“친구로서요.”
“…….”
물정에 아둔한 여자인가. 창부와 친구를 하는 왕족이 어디 있단 말인가. 차라리 정부로 들이면 모를까. 정말 물정을 몰라 이러는 것일까, 알면서도 이러는 것일까, 그녀가 살던 곳에는 몸을 파는 계집들이 없었던 걸까. 사람이 있는 한 몸을 파는 이들은 어디에나 있지 않겠는가. 정말로 종잡을 수가 없는 왕가다.
“기꺼이 전하의 서신에 답을 하고 싶습니다만…. 저는 글을 읽고 쓸 줄 모릅니다.”
“아….”
잠시, 로리아나가 투로였다는 사실을 까먹고 말았다. 대부분의 투로는 글을 읽고 쓸 줄 모른다고 하였지. 로로나 카르낙같이 예외인 경우를 제외하면 말이다.
“죄송합니다, 전하.”
“아니요. 오히려 내가 미안한 일이에요. 잠시 로리아나의 사정을 깊게 헤아리지 못했어요.”
그러자 로리아나는 부드럽게 웃었다.
“저 같은 계집은 전하께서 깊게 헤아릴 만한 것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니 마음에 담아 두지 마세요.”
“그러면… 글을 배우면 어떨까요?”
“…예?”
로리아나는 헛것을 들은 양 다시 물었다. 릴리는 신이 난 듯 눈을 빛냈다.
“엘버그의 글은 그리 어렵지 않아요. 오랫동안 이곳을 떠나 있던 저도 금방 익숙해졌거든요. 그러니 분명 아주 금방 배울 거예요.”
“…….”
생각지도 못한 일이다. 글을 배운다고? 글을 배울 수가 있나? 아무리 세상이 뒤바뀌었다 해도 그녀는 창부에 투로였다. 누구도 천한 이에게 글을 가르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아직, 엘버그는 아직 그만큼의 변화를 받아들일 만큼 변화하지 못했다.
“하지만 저는….”
“사창가에 글을 읽거나 쓰지 못하는 창부들이 얼마나 되죠?”
로리아나는 부나비의 창녀들을 떠올렸다. 돈 때문에 잡혀 들어온 엘버그 계집들을 빼고는 모두 문맹이었다. 그러니까…
“열에 대여섯 명은 될 겁니다.”
“아, 그렇다면….”
릴리는 반색하며 카르낙을 향해 말했다.
“교습소를 만들면 어때요? 그동안 배울 기회가 없는 사람들을 위해 무료로 글을 가르쳐 주는 거예요.”
언어란 것은 보통 귀족과 왕족을 위한 것이었다. 흙을 일구고 물질을 해 목숨을 연명하는 이들은 수를 읽고 셈을 하는 정도만 알면 그만일 뿐. 감히 더 배우려는 자도, 더 가르치려는 자도 없었다.
그러나 이제 그런 세상은 끝났다. 영주민들에게 공짜로 글을 가르치려는 영주가 얼마나 될까. 분명 후에 귀찮은 일이 될 것이라 여겨 소극적일 것이다. 그러나 캘던은 완연한 발투만 왕가의 땅. 이곳에서야 못 할 것이 없다. 투로에게 글을 가르친다라. 꽤 마음에 드는 장면이지 않나.
“…일이 너무….”
“안 될 것 없지. 로로와 의논해야겠어.”
일이 너무 커지는 것 같다고 이야기하려는데 카르낙이 냉큼 대답해 버렸다.
“에이가는 빼고. 또 엘버그인들의 반감을 살 거라느니, 싫어할 거라느니 말이 많을 테니.”
그러자 릴리가 편을 들며 나섰다.
“에이가는 완고하고 보수적이지만 분명 합리한 사람이에요. 그러니 충분히 이야기하면 뜻을 알아줄 거예요.”
“그러면 시간이 꽤 걸릴 거야, 릴리. 나라면 하루라도 더 빨리 처리하겠어. 로리나와 서신을 주고받고 싶다면.”
“로리아나입니다, 폐하.”
“그래. 로리아나와 하루라도 빨리 서신을 주고받고 싶다면 말이야.”
흠. 릴리가 미간을 구기고 골몰했다. 괜스레 국왕 부부를 번잡스레 하는 것 같아 로리아나는 손사래를 쳤다.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 같은 계집을 돕고자 근심하지 마세요. 저는 그저 캘던의 천한 창부일 뿐입니다. 저 같은 것은 무시하십시오, 전하. 그것이 전하에게 더 이롭습니다.”
그러자 릴리가 차분하고 따듯한 어조로 말했다.
“당신은 똑똑하고 아름다운 여자죠, 로리아나. 그리고 폐하의 형제이시고요. 이보다 더 훌륭한 친구가 어디 있겠어요.”
“어떤 우정은 어둠에 숨어 있어야만 가치가 있는 법입니다. 그러니 저는 그저 음지에 있겠습니다.”
“하지만 나는 당신과 계속 이야기하고 싶어요. 만날 수 없다면 글로라도요.”
“미천하나 제법 번 돈이 있습니다. 캘던의 사창가를 비롯해 제가 글을 읽고 쓰는 문제는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전하”
“좋아. 그럼 네가 알아서 하라고.”
성격 급한 카르낙이 먼저 나서서 대답했다
“정 못 정하겠으면 가위바위보를 하든가, 제비뽑기를 하든가, 아니면 팔 길이가 누가 더 긴가, 그런 걸로 정해. 쉽고 간단하잖아.”
“…….”
“너도 어서 가 봐야 할 테고, 릴리도 어서 쉬어야 할 테고, 무엇보다 내가 지루하단 말이야.”
“…….”
이 골치 아픈 왕은 완전히 기분파다. 삶의 모든 결정은 죽느냐 사느냐가 아니면 재미있느냐, 없느냐로 나뉘는 것 같았다. 로리아나의 눈앞에 이 아름답고도 위대한 젊은 왕의 말로가 그려졌다.
그는 결코 오래 살지 못하리라. 삶의 중요한 고비마다 변곡점이 될 테고, 그것이 쌓여 종국엔 파멸할 것이다. 그는 찬란히 타올랐다 산산조각 나는 부질없는 불꽃 같은 왕으로 남을 것이다. 누구든 그의 곁에 남아 그를 지키지 않는다면. 로리아나가 차분하게 덧붙였다.
“가끔은 그 지루함을 다르게 칭하기도 하지요, 폐하. 평화라고요.”
또 재미없는 이야기. 카르낙은 푸, 하고 입술을 떨었다.
성에 들어와 왕을 만나기 전까지 로리아나는 카르낙 발투만이 마냥 무섭고 잔인하며 비정한 사나이일 것이라 생각했다. 커다란 몸에 오로지 장검 하나만을 두른 채 엘버그인들을 무자비하게 살육한 금수 같은 왕. 그래서 호기심이 일었다. 얼마나 천박하고 무자비한지 제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몸서리가 쳐질 지경이었다.
그러나 실상 눈 앞의 카르낙 발투만은 덩치만 큰 어린아이. 사내라기보다 소년 같았다. 아직 어른이 되기에 한참 먼, 아직 가야 할 길이 너무 많이 남았고 배워야 할 것들이 까마득히 쌓인. 그래서 엘버그인들에겐 더 위험하고 무서운 왕일까. 투로들에겐 다시없을 위인이 될 테지만 말이다.
그런 카르낙 발투만을 로리아나는 돕고 싶었다. 그의 곁에 있는 이들은 모두 그런 카르낙에게 마음이 움직였으리라. 위태로워 엇나갈 것만 같은 조바심에 챙겨 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감히 한 말씀을 더 보태자면 두 분은 정말 이 나라에 어울리지 않으십니다. 누구보다 엘버그에서 큰 의미와 상징을 지니신 분들이지만요.”
“그러니 어울리게 만들어야지. 대대손손 발투만의 피가 지워지지 않도록.”
카르낙이 씨익 웃었다. 맑은 호를 그리며 올라간 입매와 가지런히 드러난 하얀 치아가 꽤 근사하여 그 모습만은 제법 왕처럼 고귀하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면 정말이지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사내인 것 같았다. 열 번 중 아홉 번은 저를 곤란하게 할지라도 말이다.
“폐하께서 그리는 세상은 그다지 밝지 않을 것 같습니다만….”
하며 로리아나는 릴리를 보았다.
“전하께서 꿈꾸는 세상이라면 한 번쯤 보고 싶긴 하네요.”
그래. 파니릴리가 꿈꾸는 세상은 분명 아름답고 향기롭겠지. 분명 동화에서나 존재하는 세상일 것이다. 그리하여 절대 이루어질 리가 없는 세상일 터였다.
“네게 욕을 해야 할지 칭찬을 해야 할지 모르겠군, 로아나.”
“로리아나입니다. 아무렇게나 부르실 거면 차라리 하나로 통일을 해 주세요. 로아나건, 로라나건, 로리나건.”
로리아나의 턱근육이 꿈틀했다.
“대충 부르자고. 로리아나건 로아나건 그게 그거잖아.”
그게 그거라니. 방금 전까지 형제라면서. 내가 좋을 땐 형제요, 내가 싫을 땐 이름조차 제대로 못 외우는 남이다 이건가. 적어도 로리아나란 이름은 ‘카르낙 발투만’이란 이름보다는 외우기도 부르기도 쉽다.
“첫 서신은 폐하께서 치르셔야 할 대금을 적는 것부터 시작하지요.”
“아무래도 너에겐 에이가를 붙여야겠어, 로라.”
이젠 로라…. 과연 그의 입에서 몇 개의 이름이 나올까 도리어 궁금해질 참이다.
“이제 내 아내가 쉴 수 있도록 해 주겠어? 돈 이야기를 나누기 적절한 장소로 옮기자고. 난 거기를 ‘무덤’이라고 부르는데 말이야.”
카르낙이 릴리에게 다가가 다정하게 입을 맞췄다.
“조금 쉬도록 해, 릴리. 세일린에게 마사지할 따듯한 물과 수건을 가져오라고 할게.”
“괜한 걸음을 하셨어요. 괜스레 저 때문에 소란스러워진 것 같아 좀… 민망합니다.”
“소란스러워질 만하지, 릴리. 넌 내 처이고 엘버그의 왕비잖아.”
“…유념할게요.”
그 유념은 릴리가 아니라 저 금수 같은 사내가 해야 하는데 말이다. 로리아나는 삐딱하게 서서 카르낙이 릴리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조심스레 휘장을 매만지며 나오기를 얌전히 기다렸다. 문을 닫을 때쯤 로리아나가 조용히 말했다.
“왕비님을 정말 사랑하시는 것 같습니다.”
카르낙이 씁쓸하게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넌 가족을 만드는 꿈을 꾸어 본 적이 있나, 로아나?”
“아니요.”
“마찬가지야. 우리에겐 거세된 꿈이었지. 내가 이룬 것은 모두 오직 살기 위해서였어. 살기 위해 하게너를 죽이고, 살기 위해 전쟁을 치르고, 살기 위해 왕이 되었지. 평생 이룰 리가 없는 꿈이라고 생각했어. 나 같은 벌레를 남편으로 섬길 여인이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거든. 그러나 파니릴리는 날 남편으로 대해. 명분과 명예는 물론 내가 벌레가 아닌 사람이라고 느끼게 해 줘. 존중받아 마땅한 사람으로, 또 왕으로, 또 아름다운 아내를 둔 보통의 사내로.”
“…….”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내가 그녀를 소중히 대할 이유로는.”
좋은 왕인지, 좋은 친구인지, 좋은 사내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카르낙 발투만은 좋은 남편이다. 그것만은 분명했다. 그것도 무엇 하나 가지지 못한 사내들이 콩나물시루처럼 들어차 있는 이 나라에.
방에서 나온 카르낙은 세일린에게 따듯한 물과 수건을 준비하도록 하고, 리쿠스에게는 릴리가 심신에 안정을 찾을 수 있는 향초를 피우도록 지시했다. 그는 명령하는 것에 익숙해 보였고, 다른 이들은 그의 말을 따르는 것에 익숙해 보였다. 기묘하고 낯선 광경이었다. 아마 평생 익숙해지지 않을 광경이겠지. 언제나 신기한 광경일 터였다.
“따라와.”
카르낙이 로리아나를 향해 턱짓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