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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발 아래 은빛 눈-48화 (48/231)

48화

조용하고 인적은 없으나 사방이 트여 단둘뿐인 밀실은 아닌 곳으로 가야 했다. 세일린에게는 대장간의 앞에서 기다리라고 한 뒤 카르낙은 그녀의 손을 잡고 성의 뒤편 그녀의 정원으로 향했다. 인적은 드물지만 사방이 트여 있으니 릴리와 있으면서도 정신 줄을 붙잡고 있기엔 딱 적당한 장소였다.

정원의 초입에서 카르낙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릴리의 손을 놓아주었다. 릴리는 카르낙이 놓아 준 손을 감추듯 제 손으로 포개어 잡고 그를 마주 보았다.

갑작스레 끌려 나오긴 했지만 릴리는 영문을 몰랐다. 그가 대장간에 온 이유도, 자신을 이곳에 데려온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오늘은 오후 내내 대장간에 있을 작정이었다. 그곳에서 스탠에게 유리 공예를 배우려고 했다. 철을 두드리는 것보다는 쉽고 신비로워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기에는 딱 좋았다.

울적해 보이는 저를 배려해 준 스코크의 마음이 고맙기도 했고 또 그곳에 있으면 종일 저를 짓눌렀던 상념들에서 해방되는 것 같아 좋았다. 그런데 또 그것이 카르낙의 심기를 상하게 한 것일까. 어떻게 하면 그를 배려함과 동시에 자신에게도 이로울 수 있는지 도저히 그 해답이 보이지 않아 릴리는 눈앞이 깜깜하기만 했다.

그때였다. 누군가 릴리의 정원에서 커다란 나무통을 지고 나왔다. 그녀는 땀에 전 이마를 손등으로 문지르며 나오다가 릴리와 카르낙을 발견하고 황급히 몸을 숙였다. 손이고 옷이고 모두 모래와 먼지투성이였다. 손에 들린 물건들도 심상치 않았다.

“폐하. 아가씨.”

릴리의 정원은 아무도 함부로 들어갈 수 없었다. 카르낙이 릴리에게 선물한 순간부터 그곳은 그녀를 위한 사유지였다. 그러한 곳에서 나왔으니 발견한 이도 발견된 이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뭘 하고 있었죠?”

릴리가 묻자 시녀는 더 깊이 몸을 숙이며 대답했다.

“아가씨의 정원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정원의 식물들이 모두 죽을까 염려되어 먼지를 닦아 내고 물을 주었습니다. 다만 한 곳이라도… 한 곳이라도 살려 보고자….”

“…….”

카르낙은 엎드려 읍소하는 그녀의 팔에 칭칭 감긴 붕대에 눈길을 주었다. 언뜻 보이는 붉은 흉터는 분명 살이 녹아 붙은 흔적이었다. 저장고를 지키던 시녀였던가. 그녀는 계속 말을 이어 갔다.

“아가씨 덕에 사지를 건사하였건만…. 제가 보은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이것뿐이라….”

릴리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넓은 정원 어느 한 곳만이라도 쌓인 먼지를 깨끗이 닦아 내고 물을 주어 푸릇한 잎과 싹이 다시 돋아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었다. 내내 고열에 시달리다가 살이 어느 정도 아물어 고통이 희미해졌을 때부터 그녀는 마른 천과 물통을 이고 릴리의 정원에 갔다.

그저 정원의 초입만이라도 제 모습을 찾을 수 있길 바라면서 그녀는 매일 식물 위의 먼지를 닦아 내고 물을 뿌렸다. 그러면서 매일매일 부디 죽지 말고 어여쁘게 자라서 릴리 아가씨를 기쁘게 해 달라고 속삭이며 기도했다.

“…고마워요. 하지만 전 한 게 없는걸요.”

“아닙니다, 아가씨. 아가씨가 리쿠스 님을 보내 주지 않으셨다면 저는 팔을 건사하지 못했을 겁니다. 성에서 쫓겨난 채 평생 외팔이로 살며 비렁뱅이질을 했을 겁니다. 제 목숨을 살려 주신 건 아가씨세요. 저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아가씨 덕택에 목숨을 부지했습니다. 저희에게 아가씨는 은인이십니다. 아마네스 님이 보내 주신 귀한 선물입니다.”

“…….”

그저 순리에 따른 거다. 올라에게서 배우고 그라타에서 깨친 사람이라면 누구나 해야 하는 너무나 당연한 일들을 했을 뿐이다. 이토록 과하게 칭송받을 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저 이런 상황이 낯설고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그래서 카르낙이 나섰다. 그는 담담히 명령했다.

“릴리 아가씨는 네 마음을 잘 알았을 거다. 이만 가 봐.”

시녀는 다시 한번 몸을 깊게 숙여 인사를 하고 성으로 향했다. 릴리는 시녀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만 보다가 다시 카르낙에게 시선을 돌렸다. 마치 계속해서 그녀만을 쳐다본 듯 카르낙의 시선은 얼굴을 마주하기도 전에 릴리의 눈동자에 담겼다.

“모두가 너를 사랑하는군, 릴리.”

그는 무슨 의미로 이런 말을 하는 걸까. 모두가 저를 사랑하는 것이 싫은 걸까. 탐탁지 않다거나 혹은 두려운 걸까. 알기어스의 핏줄이 다시 엘버그인들에게 사랑받는 것이 그에게는 어떻게 생각을 해도 좋은 일은 아닐 것 같았다.

“감사한 일이지만 큰 의미를 두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게 그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엘버그인들에게 사랑받는 것이 나쁜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녀에게 좋은 일도 아니었다. 잔인하게 이야기하자면 별 쓸모가 없는 것이었다.

그나저나, 그게 문제가 아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따로 있었다.

“정말 그걸 가져가실 거예요?”

“뭐? 이거?”

카르낙이 품에서 동그랗고 쓸모없는 공예품을 꺼내 보였다. 릴리의 얼굴이 부끄러움으로 붉게 달아올랐다. 입술을 꼭 물고 숨을 삼키는 모습이 자못 안타깝게 보였다.

“내가 갖지 않으면 누굴 주려고?”

“누구에게 줄 만한 것이 못됩니다. 스탠이 유리는 얼마든지 녹여서 사용할 수 있다고 했으니 그걸 녹여서….”

“그 세바스탠이란 놈이 말했잖아. 그럴 거면 자신이 갖겠다고. 그렇게 둘 순 없지.”

왜? 릴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차피 저에게는 필요하지 않으니 그가 녹여서 다시 공예품을 만들든 아니면 가져가서 다른 용도로 쓰든 사실 릴리는 상관이 없었다. 다만 이것을 카르낙에게만은 주고 싶지 않았다. 그는 왕이고 자신의 지아비이니 더 소중한 것을 정성 들여 만들어 주고 싶었다. 그런데 가장 갖고 있지 않았으면 하는 이가 갖겠다니 난감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농담을 한 것일 거예요.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분명 녹여서 사용하겠지요. 쓸모없는 물건에 재료를 낭비할 순 없으니까요.”

카르낙은 답답하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자가 저를 보는 눈빛을 읽었다면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그놈이 이걸 가져다가 제 방에다 놓고 밤마다 보며 무슨 상상을….’까지 떠올리다가 카르낙은 진저리 치며 머리를 털었다.

정신 차려, 카르낙 발투만. 그런 끔찍한 상상은 하는 것이 아니야.

떠올리고 싶지도 않다. 그 상상의 단 한 톨이라도 머릿속에 그리고 싶지 않다. 그것보다 더 싫은 건 그의 상상을 유추할 수 있는 자신이었다. 사실 릴리를 두고 음란한 상상을 하는 것은 바로 자신이지 않냐고.

단지 세바스탠에게 자신을 투영한 뒤 그럴 거라고 단정 짓는 것은 아니냐고. 그런 생각에 매몰될까 두려워 카르낙은 서둘러 떨쳐 내 버렸다.

“불편해 보이십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요 며칠 계속 걱정했습니다. 제가 폐하의 심기를 거스른 것이 무엇이 있는지….”

릴리는 잔뜩 구겨진 카르낙의 미간을 보며 말했다.

“무엇이 그토록 불편한지 말씀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혹여 제가 폐하를 불편하게 만든 것이 있다면 고쳐 보겠습니다.”

“…….”

고칠 수 없다. 어떻게 고치겠다는 건가. 도무지 자신이 왜 이러는 건지 스스로도 이유를 모르는데 그걸 어떻게 알고 고친단 말인가. 대체 어쩌고 싶은 걸까. 파니릴리를 어떻게 하고 싶은 걸까.

그녀에게 네가 스탠이란 놈과 시시덕거리는 게 싫으니 대장간엔 가지 말라고 하면 될까?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걸까? 아니면 자기 것을 빼앗기기 싫은 철부지 아이처럼 다른 이들이 너를 좋아하는 게 싫으니 다른 이들에게는 못되게 굴라고 하고 싶은 걸까?

카르낙은 일전에 분명 약속했다. 네가 이곳에 머무르기만 한다면 네가 무엇을 하든 그 뜻을 존중해 주겠다고. 그렇게 말해 놓고 이제 와 배알이 뒤틀려 안 되겠다고 해야 하는가. 한 번 내뱉은 말을 쉽게 꺾어 버리는 사내가 되고 싶진 않았다.

자가당착이었다. 설명할 수 없는 감정에 정신이 아득하기만 했다. 릴리와 함께하는 내내 이래야만 하는 걸까. 분간할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혀 때때로 이토록 어지럽고 시야가 흐려져야만 하는 걸까.

카르낙은 불안해 보였다. 그가 왜 이러는지 알 길이 없다. 가까워졌다고 생각하면 멀어지고 친해졌다고 생각하면 다시금 저를 밀어내곤 하는 그의 저의가 궁금했다. 로로는 그의 안에 작고 어린 칼이 있다고 했다.

상처 받고 싶지 않아 웅크린 자아가. 그 불안한 영혼은 대체 어떻게 감싸야 하는 걸까. 자신이 먼저 솔직해진다면, 그렇다면 그도 조금은 자신을 내보일까.

“저는 다른 이의 사랑 같은 건 필요하지 않아요.”

릴리는 고심하다 말했다.

“제게 필요한 것은 오직 폐하의 사랑뿐입니다.”

“…….”

카르낙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아무렇지 않기 때문에 변화가 없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굳어 버려서 변화가 없었다. 숨은 쉬고 있는 것인지 의아할 지경이다.

“제가 무엇 때문에 엘버그에 왔는지….”

카르낙이 별안간 릴리의 입을 막았다. 릴리는 커다래진 눈을 깜빡였다.

“그만. 그만하면 됐어.”

그가 더듬더듬 말했다. 난처하고 곤란한 표정 같기도 하고 들뜨고 분한 표정 같기도 하고 꼭 울 것 같은 표정이기도 했다. 확실한 것은 그의 가슴께가 가파르게 오르내리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꼭 전력을 다해 뛴 사람처럼 숨을 쉬었다.

“릴리, 나는 고상하거나 우아하지 못해. 알다시피 나는 천박한 사람이야. 난폭하고 정력적이지만 결코 친절하고 상냥하진 못하지. 에이가는… 그녀는 내게 사내는 자신의 아내를 아끼고 존중해 주어야 한다고 했어. 그래서 나는….”

그는 마른 입술을 축이고 침을 한 번 삼킨 후 말을 이었다.

“나는 너를 아끼고 싶어…. 아끼고 싶다. 하지만 그러지 못할까 봐 두려울 때가 있어. 요즘엔 자주 그래. 그러니 혹여 내가 너를 피하는 것이라 생각한다면, 릴리. 그건 내가 너를 아끼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

릴리는 눈을 좌우로 천천히 굴리기 시작했다. 카르낙의 말을 이해할 시간이 조금 필요했다. 그러다가 릴리는 제 입을 막은 카르낙의 손등에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긋기 시작했다.

뭐지…. 글씨인가? 카르낙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의 감촉을 느꼈다. 가렵기만 할 뿐 뭐라 쓰는지 이해하기가 어렵다.

카르낙이 궁금증에 못 이겨 손을 떼자 릴리가 ‘후아’ 하고 크게 한숨을 내뱉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아끼기 위해 피한다는 말은, 그러니까 제가 폐하에게 위협이라도 된다는 말씀이신가요?”

“아니.”

아니야, 릴리. 그런 뜻이 아니라고.

“그 반대야. 내가 너에게 위협이 된단 말이야.”

“그렇지 않아요.”

릴리는 완강하게 부정했다. 뭣도 모르면서.

“그럴 리 없지만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그럼 저를 아끼지 마세요.”

“…….”

“보살핌 받으려고 온 게 아니에요. 사용되기 위해 온 거라고요. 처음부터 지금까지 쭉, 오로지 그러기 위해 온 거예요. 저를 사용하셔야 해요. 그래야 제게도 이곳에 있을 가치와 목적이 생깁니다.”

“네가 널 어떻게 사용해!”

아아, 릴리. 처음엔 그랬을 거야. 분명 처음엔 너를 이용하려 했다. 마침 모든 조건에 들어맞는 너를 쓰고 나서는 버리려 했었다. 네 걱정 따윈 하지도 않았어. 그땐 널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차라리 네가 조금 더 못됐으면 어땠을까.

네가 조금은 더 이기적이거나, 조금은 덜 상냥하거나 아니면 조금이라도 덜 아름다웠더라면. 그렇다면 나는 주저 없이 너를 사용하고 버렸을 거다. 네가 상처 입을까 두려워 너를 피하지도 않았을 거다.

너는 알기어스의 피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깨끗하다. 엘버그의 사람이라고도 생각할 수가 없다. 갓 태어난 아이처럼 이곳의 오물이라고는 조금도 묻지 않았다. 너는 그라타에서 그처럼 깊고 푸른 자연을 담아 왔고 나는 감히 그것을 사용할 수가 없다.

너의 신비로움을 망가뜨릴 수가 없다. 어느새 너를 아끼고 있다. 네가 망가질까 두려워 너를 피하고 있다. 그러니 부디 너를 쓰라고 하지 말아 다오. 그럴수록 나는 더 너를 이용할 수가 없다.

“릴리….”

카르낙은 손을 들어 작은 흉이 번진 그녀의 뺨을 매만졌다. 부서질까 두려워 뺨을 만지는 그의 손끝이 조심스레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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