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릴리는 한 손에는 쇠로 된 집게, 다른 한 손에는 가위를 든 채로 붉게 달아오른 유리 덩어리를 바라보았다.
세바스탠은 긴 쇠막대기를 막 화로에서 꺼내 폭이 좁은 긴 작업대 위에 올리며 말했다.
“자. 여기 있습니다. 이제 해 보세요.”
“…어… 어떻게 해야 하죠?”
“아가씨 마음대로 하시면 됩니다.”
분명 아까 세바스탠이 집게와 가위로 유리를 엿가락처럼 자르고 휘고 늘이고 넓히는 것을 보았다. 그가 하는 것만 보고 있을 땐 매우 간단해 보였건만 막상 뜨거운 불덩어리가 제 앞에 놓이자 릴리는 이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 내기가 어려웠다.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집게로 덩어리의 끝을 집었다.
“네. 그렇게 하시면 됩니다.”
세바스탠이 기운을 북돋아 주었다.
“계속하세요.”
집었으니 늘려 보았다. 유리는 정말로 엿가락처럼 늘어났다. 느리지만 부드럽게 늘어지는 느낌이 매우 좋았다. 릴리는 늘어진 유리를 집게에 돌돌 말기 시작했다. 대체 이게 뭘 만드는 건가, 대책 없이 돌돌 말기만 하는 자신이 우스워 릴리는 결국 혼자 웃기 시작했다.
“스탠, 내가 지금 뭘 하는 거죠?”
“글쎄요.”
그는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를 좀 말려 줄래요? 아니면 도와주거나요.”
“아니요, 아가씨 매우 잘하고 계신대요. 이것은 마치….”
흐으음, 하며 제 턱을 만지작거리더니 그가 말을 이었다.
“똥 같네요.”
결국 릴리는 크게 웃음을 터트리고야 말았다. 그녀는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제발 수습 좀 해 줘요!”
“이제 거기서 가위로 자르시면 더 그럴듯하게 완성될 겁니다.”
“난 똥을 만들려던 게 아니었어요!”
“원래 만드시려 했던 것이 아가씨의 첫 유리 공예품이니 딱히 계획에 어긋나 보이지는 않네요.”
“도와줄래요? 이것 좀 어떻게 해 줘요.”
“끊으세요. 누구나 때가 되면 똥은 끊어야죠.”
릴리는 계속해서 웃음을 터트렸다. 엘버그에 온 이래 처음으로 아무 근심 없이 박장대소 중이었다. 세바스탠은 한술 더 떴다.
“제가 아주 잘 어울리는 파리를 한 마리 만들어 드리죠. 섬세한 작품이 될 것 같네요.”
“스탠!”
릴리가 부러 언성을 높였다. 거칠고 삭막하기만 한 대장간에 릴리의 웃음소리가 마치 새의 지저귐같이 예쁘게 울렸다.
카르낙은 막 대장간의 입구에 도착했다. 뜨거운 열기와 사내들의 땀 냄새가 싫어 세일린은 그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릴리가 세바스탠과 정겹게 공예를 하는 모습만 지켜보았다. 그녀가 소리 내어 웃는 것을 보고 있자니 저도 모르게 미소가 번졌다.
세일린은 파니릴리의 행복한 모습을 보는 것이 좋았다. 그녀의 웃음소리는 듣는 사람도 웃게 만드는 마력이 있었다. 지켜보고 있자면 같이 키득거리게 된다. 제 손등으로 입을 가리고 작게 웃다가 세일린은 입구에 서 있는 카르낙을 발견했다.
일순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눈이 마주치자 삽시간에 얼굴이 달아올라 그녀는 얼른 고개를 숙였다. 심장이 두방망이질했다.
카르낙은 세일린의 반응에 미간을 구겼다. 꼭 뭘 훔쳐 먹다 들킨 사람처럼 반응하고 있지 않은가. 대체 제 주인이 뭘 어쩌고 있기에. 그는 지체 않고 대장간 안으로 발을 들였다. 뜨거운 열기와 쇠붙이를 두드리는 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무엇이 그렇게 좋은지 연신 웃음을 터트리며 붙어 있는 두 남녀가 확연히 보였다.
잘생긴 금발 청년이라더니. 얄팍한 리넨 블리오 위로 땀에 젖은 단단한 상체의 골격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릴리보다 최소한 머리통은 하나 더 큰 체구에 시원하게 웃는 입매가 인상적인, 전체적으로 호남형의 사내였다. 이야기하며 릴리를 바라보는 놈의 눈빛이 심상치 않게 느껴지는 것은 단지 본인의 착각인 것일까 아니면 진실인 것일까.
스탠!
하고 릴리가 놈을 부르며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스탠? 놈의 이름은 ‘세바스탠’이다. 대체 본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애칭을 부르는가. 저에게는 애칭은 고사하고 이름조차 제대로 불러 준 적이 없다. 늘 폐하였다. 그놈의 폐하. 개나 소나 다 부르는 폐하.
그러고 보니 릴리는 한 번도 저를 저런 식으로 살갑게 대한 적이 없다. 아주 경계하거나, 아주 냉소적이거나, 아주 예의 바르거나, 그것이 아니라면 낙담하거나 슬픈 낯빛을 하고는 했다. 그런데 저 사내에게는 아무 근심이 없다는 듯 웃어 보인다. 너무나 편안하여 다정하게 보일 지경이었다.
다소 적막했던 캘던성의 내부보다 이곳에 더 잘 어울린다는 것도 부아가 치밀었다. 이런 시끄럽고 뜨겁고 번잡스럽고 사방에 땀내 나는 사내들만 득실거리는 곳이 편해 보인다니! 기분이 나쁘다.
“릴리.”
카르낙이 그녀를 불렀다. 세바스탠과 붙어 숨이 넘어갈 듯 웃던 릴리는 눈물을 닦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더니 크게 놀랐다. 세바스탠과 이야기를 나눌 땐 얼굴에 가득했던 미소가 깨끗하게 지워졌다.
“폐하.”
세바스탠은 재빨리 몸을 숙였다. 소란하던 대장간은 왕의 등장으로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달군 쇠를 두드리는 망치질도 이내 소리가 잦아들었다.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릴리가 어색하게(적어도 카르낙이 보기에는) 미소 지으며 물었다. 어쩐 일? 어쩐 일이냐고?
“어쩐 일이 없으면 오면 안 되는 곳인가?”
“아니요. 언제든 오실 수 있지요.”
다만 왕이 찾아올 일이 그다지 없는 곳이라 생각했다. 그것은 릴리뿐만 아니라 세바스탠 그리고 스코크도 마찬가지라 그는 대화에 끼어들었다.
“릴리 아가씨를 찾으러 오셨군요.”
그러자 릴리가 눈썹을 추켜세우고 눈꺼풀을 깜빡였다. 나를?
“저를요?”
왜?
“무슨 일이십니까? 부르셨다면 분명 뵈러 제가 갔을 텐데요. 그러면 이렇게 오시는 수고까지는….”
“오는 데 얼마나 걸린다고. 수고로울 것도 없지.”
먼 이국의 절벽이나, 사막 한가운데에 있는 것도 아닌데 이 정도의 거리가 뭐가 어때서. 누워서 굴러가라 해도 굴러갈 거리다. 애당초 그게 무엇이 중요한가. 중요한 것은 제가 나타나자마자 찬물을 끼얹은 것 같이 불편해진 분위기였다.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라도 되는가.
“내가 방해가 되었나?”
왕은 세바스탠을 향해 낮게 물었다. 편안한 목소리였으나 듣는 사람에게는 위압감이 드는 어조였다.
“아….”
세바스탠은 열렬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폐하. 폐하의 존안을 뵙는 것만으로도 큰 영광이니 부디 아무 때나 편히 들러 주십시오.”
카르낙의 시선은 릴리가 세바스탠에게 건넨 유리 집게를 향해 있었다. 세바스탠은 그것을 알아채고 막대를 찬물에 집어넣었다. 치이익, 하고 열과 물이 마찰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하얀 연기가 뭉게뭉게 피었다.
열기가 식어 투명해진 유리 덩어리를 릴리에게 건네며 스탠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자. 여기 있습니다, 아가씨. 받으세요.”
그러자 릴리는 손사래를 쳤다. 그러는 중에도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니요. 사양할게요.”
“그럴 수는 없지요, 아가씨. 무려 아가씨의 첫 공예 작품이니 자부심을 가지고….”
“스탠!”
또, 릴리가 또 그를 애칭으로 부르며 즐거워한다. 카르낙의 얼굴이 몹시도 창백해졌다. 그것을 알아차린 것은 늙은이 스코크뿐이었다. 릴리는 스탠과 키득거리느라 왕의 기분 따윈 아랑곳하지 않는 것 같았다.
“버려 줘요. 아니, 그러면 아까우니 다시 녹여서 써 주세요.”
“아가씨의 첫 작품을 감히 그럴 수는 없죠. 다시 녹인다니 안 될 말씀이세요.”
“작품이라고 할 수 없잖아요. 부탁인데 그냥 녹여요.”
“그럴 거면 차라리 저를 주세요. 제가 집안 가보로 소중히….”
“내가 갖지.”
둘의 대화를 더는 못 들어 주겠는지 카르낙이 끼어들었다. 다시 웃음이 뚝 멎고 찬바람이 불었다. 릴리는 하얗게 질려 도리질을 했다.
“안 돼요!”
뭐? 왜? 카르낙은 미간을 구겼다. 왜 안 돼? 저놈은 되는데 난 안 된다고? 그럴 순 없지. 카르낙은 세바스탠에게 손을 내밀었다. 건네주지 않을 수 없다.
“폐하. 제가 좀 더 실력을 쌓은 후에 제대로 정성 들여 만든 것을 드리겠습니다.”
그건 안 된다. 실력을 쌓는다니. 그건 그때까지 계속해서 대장간을 들락거린다는 소리지 않은가. 대장간을 들락거리는 거야 상관없어. 저놈과 시시덕거리지만 않는다면…. 그럼 다른 놈이랑 시시덕거리는 것은 된다는 건가…? 아니. 그것도 기분 나쁘다.
세바스탠이 건넨 것을 카르낙은 두말 않고 제 품에 넣었다. 그것을 보는 릴리의 얼굴이 울상이었다. 거기서 또 울화가 치밀었다. 이곳에 계속 있다간 더 험한 꼴을 보일 것 같아 카르낙은 릴리의 손을 잡아챘다. 이렇게까지 하면 안 되는 거 아닐까, 싶으면서도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아주 강렬하게 들었다.
“나가지.”
릴리는 뭐라 대답도 하기 전에 그의 손에 끌려나갔다. 세바스탠에게는 물론이고 스코크에게도 이렇다 할 인사를 하지 못했다. 미안하여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는 릴리에게 스코크와 세바스탠은 공손히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스코크는 그녀의 모습이 벽을 돌며 사라지자 조용히 입을 열었다.
“스탠.”
“네.”
“릴리 아가씨는 곧 발투만 왕과 혼인을 치르실 분이야.”
세바스탠은 스코크의 투박하고 주름진 옆얼굴을 쳐다보았다. 그걸 누가 모르냐는 듯이. 결혼식이 코앞이라는 것도 알고 그것을 위해 왕관과 반지를 세공했는데 당연히 알고 있다. 스코크도 모르는 것을 알려 주려고 꺼낸 말은 아닐 터였다. 다시 한번 상기시켜 주는 것에는 분명 다른 이유가 있었다.
“너도 사내이니 아름다운 여인에게 끌리는 것은 어쩔 수 없겠지만 선을 넘지 않도록 조심해.”
세바스탠은 무어라 대답하지 못했다. 좋아. 인정한다. 파니릴리 아가씨는 너무 아름답고 상냥하다. 그래서 함께 있으면 기분이 좋고 들뜨고 설레며 무엇이든 기꺼이 해 주고 싶어진다.
그 이상의 욕심은 없다. 헌신하고자 하는 마음만이 있을 뿐 그녀를 어찌해 보겠다는 마음은 없다. 그녀가 웃는 것이 기분이 좋아서, 아무런 선입견이나 차별 없이 저를 대해 주는 것이 기뻐서, 그래서 그러는 것뿐이다. 그것뿐인데 무엇을 어떻게 조심하라는 건가. 저도 모르게 그렇게 되어 버리는데 말이다.
“널 위해 하는 말이야, 스탠.”
스코크는 그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고 뒤를 돌아 걸어갔다. 스탠은 노인의 굽은 등을 쳐다보며 황망히 서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