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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발 아래 은빛 눈-49화 (49/231)

49화

“세상의 모든 여자들이 너와 같을까?”

나는 언제나 그들을 미워했는데. 피부색에 따라 선택적으로 모정을 사용하는 그들의 비열함을 혐오했다. 천박하고 짐승 같다며 저 같은 이를 학대하면서도 밤이면 제 가랑이 사이를 품어 달라고 애원하곤 하는 그들의 난잡함을 경멸했다.

세상엔 그런 여자들만 있는 줄 알았다. 흉측하고 잔인한 마귀들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네가 있을까. 그들의 다른 이면에는 너와 같은 것이 있을까. 그렇다면 나는 그들을 용서할지도 모른다. 네가 아주 조금이라도 있다면, 아주 조금이라도 너와 닮았다면. 그렇다면 나의 증오도 조금은 사그라들리라.

“그럼 모든 남자들은 폐하와 같은가요?”

그녀가 묻는다. 카르낙은 피식 웃었다. 세상 모든 남자와 내가 같냐고? 아니, 다르지. 누구 하나 자신과 같지 않다. 나 같은 이가 하나 더 있다는 상상만 해도 정말 끔찍하다. 나 같은 놈은 나 하나로 족하다.

카르낙은 그녀의 뺨을 붙잡고 몸을 숙여 깨끗한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보드랍고 말캉한 것이 이마에 닿았다 떨어졌다. 릴리의 눈꺼풀은 절로 아래로 향했다. 그는 천천히 그녀의 콧등에 입을 맞추고 그다음엔 그녀의 광대뼈에 입을 맞추었다.

마지막으로 카르낙은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그녀를 자신의 품 안에 가두었다. 가느다란 허리를 꼭 안고 그는 원 없이 릴리의 달콤한 향을 들이마셨다.

릴리는 기꺼이 그의 어깨에 기대며 너른 등을 두 손으로 감싸 안았다. 처음 그가 자신을 끌어안았던 날 이후 이 감촉을 절대로 잊지 않았다. 아늑하고 단단하고 기분 좋은 품을 늘 그렸다. 이토록 다부지고 편안한 몸이 저에게 해가 될 리가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이 안에 있으면 무엇으로부터도 상처 받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러니 위협이 된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틀린 말이었다.

카르낙이 그녀의 허리를 쓰다듬었다. 손 가득 힘이 실려 그가 쓰다듬는 대로 몸이 이리저리 당겨지고 밀렸다. 어쩐지 더 매달려야 할 것 같아 릴리는 그의 목을 더 힘껏 껴안았다. 카르낙이 신음처럼 한숨을 흘렸다.

“이러면 안 돼.”

카르낙은 정신을 차리기 위해 스스로를 나무랐다. 떨어져, 카르낙. 릴리에게서 떨어지라고. 네놈은 점점 더 흥분하고 있다고.

“왜요?”

릴리가 물었다. 그러자 정신이 들었다. 카르낙은 제 목에 휘감긴 그녀의 손을 힘겹게 떼어 냈다.

“혼인 전까지 이러면 안 된댔어.”

“…….”

저와 카르낙이 무엇을 했기에? 그저 좀 더 뜨거운 포옹일 뿐인데. 물론 좀 흥분되기도 하고 좀 더워지긴 했지만. 그래도 포옹 아닌가. 게다가 저와 카르낙은 이제 결혼을 할 사이인데 겨우 포옹조차도 허용되지 않는단 말인가?

“하지만 겨우 두 번째 포옹인데요.”

곧 부부가 될 사이이면서도 결코 살갑지 않던 사이였다. 다정하고도 친밀한 대화를 나눈 적도 없고 평안한 마음으로 산책을 즐긴 적도 없다. 여태 단둘만의 시간을 보낸 적도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릴리는 왜 엘버그에서는 혼인 전에 결혼할 두 남녀가 가까워져서는 안 되는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그라타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곳에서도 남녀가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서로가 결혼 상대로 적합한지 따져 볼 수 있지 않을까? 남은 인생을 죽을 때까지 같이 가야 할 동반자인데 서로 데면데면하게 지내다 결혼을 해야 한다니. 대체 왜? 왜 그래야 하지?

카르낙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은 것이 많다. 그에게 듣고 싶은 이야기도 아주 많다. 그를 이해하고 싶은 것들도 아주 많았다. 그런데 가까워지기는커녕 그는 저를 피하려고만 한다. 결혼을 한 이후에도 이럴까 싶어 걱정이 되었다.

그는 캘던성에 있는 시간보다 성을 비우는 시간이 더 많은 왕이었다. 그가 없는 동안 릴리는 이 요새를 안전하게 지켜야만 한다. 그것이 자신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임을 그녀는 언제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여인이라면 누구나 마땅히 해야 하는 것, 남편을 보필하고 그의 장자를 낳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시라도 빨리 카르낙과 친밀한 사이가 되어야 한다. 그가 캘던에 머무는 때만이라도 릴리는 그와 가까이 붙어 있고 싶었다.

“저는 폐하와 가까이 지내고 싶어요. 가능하다면 매일 곁에 있고 싶기도 합니다. 폐하께서 저를 피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네가 하는 말이 내게 어떻게 들리는지 넌 몰라.”

“…….”

달리 들릴 것이 뭐가 있는가. 아주 단순하고 명료한 말을 했을 뿐이다. 그 안에는 숨겨진 의미도 없고 곱씹어야 할 뜻도 없다.

“릴리, 네가 내게 어떤 마음인지는 나도 잘 알고 있어. 너는 늘 나를 돕고 싶어 하잖아. 내가 원하면 넌 무엇이라도 해 줄 준비가 되어 있겠지. 그게 뭐라도.”

“네. 맞아요, 폐하.”

릴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헌신적으로 가진 것을 모두 내어 준 이후엔…. 그 이후에 너는 그라타로 보내 달라 하겠지. 쓰임을 다 한 이후에 너는 너의 평화를 찾아가려 할 거다. 그러려고 너는 충분히 너를 내어 주려고 하는 것이다. 아쉬울 것 없이, 미련 없이 가진 것을 모두 내어 준 후에 너는 나를 떠날 것이다.

너는 내게 나의 사랑이 필요하다고 하지만…. 그렇지만 릴리,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을 거잖아. 나를 가엽게 여기고, 나를 동정하고, 나를 위하고, 나를 위해 헌신한다 해도 네 마음속에는 내가 아닌 그라타를 품고 살아갈 것이다.

그러면서도 너는 마치 나를 사랑하는 듯 내게 사랑을 달라 호소하고 원하는 건 무엇이든 해 주겠다고 하며 곁에 있고 싶노라 이야기하지. 그러면 나는 가슴이 찌르르 울린다. 그 모든 것이 결국 그라타를 향한 너의 애향가임을 알면서도. 나는 그것을 떨쳐 버릴 수가 없게 된다. 다만 매몰되지 않으려 발버둥을 칠 뿐. 그것이 네 눈에는 너를 피하는 것으로 보이는 거다. 사실은 그게 아닌데.

“하지만 내가 원하는 것을 알면 넌 아마 내게서 도망갈 거야.”

매일 밤 열에 들떠 몸부림치는 것을 너는 모른다. 네 손끝만 닿아도 뜨거워지는 것을 모른다.

“그렇지 않을 거예요.”

아무것도 모른 채 릴리는 부정부터 했다. 그녀는 카르낙이 요구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리라 맹세했다. 물론… 예외 조항도 있긴 하다. 예를 들면….

“까닭 없이 사람을 죽이라는 명령만 아니라면요.”

그것 외에는 무엇이든 가능했다. 전장에 나가 맨몸으로 칼을 휘두르라고 해도 그럴 수 있었다. 삶에 대한 커다란 집착 같은 것은 없으니 생존은 하늘의 뜻에 맡기면 된다. 릴리는 쉽게 운명에 순응하는 편이었다. 그것을 억지로 거스르려 하지 않았다. 이십여 년간 그런 마음으로 살아왔으니 이제 와 바뀔 일도 없으리라.

카르낙은 웃었다.

“왜 그런 재미난 일을 널 시키겠어? 내가 하지.”

“그렇다면 되었어요. 그것만 아니면 뭐라도 좋거든요.”

“아닐걸.”

“맞아요.”

“아닐 거야.”

“맞다니까요.”

카르낙이 손을 올려 그녀의 승모근 근처를 집었다. 갑작스러운 손길에 릴리는 벌어져 있던 입을 헙, 하고 다물었다. 카르낙은 손가락을 조금 더 내려 봉긋한 젖무덤 위를 짚었다.

“내가 여길 만지면 어떻게 될까?”

“…….”

릴리는 제 가슴 위에 올라가 있는 그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새하얀 피부 위에 닿은 그을린 손가락은 마디마디가 굵었다. 짧고 뭉툭하게 깎인 손톱 아래의 살점이 그녀의 피부와 닿아 있었다.

거칠고 단단해 보이는 손은 제 한쪽 가슴을 다 가리고도 남을 정도로 컸다. 숨을 들이마시고 내쉴 때마다 그의 손끝에 피부가 눌렸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그 광경이 외설적이어서 릴리는 숨을 참아 보려 했지만 그럴수록 더 가빠져 왔다. 그의 손끝이 자꾸만 제 피부를 찔렀다. 아니 제 피부가 자꾸만 그의 손을 찔렀다.

잘 모르겠다. 어떻게 될지. 그걸 어떻게 알아. 누구도 그곳에 손을 댄 적이 없는걸. 대답할 거리를 찾아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데 카르낙의 손이 예고도 없이 그녀의 가슴을 쓸었다. 손바닥으로 눌러 왼쪽에서부터 오른쪽까지 지그시.

릴리는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켜며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오소소 몸에 소름이 돋았다. 따끔한 감각이 제 몸을 찌르더니 이내 그곳에서부터 열이 피어올랐다. 충격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한번 생각해 봐, 릴리. 어떻게 될지. 그 이후에 알려 줘.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해 줄 수 있는지.”

“…저는 거역할 수 없을 거예요.”

왕이 무엇을 원하든 거부할 수 없다. 부인은 남편의 요구를 거부할 수 없다. 엘버그에서는 사내의 권한이 여인의 권한에 비할 바 없이 강력하고 그 사내들 중 왕이 된 자의 권력은 그 누구보다 우월하다고 배웠다. 그것을 거역하려면 누구라도 목숨을 내놓아야 했다. 그러니 설령 싫다 하여도 릴리는 카르낙을 거부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아니야. 넌 거부할 수 있어. 네가 유일하게 날 거부할 수 있는 사람일지도 몰라. 엘버그의 왕비는 왕을 거부할 수 없지. 그렇지만 여자로서의 너는 사내인 나를 거부할 수 있어. 나를 두려워하면서까지 인내할 필요는 없어. 나는 왕이 아닌 한 사내로서 너를 강제하지 않을 거야.”

릴리는 카르낙이 성으로 돌아온 후 가장 먼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우리 사이에 아이는 없을 거야. 왜냐하면 우린 왕과 왕비일 뿐 결코 부부가 되진 않을 테니까.”

분명 그는 그렇게 말했다. 강제하지 않겠다는 것은 부부가 되는 것을 강요하지 않겠다는 뜻일까. 그때는 자신도 카르낙도 서로에게 냉소적이었다. 그때도 릴리는 그를 위해 뭐든지 하겠다고 말하곤 했지만 그것은 자기 암시에 가까웠다.

자신이 그 말처럼 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를 더 많이 알고 싶은 것은 결국 그를 위해 기꺼이 헌신할 수 있게 되길 바라기 때문이다. 그를 두려워하고 싶지 않다.

그를 거부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니, 그가 두렵고 거북한 존재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자신이 기꺼이 헌신할 수 있는 왕이자 사내이길 바라고 있었다. 참으로 이기적인 바람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러면서도 릴리는 카르낙이 그런 사람이 되어 주길 원했다.

그렇다면, 그런 사람이 되어 준다면 릴리는 자신의 목숨도 내어 줄 수 있었다. 육신뿐 아니라 마음과 영혼도 내어 줄 수 있었다.

그러니 거부할 수 없는 사내가 되어 주세요. 기꺼이 육신과 정신을 바칠 수 있는 왕이 되어 주세요. 그럴 수 없다면 차라리 강제해 주십시오. 저를 쓰고 차라리 버려 주세요. 단 한 자락의 희망도 갖지 못하도록 비정하게 대해 주십시오.

“너의 삶을 모두 빼앗진 않겠어. 육신도, 정신도 모두 빼앗긴 삶의 고통을 난 너무 잘 알고 있고 네가 그런 삶을 살기를 바라지 않아. 왜냐하면 넌 엘버그 땅에서 유일하게 아무런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이니까.”

“…….”

“네가 알기어스의 혈육이라고 해도 너는 내가 복수해야 할 대상이 아니야, 릴리. 오히려 동맹을 요청해야 하는 아군이지. 그러니까 넌 생각해야 해. 내게 어디까지 해 줄 수 있을지 말이야.”

“…….”

“우리가 부부가 된 첫날 밤이 되면 나는 네게 다시 물을 거야. 그때 내게 대답해 줘. 교묘하고도 너에게 실이 되지 않을 해답이어야 해. 릴리, 그러니 부디 잘 생각하길 바라.”

카르낙은 릴리의 손을 잡아 제 입가에 가져갔다. 엘버그의 사내들은 호감을 가진 여자들에게 이런 식으로 손등에 입을 맞췄다. 경배와 사랑과 존중의 의미를 담고 있다나 뭐라나. 감히 그들과 닿아서도 안 되는 투로로서는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던 행위. 카르낙은 어색하게 그러나 진솔하게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추고 그녀를 놓아주었다.

“릴리.”

그러고는 그녀의 이름을 한 번 부르는 것으로 작별 인사를 고했다. 릴리는 그저 멍하게 그의 뒷모습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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