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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발 아래 은빛 눈-23화 (23/231)

23화

그러나 그는 자신의 무지함을 감추기 위해 허영이나 가식으로 덮으려 하지는 않았다. 적어도 그는 이런 때에는 진솔하고 담백하게 반응하려 했다. 오히려 그편이 상대방을 스스로 겸손하도록 만든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사막에서 자랐어. 그곳은 사시사철 뜨겁고 메마른 땅이 끝도 없이 펼쳐진 곳이라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기가 어려워. 난 나무고 나발이고 하나도 몰라.”

아, 그렇지. 그는 분명 사막에서 살았다고 했지. 세상에. 전혀 생각지 못했다. 언제나 풀과 나무와 꽃들에 둘러싸여 지냈다. 어둠이 내리면 열기가 식고, 새벽이 오면 이슬이 맺히고 다시 해가 꼭대기에 떠오르면 따듯한 볕을 받으며 기지개를 켰다.

그러다 먹구름이 가득 끼고 한바탕 비가 쏟아지고 나면 대지의 모든 더러움이 씻겨졌다. 하늘은 더없이 청량하고 공기는 상쾌하여 마치 새로 태어난 듯 세상은 아름다웠더랬다. 그러나 분명 그것은 카르낙이 느껴 보지 못한 사치스러운 삶.

“죄송합니다, 폐하.”

자신의 아둔함이 부끄러워 릴리는 고개를 숙이며 재빨리 사과했다.

“제가 무례했습니다.”

“아까 하던 말이나 계속해 봐. 그놈의 젖은 냄새인가 뭔가가 왜 ‘굶어 죽는다’까지 간 건지.”

“땅에서 식물이 자라려면 비옥한 흙과 볕 그리고 물이 필요한데 너무 과해도 안 되고 너무 부족해도 안 되거든요. 비옥한 토양은 그를 튼튼하게 해 주고, 따듯한 볕은 과일에 맛을 가미하고 적절한 비와 물은 식물을 자라게 해 주니까요. 지난해 수확기에는 비가 너무 많이 와 작물이 썩었다고 들었어요. 그 때문에 에이가가 왕실 저장고를 열어 곡식들 일부를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요. 그리고 올해는 지난주의 가랑비를 제외하면 한 번도 비가 내리지 않았어요. 지금이 가장 많이 내려야 할 때인데.”

그제야 카르낙은 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래. 어쩐지 자꾸만 창문에 먼지가 끼고는 했다. 늘 시녀들이 쓸고 닦아 내는데도 다음 날이면 어김없이 창문이 뿌옇게 변했다. 비가 오지 않았던 탓일까.

카르낙은 황량했던 저의 고향을 떠올렸다. 먼지인지 넝쿨 덩어리인지, 아니면 어디선가 날아온 마른 나무줄기인지 모를 것들만 굴러다니던 땅. 사막에서도 살아남는 작은 벌레와 몇몇 날짐승들. 거기에 하게너 성에서 던져 주는 병든 동물의 사체나 먹다 버린 쓰레기로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는 했다.

꿈에서 본 이스바의 얼굴이 떠올랐다. 온몸이 갈라졌어도 너의 배 속은 텅 비어 있었지. 그 안에는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았다. 제아무리 끔찍하고 잔인한 장면을 많이 보았어도 그와 같은 광경은 그 전에도 그 이후로도 본 적이 없다. 아마 죽을 때까지 없겠지.

릴리는 침엽수림을 올려다보는 카르낙에게 물었다.

“폐하께서는 비 냄새를 맡아 본 적이 없으신지요?”

그는 허리를 굽혀 손에 닿는 작은 풀잎 하나를 뜯었다. 힘주어 비비니 물기가 없는 것이 형체도 없이 바스러져 날아갔다. 카르낙이 손을 털며 대답했다.

“있어. 피에 절은 비 냄새는 맡아 본 적이 있지.”

제 발을 잡아끄는 끈적한 흙구덩이, 바닥을 치고 튀어 오르는 흙탕물까지 모두 핏빛으로 물들어 있곤 했다. 그러고 보니 어느 때고 그랬다. 늘 그의 곁에서는 피 냄새가 났다. 사막을 떠난 이후부터 늘 카르낙은 피 냄새만 맡으며 살아왔다. 자신이 기꺼이 선택하여 살아온 길이건만 마음 한편이 씁쓸해졌다. 어쩔 수 없음을 알면서도.

“부르테는 비가 오기 전이면 늘 만물의 향이 짙어진다고 했어요. 물이 그런 성질을 지녔다고요. 그래서 그녀는 숲이 젖은 내음으로 비가 내릴지, 내리지 않을지 알아맞히고는 했지요. 처음엔 어리둥절했지만 어느 순간 저도 맡게 되더라고요. 알싸한 풀잎 내음이나 나무의 송진 냄새 같은 거요.”

“그래서 그 냄새를 맡으러 나온 건가?”

“네.”

파니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성안은 돌벽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좀처럼 풀 내음을 맡기가 힘드니까요.”

“반드시 이 시간이어야 해?”

반드시 이렇게 어둡고 모두가 잠든 순간이어야만 하는 걸까. 밝고 모두가 분주할 때라면 좀 더 안전하고 좋을 텐데 말이다.

“네. 이 시간대가 가장 좋아요. 가장 진해지는 때니까요.”

“…그래서 이 시간까지 자지도 않고 기다렸다가 나왔다?”

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카르낙의 말투가 다소 날카로워졌음은 눈치챘지만 변명해야 한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는 물었다.

“그 계집은 알아? 네 전담 시녀 말이야. 제 주인이 매일 밤 몰래 침실에서 빠져나와 정원을 돌아다닌다는 것?”

“곤히 잠든 사람을 깨울 순 없잖아요. 도움이 필요한 일도 아닌데요.”

“여기선 그러면 안 돼.”

그는 엄하고 진지한 얼굴을 했다.

“그러다 네가 다치거나 사고라도 당하면 그 계집은 사지가 잘릴걸?”

머릿속에 절로 그려지는 잔인하고 비정한 그림에 릴리는 얼굴을 찌푸렸다.

“어째서요?”

왜 그래야만 하는가. 그녀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다.

“몰라. 여기선 그래. 누군가 잘못을 저지르면 그의 가장 아래에 있는 사람부터 처벌을 받거든. 그래서 신분이 높은 사람일수록 목숨이 여러 개지. 밟고 올라가야 될 머릿수가 많아지니까.”

릴리는 입을 다물고 무언가를 생각했다. 그러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흔들고 제 팔뚝을 감싸 잡으며 말했다.

“여긴… 가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아주 많아요. 내가 태어나 10년을 지낸 곳인데도요. 마치 처음 온 곳처럼 낯설어요.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이요.”

릴리의 고백에 카르낙은 피식 웃었다.

“내게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지금은 그걸 즐기고 있지.”

그는 제 관자놀이를 툭툭 쳤다. 손가락이 마치 그의 관자놀이를 꿰뚫는 화살촉처럼 보였다.

“여기까지 오려고 애쓰는 치들의 모습이 퍽 재밌거든.”

“폐하께서는 늘 이 시간에 깨어 계시나요?”

릴리의 물음이 카르낙의 미소를 걷어 갔다. 즐거운 공상에서 쓰디쓴 현실로 돌아오는 것은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다.

“어쩌다 한 번씩.”

사실은 거의 모든 시간 잠들지 못해 뒤척인다고. 그 때문에 늘 머리가 아프고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다고 말할 용기가 없어 그는 대충 둘러댔다. 누구도 몰랐으면 한다. 자신의 괴로움이나 어려움 같은 것들을. 그래야 더 많은 이들이 비통해하겠지. 그래야 더 처절한 피눈물을 흘릴 테지.

“피로가 너무 과하셔서 그럴 수도 있어요.”

릴리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쥐고 또박또박 말을 이어 나갔다. 카르낙의 손에 들린 등불이 그녀에게서 어둠을 물렸다. 회색 눈동자가 더욱 영롱하게 빛날 수 있도록.

“따듯한 수건으로 손과 발을 마사지해 주면 몸의 긴장이 풀리실 거예요. 달갱이풀로 만든 차를 주무시기 전에 마시는 것도 도움이 될 거예요.”

“꼭 의사처럼 말을 하네. 그 양반도 그랬거든. 자기 전에 뭘 달여 먹어라, 뭘 먹지 마라, 뭘 하지 마라. 온통 하지 말라는 잔소리뿐이야. 하지 말라는 걸 하고 싶어서 왕이 됐는데.”

릴리는 카르낙의 불평에 소리 죽여 웃었다.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다지 카르낙이 잔인한 폭군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감히 잊어선 안 되지만 왕이라는 사실도 잠시 까먹었다. 뭐랄까. 철없고 불평 많은 어린아이처럼 보였다. 매사에 시큰둥하고 뾰로통한 꼬마처럼.

그러나 릴리 역시 모르는 바 아니다. 말은 쉬워도 그가 여기까지 올라오는 데 들인 고통과 집념을. 그럼에도 카르낙은 누구에게도 그 고통과 울분을 들키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의 증오를 자양분으로 삼아 자라나는 가시가 많은 꽃이었다.

그런 그에겐 동질감도 동정심으로 보일 터였다. 릴리는 그런 그의 견고한 벽을 무너뜨리고 싶지 않았다.

다만 돕고 싶었다. 또 그에 대해 알고 싶었다. 잔인하고 비천하기 이를 데 없다는 왕 카르낙 발투만은 원래 어떤 사내였는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지금 그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그리하여 그런 것들을 채워 주고 나면, 그럼 그는 저를 딱하고 애틋하게 여겨 언젠가 그녀가 소망하는 곳으로 날아가도록 허락해 줄 수 있을지도.

릴리는 맑고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비가 빨리 왔으면 좋겠어요.”

카르낙도 그녀를 따라 하늘로 시선을 옮겼다.

“대지가 풍요로워야 모든 생명이 평화롭거든요.”

카르낙은 시선을 내려 릴리를 보았다. 달빛에 드러난 턱선이 가녀리고 유려하였다. 새하얀 피부와 단정한 목덜미는 도자기처럼 깨끗했다. 카르낙은 종종 그녀가 내뱉는 말들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꼭 세상 다 산 늙은이들이나 할 법한 이야기를 한다. 심지어 로로나 에이가도 하지 않는 말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뱉어 냈다. 대지가 풍요롭다느니. 생명이 평화롭다느니. 나지도 않는 비 내음을 맡겠다고 이 밤중에 겁도 없이 홀로 밖을 나다니는 것도 그랬다.

그러면서 손에 잡히지도 않는 허깨비 같은 것들을 걱정한다. 그것도 제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것들만 골라서 말이다.

“그때까지 저는 매일 밤 여기로 나올 거예요.”

“…….”

“그러니 혹 잠이 오지 않으신다면 가끔 산책하러 나오세요. 혼자 있는 것보다야 둘이 같이 있는 것이 덜 심심하니까요.”

“그럼 시녀를 깨우면 되잖아.”

“세일린은 곤히 잠들어 있으니 심심할 리가 없어요.”

카르낙은 멍했다. 순진한 눈을 깜빡이는 무구함에 더욱더 그랬다. 그러니까 저나 나나 심심해 보이니 같이 놀자 이건가? 나랑? 나 카르낙 발투만이랑? 이상해. 정말 이상한 여자다. 빈말이 아니라 정말 저를 무서워하지 않는다.

겁이 나서 부러 더 태연한 척하는 것이 아니다. 정말로 겁나지 않아서 겁 없이 행동하는 것이다. 심지어 로로나 에이가가 가끔 내보이는 두려움이나 불안함조차 보이지 않는다. 저를 잘 몰라서일까. 아직 제대로 겪어 보지 않아서일까. 좀 더 겁을 주었어야 했을까. 그래서 쳐다만 봐도 이가 딱딱 부딪히도록 해 줬어야 했나.

“난 심심하지 않아. 늘 바빠.”

그의 말에 릴리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오늘도 마찬가지야. 잠시 생각할 게 많아 머리를 식히려는데 들고양이처럼 혼자 움직이기에 수상해서 따라온 것뿐이야.”

“아… 네….”

그렇다고 하기엔 너무 눈이 초롱초롱하기에. 수상한 사람을 쫓는 것 치고는 ‘야옹’ 하던 목소리가 너무 신이 나 보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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