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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발 아래 은빛 눈-24화 (24/231)

24화

“그러셨군요. 제가 폐하께 심려를 끼쳤네요.”

“날 얕잡아 보지 마. 마음만 먹으면 결혼도 전에 널 참수시킬 수도 있어. 어차피 알기어스의 혈육은 모두 죽였으니 너 하나 더 죽인다고 크게 달라질 것도 없어.”

공손하고도 부드럽게 대답했는데 어쩐 일인지 그게 카르낙의 화를 돋워 버렸다. 너무나 급작스러워 마른날 벼락이라도 맞은 기분이었다.

“죄송합니다, 폐하. 제가 무례하게 굴어 폐하의 심기를 어지럽혔습니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그래서 더 공손히, 더 고개를 숙여 더욱더 간절하게 사과를 하였건만 카르낙의 숨소리는 더 거칠어졌다. 진심을 담아 사과했건만 무엇이 그토록 화가 나는 것일까. 릴리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땅에 고개를 처박듯 숙이고 그의 불편함이 가시기만을 기다렸다.

“네 걱정 같은 건 필요 없어. 가뭄이야 좀 들면 어때. 그래서 다 굶어 뒈지면 나야 좋지. 일일이 내 손으로 죽이는 수고는 덜 테니까. 그 시간에 나는 이 안에서 기름진 고기나 뜯고 술이나 넘치게 마시면 되거든.”

“…….”

“그러니 밤에 함부로 나다니지 마. 앞으로 이 시간에 방 밖으로 네 그림자라도 보이면 그토록 애지중지하는 네 시종은 그날로 다신 볼 수 없을 테니.”

그렇게 말하며 카르낙이 공손히 포개 접은 릴리의 손 하나를 끌어당겼다. 릴리는 갑작스러운 손길에 덜컥 놀라 힉, 하고 숨을 들이켰으나 이내 비명을 삼켰다. 카르낙은 퉁명스레 그녀의 손에 등불을 쥐여 주고 냉정하게 몸을 돌렸다.

릴리는 조심스레 눈을 들었고 그때에야 비로소 카르낙이 허리에 꽂아 둔 단도를 발견했다. 그것을 보고 있자니 갑작스레 오한이 들어 몸이 떨렸다.

그의 속내를 어찌 알 수 있으랴. 대충 챙겨 입은 옷가지 사이에 빼놓지 않고 단도를 챙겼을 그의 심중은 무엇이었으며 그 칼끝이 어디로 향해 있었는지 말이다.

왜 하필 저 남자일까. 왜 하필 지금껏 만나 온 그 누구보다도 비틀리고 어려운 자를 도와야 하는 걸까. 그것도 제 목숨을 내놓고서 말이다. 릴리는 긴 한숨을 뱉어 내고 어두운 하늘 위에 떠 있는 달을 보며 중얼거렸다.

“부디 저를 도와주세요. 아마네스.”

내가 진정으로 당신의 아이라면요.

***

에이가는 손과 얼굴을 깨끗이 씻으며 하루를 시작했다. 시녀의 도움을 받아 코타 위에 서코트를 입고 수수한 장식의 허리띠를 둘렀다.

늘 머리 위로 깨끗하고 새하얀 베일을 쓰는 것으로 몸단장을 끝내는 에이가는 아침 일정을 시작하기 전에 반드시 제 손으로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일을 하기 위해 서둘러 제 방을 빠져나갔다. 시녀가 익숙하게 물그릇과 여러 가지 미용품이 든 상자를 들고 그녀의 뒤를 따랐다.

한참을 걸어 끝도 없는 계단을 올라가야만 하는 서쪽 탑에 비해 가깝고도 안전하여 에이가는 숨을 고르지 않고도 릴리의 침실 문을 활짝 열며 미소 지을 수 있었다.

에이가가 덧창을 열어젖히자 유리를 투과한 아침 햇볕이 하염없이 쏟아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베개에 머리를 파묻고 있던 파니릴리의 얼굴을 비추기 시작했다. 대번에 릴리는 인상을 찌푸렸다.

“릴리 아가씨.”

에이가가 침대 끝에 앉아 부드럽게 릴리를 깨울 동안 세일린을 비롯한 시녀들은 분주히 덧창을 열고 아침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물그릇과 깨끗한 의복이 테이블 위에 올려지고 향긋한 꽃잎을 우려낸 차와 허기를 달래 줄 바게트와 볶은 콩 요리가 차례대로 준비되었다.

음식 냄새에 정신을 차리고 손으로 눈가를 비비는데 에이가가 말을 붙였다.

“볕이 아주 좋답니다.”

과연 그랬다. 아침인데도 볕은 정오처럼 뜨거웠다. 릴리가 몸을 일으키자 에이가는 찻잔부터 건넸다.

“텔르타에서 직접 공수해 온 재스민차랍니다. 피부에 아주 좋지요.”

“고마워요.”

릴리는 적당한 온도로 데워진 찻잔을 받아 들고 텁텁한 입 안에 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차분하고 쌉싸름한 향이 그 안에 맴돌았다.

“오늘은 할 일이 아주 많아요. 오늘부터는 혼인 의례와 춤에 대해서 배울 거고 또 오후에는 화가가 와서 아가씨의 초상화를 위한 밑그림을 그릴 거예요. 성혼식 때에 맞춰서 완성해야 하거든요.”

“초상화요?”

릴리가 재스민차를 삼키고 침대에서 일어서며 물었다. 에이가는 곧바로 그녀의 몸에 화려한 자수가 장식된 실크 가운을 둘러 주었다.

“네. 엘버그의 전통이죠. 아름답게 그려서 캘던성벽에 걸어 둘 거예요. 엘버그의 모든 사람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캘던의 백성들은 엘버그 왕비의 존안을 알아 두어야 하니까요. 게다가 지금 같은 때에 아가씨의 초상화는 왕권 안정에 아주 큰 도움이 될 거예요.”

에이가는 웃으며 릴리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윤기가 흐르는 은빛 머리는 릴리의 유려한 턱선을 보드랍게 감싸며 딱 그녀의 턱 끝에 맞추어 떨어졌다. 초상화에는 머리를 아주 길게 그려 달라고 부탁하리라. 에이가는 저 혼자 그렇게 결정해 두고는 릴리가 얼굴을 씻고 단장하는 것을 도왔다.

“날이 너무 더워요.”

미지근한 물에 세수를 하고 얇은 슈미즈 위에 블리오를 덧입히자 릴리는 투정을 부리듯 말했다.

“과연 말씀하신 대로요.”

에이가는 릴리의 허리끈을 조이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이럴 땐 차라리 머리를 몽땅 뽑아서 대머리라도 되고 싶죠. 하지만 어쩌겠어요. 그럴 수 없는 세상이니 그저 견뎌야죠. 다 됐네요. 앉아 보세요. 아가씨.”

에이가는 릴리의 어깨를 톡톡 두드려 앉으라는 신호를 주었다. 릴리는 옆으로 몇 걸음 옮겨 의자에 착석했다. 향유를 손에 덜어 릴리의 머리끝에서부터 꼼꼼히 바르고 에이가는 곧바로 빗질을 시작했다. 에이가가 가장 좋아하고 고대하며 또한 행복해하는 시간이 드디어 도래한 것이다.

세일린이 바게트에 버터와 볶은 콩을 올려 릴리에게 건넸다.

“고마워요, 세일린. 저라면 열병으로 쓰러지느니 차라리 대머리가 되겠어요.”

에이가는 소리 내어 웃었다.

“무슨 그런 무서운 말씀을 하세요. 애지중지 기른 머리카락을 자르시려거든 차라리 제 목을 먼저 자르세요.”

“진심이에요. 다른 옷이 필요해요. 이 날씨에 이런 옷을 입고 사는 건 재앙이에요. 특히 에이가 당신 같은 노인에겐 더 위험하다고요.”

“볕이 들지 않는 음지는 한낮에도 꽤 지낼 만해요. 저 같은 늙은이는 추위를 많이 타니 오히려 이런 날씨가 지내기엔 더 편하답니다.”

옹색한 변명으로 들리는 줄 알면서도 에이가는 그렇게 대답했다. 엊그저께 주방 보조 시녀가 열병으로 쓰러졌단 이야기를 보고받기는 했다. 모두가 땀에 절어 불을 피우는 것만으로도 곤욕이라며, 가능하면 가열 조리하지 않는 음식을 준비하면 안 되겠느냐는 주방장의 읍소도 받은 적이 있다.

병사들은 웬만해서는 막사 밖으로 나오려 하지 않았다. 견디다 못한 몇몇은 한밤중에 알몸으로 해자에 뛰어들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마지막으로 비가 온 게 언제였던가. 이렇게 오랫동안 가물기는 처음이었다. 문득 세금을 걷을 수 있을지 걱정되었다. 작물이 말라 죽으면 그로 인해 거두어들일 세금 또한 마르리라. 아직 캘던성의 보수도 다 마치지 못했는데.

“부탁인데 스타킹만이라도 좀 제외하면 안 되나요?”

울적한 릴리의 목소리에 에이가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다시금 머리카락을 빗어 내리는 손을 움직였다.

“그라타에서 가져온 샌들은 버렸어요?”

“버린 지 한참이죠. 아가씨가 캘던에 도착하던 그 날 버렸는걸요. 캘던에 온 지 1년도 더 되셨잖아요. 이제 이곳의 날씨에 적응하실 때도 되었는데요.”

릴리는 한숨을 내쉬고 단호하게 반박했다.

“만일 내가 캘던의 날씨에 적응하지 못했다면 지금쯤 모피 털을 입고 있어야죠. 그라타는 이곳보다 훨씬 덥고 습한 곳이니까요. 캘던은 그곳보다는 훨씬 추운 곳이잖아요. 하지만 지금 난 모피는커녕 지금은 입은 옷도 벗어 던지고 싶은데요. 이 정도라면 에이가, 열로부터 발바닥을 보호하기 위해 샌들을 신어야 해요. 추위로부터 발을 보온하기 위해 구두를 신는 대신에요.”

정말로 그런가? 에이가는 생각에 잠겨 규칙적으로 릴리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리기만 했다. 릴리의 말에 대꾸해야 하는 것도 잊고 말았다. 별것 아니라고 말할수록 마음 한구석이 찜찜하여 조금이라도 대책을 세워 놓아야만 할 것 같았다.

“얼음이 필요해요.”

왕의 집무실에 오자마자 에이가는 대뜸 그 말부터 꺼냈다. 막 카르낙이 컵에서 얼음 한 조각을 꺼내 제 입에 밀어 넣고 있을 때였다. 카르낙은 한쪽 볼에 얼음을 물고 에이가를 향해 잔을 밀어 주었다.

“자. 아직 하나밖에 안 먹었으니 진정하라고.”

로로는 에이가를 제정신이냐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취했거나 어디가 아파 정신이 혼미할 수도 있다. 정상적인 에이가라면 감히 왕의 사치품을 탐내지 않는다. 그것도 저렇게 앞뒤 없이 공격적으로.

“그 이야기가 아니에요, 폐하. 북쪽에서 얼음을 더 가져와야 해요. 하루하루 땅이 가물고 있어요. 폐하, 그거 못 느끼세요?”

“아아.”

카르낙이 다시 얼음이 담긴 잔을 갈무리하며 아는 체했다.

“알아. 어젯밤에 들었지. 파니릴리한테.”

“아가씨한테요?”

에이가가 눈을 가늘게 떴다. 파니릴리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그녀의 정신은 온통 그곳으로 쏠렸다.

“응.”

“…밤에?”

“정확히 새벽인가?”

말하며 로로를 쳐다보았지만 그는 알 턱이 없어 어깨만 으쓱해 보였다. 에이가의 얼굴이 더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밤인지 새벽인지 모를 시간에 릴리 아가씨를 만나셨다고요? 폐하와 아가씨 단 두 분이서요?”

카르낙은 제 왼쪽 뺨을 긁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뭘 잘못했나 싶었다. 에이가가 파니릴리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사람인 건 알고 있지만 고작 대화 몇 마디 나누었다고 성질을 내는 건 아니리라. 그러나 그것을 비웃기라도 하듯 에이가는 속사포처럼 쏘아붙였다.

“아무리 부부가 될 사이라지만 엄연히 지금은 남남인데도 한밤중에 아가씨를 불러냈단 말씀이신가요? 그 야심한 시각에 설마 샤프롱도 없이 단둘이었단 말씀은 물론 아니시겠죠? 설마 폐하께서 그런 일을 하지 않으셨길 빕니다! 모쪼록 국왕이시라면 백성에게 모범을 보여야 하는 법! 설마하니 혼전에 규중처자를 오밤중에 불러내어 은밀한 만남을 가져도 된다는 풍토를 조장하진 않으실 테니까요!”

“…빌어먹을. 에이가. 귀청 떨어지겠어.”

카르낙이 귓구멍을 쑤시며 투덜대자 에이가는 더욱 격노하여 언성을 높였다.

“제가 릴리 아가씨를 부디 귀하게 여겨 달라고 읍소 드렸던 건 말 그대로 귀하게 아껴 달라는 뜻이었어요! 설마 곡해하셔서 일을 저지르진 않았을 거라 저는 믿어요! 게다가 저는 폐하를 믿고 있어요! 폐하께선 여자에게 관심이 한 톨도 없으시잖아요! 릴리 아가씨에 대해서도 이 늙은이가 밤낮 잠을 설치며 걱정할 정도로 시큰둥하셨잖습니까!”

“의견을 좀 통일해 주겠어? 그래서 그 귀한 아가씨를 아끼란 말이야 아니면 시큰둥하게 대하란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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