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카르낙은 죽은 습지를 빙 돌아 걷고 있었다. 군데군데 화석처럼 버석하게 마른 죽은 나무는 마치 땅 위에 꽂힌 바늘 같아서 더 기묘한 광경을 자아냈다. 막 검은 독수리와 제 팔뚝만 한 갈색 뱀을 한 마리씩 사냥해 오는 길이었다. 둘 다 육질이 질기고 거칠어 씹어 넘기기 힘들지만 사막에서는 좀처럼 구하기 힘든 귀한 식재료였다.
그는 아침나절부터 먹을거리를 찾아 오렌지 연못 주위를 돌았다. 오늘도 먹을 것을 찾지 못한다면 굶주림에 지친 노인들이 하나둘 죽어 갈 터였다. 그도 사흘째 소금과 물로만 버텼다. 노인들이 기력을 되찾는 대로 서둘러 거주지를 옮겨야 할 것 같았다. 더 자원이 풍부하고 오염되지 않은 습지대가 있는 곳으로 말이다.
“칼! 칼!”
누군가가 마른 언덕 위에서 손을 흔들며 저를 불렀다. 꼭 굴러다니는 회전초처럼 부스스하고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가진 실루엣. 눈을 가늘게 뜨고 형체를 살필 필요도 없는 이스바였다. 멀리서 세차게 손을 흔드는 모습에 처음엔 픽 웃음이 났다.
갓난아기일 때부터 함께 자라 왔으니 나이대는 비슷할 거다. 둘은 로로의 보살핌 아래에서 형제처럼 자랐다.
카르낙이 투로족의 청년 중 유독 크고 건장하기도 했지만, 늘 붙어 다니는 이스바가 그에 비해 유독 마르고 작아서 언제나 이스바가 카르낙의 보호 아래 있는 것 같았다. 실상은 이스바가 덩치 크고 산만한 카르낙을 언제나 보살피는 처지임에도 말이다.
이스바가 미끄러지듯 모래 언덕을 타고 내려왔다. 카르낙은 제 손에 들린 방울뱀과 독수리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독수리와 뱀을 잡았어. 이 정도면 허기를 달랠 정도는….”
그러나 카르낙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이스바가 헐떡이며 그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새파랗게 질린 낯빛이 심상치가 않았다. 덜컥 겁이 나며 목이 턱 막혔다. 카르낙은 간신히 소리를 냈다
“무슨….”
“큰일 났어, 칼! 죽었어! 하게너가… 하게너가!”
카르낙은 계속해서 흔들렸다. 이스바의 커다란 눈동자에서 꼭 그것만 한 눈물방울이 계속해서 떨어졌다.
“하게너가 죽였어. 하게너가!”
뭐? 누구를? 무슨 소리야? 하게너가 누구를 죽였다는 거야?
“칼….”
이스바는 말을 잇지 못하고 그의 가슴팍에 쓰러져 엉엉 울었다.
“이스바, 무슨 말이야. 누가….”
그가 어깨를 떨며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유리알같이 맑던 눈물이 새빨갛게 변했다. 흰자위가 모두 붉게 물들었다.
“칼….”
순간 까무룩 사위가 어두워졌다. 끝도 없는 낭떠러지 아래로 추락하는 아찔함.
“그가 이스바를 죽였어.”
이스바… 이스바. 카르낙은 그의 이름을 뻐끔거렸다. 이스바의 몸에 곧 날카로운 실선들이 생겨났다. 아니야. 이스바. 아니야.
“칼… 살려 줘. 부탁이야.”
이스바.
“칼….”
이스바의 몸이 균열했다. 수천 갈래로 나뉘어 조각나기 시작했다.
이스바. 이스바!
히익! 하는 소리를 내며 카르낙은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헉, 헉….”
긴 악몽이었다. 그는 헐떡대며 제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아 내었다. 마치 도망자의 것처럼 심장 박동이 널을 뛰었다. 숨통이 조이는 것 같아 그는 서둘러 커튼을 걷어 내고 침실의 창문을 모조리 열어젖혔다.
방 안으로 버석한 모래와 먼지가 날아들었으나 그는 괘념치 않았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으로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 나가더니 난간을 붙잡고 절박하게 호흡을 골랐다. 고통스러움에 저도 모르게 흐른 침을 손등으로 문질러 닦아 내고 가슴 언저리를 움켜쥔 채 심박수가 느려지기만을 기다렸다.
빌어먹을.
그는 짜증이 나 욕을 지껄이고 몇 번이나 연거푸 숨을 들이켰다. 차츰 둔통이 가라앉았다. 혈관을 터트릴 듯한 박동도 서서히 가라앉았다. 그제야 살 것 같았다. 카르낙은 비로소 감았던 눈을 들어 달빛 아래 그림자를 드리운 밤의 풍경을 보았다.
익숙하지 않은 풍경. 언제가 되어도 익숙해지지 않을 풍경.
카르낙은 저의 고향을 떠올렸다. 사시사철이 뜨겁고 영영 안식이 드리워지지 않을 것 같은 사막의 밤을. 밤이 되면 더욱더 발광하는 그 불꽃들은 결코 꺼지지 않을 듯 춤을 추며 별빛과 섞였다.
어느 곳이 땅이고 하늘인지 어느 것이 꿈이고 현실인지 분간해 낼 수 없었던 수많은 밤들. 그 아래에서 카르낙은 수많은 고통과 절망의 시간을 흘려보내려 애썼다. 오로지 그 아름다운 순간을, 그 천국과도 같은 광경만을 가슴에 담으려 무던히 노력했다.
황홀할수록 왜 눈앞은 더욱 흐렸을까. 환희와 절망이 어우러진 그 벅찬 감각을 그는 아직도 무어라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이곳은 어떤가. 성벽을 밝히는 횃불과 망루를 지키는 병사들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달빛 아래에 아무 걱정 없이 안식을 취하고 있다.
마땅히 자신이 쟁취한 것을 누려야 하건만 카르낙은 그러지 못했다. 달의 아래에서도 태양의 아래에서와 마찬가지였다. 이 자리를 차지하면, 그래서 그 잘난 왕좌에 엉덩이만 비비고 앉아 있으면 모든 것이 끝날 것이라 생각했다.
사치스러운 옷을 입고 풍족하게 음식을 먹고 호화로운 침대에서 두 발 뻗고 자며 제 발아래의 모두를 비웃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원하던 것은 모두 이루었다. 캘던성을 차지했고 더는 누구도 그를 함부로 대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도 그는 여전히 쉴 수가 없었다. 푹 잠을 잘 수도 없었다.
무엇이 부족하기에. 더 채워야 할 것이 무엇이기에. 언제가 되어야 비로소 이 고통을 끝낼 수 있을까. 무엇을 얻으면 이 불안함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저에게 반목하는 이들을 모두 죽여야, 모두를 다 죽이고 나면 그제야 평안을 얻을까.
카르낙은 제 이마를 쓸며 고개를 떨궜다. 크게 한숨을 내쉬고 마음을 다스리는데 반딧불 같은 것이 몹시도 느리게 움직이며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카르낙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 형체를 살폈다. 빛나는 것은 작은 등잔이요, 그것을 든 희미한 형태는 분명 여인의 것이었다.
카르낙은 그 실루엣을 곧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그래, 알기어스 왕가의 사람들의 머리카락은 달빛 아래에서도 빛이 난다지. 신이 자신의 아이를 언제고 찾아볼 수 있게.
시녀도 대동하지 않은 채 들고양이처럼 어디를 그렇게 돌아다니시는지. 카르낙은 파니릴리가 침엽수림이 우거진 길로 들어서는 것을 보고는 서둘러 몸을 돌려 옷을 걸쳐 입었다.
릴리의 뒤를 밟을 작정이었다. 별 뜻은 없다. 다시 잠이 올 것 같지도 않았고 멍하게 앉아 동이 틀 때까지 기다리기엔 무료할 것 같아서. 평소라면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아주 사소한 호기심에도 열중하고 싶었다. 지금은 그랬다. 그러기에 아주 적당한 때인 것 같았다.
카르낙은 작은 단검 하나를 제 허리춤에 끼우고 가벼운 몸놀림으로 방을 빠져나왔다. 저를 따라나서려는 경비병들을 모두 물리고 그는 릴리가 지나갔던 길을 따라 유유히 발걸음을 옮겼다.
우뚝 솟은 나무 사이로 등불이 반짝이며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때론 멀어졌고 때로는 금세 따라잡을 것처럼 가까워졌다가 다시금 멀어지기도 했다. 숲에는 밤의 소리가 가득했다.
어둠 속에서만 날개를 비벼 울며 제 짝을 찾는다는 곤충들. 밤에만 나뭇가지 사이를 유영하듯 날아다닌다는 밤의 새들. 그리고 밤이 되어야만 비로소 몸을 움직여 먹을거리를 찾는다는 들고양이의 기척도 들렸다.
카르낙은 부지런히 몸을 움직여 그 뒤에 바짝 붙어 속삭였다.
“야옹.”
파니릴리는 갑작스러운 기척에 놀라 손에서 등잔을 놓치고 말았다. 그러나 다행히 등불은 바닥에 처박히는 대신 민첩한 카르낙의 손바닥 위로 안착했다.
“야밤에 시녀도 없이 나서다니. 과연 목숨이 아깝지 않은가 보군.”
“…폐하!”
파니릴리가 제 심장 부근을 손으로 누르며 크게 숨을 내쉬었다. 놀란 가슴이 좀처럼 진정되지가 않았다. 그녀는 몇 번이고 가슴을 들썩이며 호흡을 고르다가 핀잔을 주듯 물었다.
“여기서 무엇을 하십니까?”
“그거야 내가 물어볼 말이지. 뭐 해? 여기서?”
숨을 고르느라 파니릴리의 대답은 한 박자 늦었다.
“냄새를 맡고 있었습니다.”
“냄새? 무슨 냄새?”
뭐야. 정말 들고양이처럼 후각이 예민하기라도 한가? 그것도 저 은빛 머리처럼 유전되는 알기어스 왕가의 특징인가?
“젖은 냄새요.”
“뭐?”
무슨 냄새? 젖은 냄새라고? 카르낙은 저도 모르게 코를 킁킁거렸다. 땀이나 물에 젖은 쉰내야 저도 이골이 날 만큼 맡아 봤지만 지금은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는다. 애초에 날 리가 없지 않은가. 여긴 숲이니까. 젖고 쉰 냄새가 폴폴 나는 사내들이 득실거리는 막사가 아니라.
“땅이 말라 가고 있어요. 아시나요?”
릴리가 물었다. 카르낙은 제 발밑의 흙을 내려다보았다. 모래 알갱이들이 버석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왜 문제인가. 모래는 원래 버석하다. 물에 젖은 진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밤에는 젖은 냄새가 나야 해요.”
“…….”
“그래야 아무것도 죽지 않아요.”
카르낙의 고개가 한쪽으로 비틀렸다. 뭐야, 이 계집. 혹시 무슨 마녀 같은 건가. 무슨 뜬구름 잡는 소리야.
“그러니까… 지금 무슨 예언이라도 하는 거야?”
“너무 오랫동안 비가 오지 않았어요. 새벽녘이 되면 풀잎에 이슬이 맺히고 그러면 젖은 냄새가 나야 하는데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어요.”
카르낙은 그저 눈만 깜빡였다. 릴리가 말을 이어 갔다.
“이대로 가면 작물들이 말라 죽기 시작할 거예요. 푸른 녹음도 사라질 거고요.”
카르낙은 몇 번이나 좌우로 눈을 굴리다가 물었다.
“…그래서 그게 뭐가 어떻다는 건데?”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을 보며 파니릴리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곧 누군가는 굶어 죽을 거라는 이야깁니다. 폐하.”
그러니까 이 여자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주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다만 한 부분이라도, 티끌만큼이라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러나 본디 바탕이 없는 지식은 아무리 쥐어짜 낸다 하여도 나오지 않았다. 젠장. 분명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건만 왜 이다지도 생소하단 말인가.
“난….”
입을 뗀 카르낙의 얼굴은 다소 혼란스러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