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뽕 박규태 선생 #82 >
사람들은 항상 이렇게 생각한다.
약자는 착할 것이고.
강자는 악할 것이다.
‘언더도그마’의 오류.
힘의 차이를 근거로 선악을 판단하려는 오류로, 맹목적으로 약자는 선하고, 강자는 악하다고 인식하는 현상이다.
사회과학에서 약자를 뜻하는 ‘언더독’과 맹목적인 견해, 독단을 뜻하는 ‘도그마’의 합성어로, 미국의 보수단체인 ‘티 파티’의 논객인 마이클 프렐이 그의 대표 저서인 ‘언더도그마’에서 처음으로 사용해 널리 알렸다.
왜 지금 이 이야기를 하느냐고?
2월 20일이 가까워지고 있는 상황.
리그컵 결승전을 기다리는 축구팬들이 리그 1위를 달리고 있는 울브스를 ‘악’이라 생각하고, 언더독인 크리스탈 팰리스를 ‘선’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팰리스! 우승 가즈아아아아아!
-솔직히 리그 우승에 가까운 울브스 아니냐? 리그컵 우승은 양보해도 좋을 듯하다.
-강등권에 동화처럼 어린 팬과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우승에 도전하는 팰리스가 이번에는 우승해야지!
-캬……. 팰리스의 동화! 실현되었으면……!
그들이 어째서 많은 축구팬들의 관심을 받고 있냐면, 구단과 어린 팬의 동화 같은 이야기 때문이었다.
박규태가 생각하기에는 동화라고 볼 수 없는 그냥 평범한 미담이었지만, 언론이나 다른 축구팬들은 다른 것 같았다.
별다를 것이 없었다.
백혈병에 걸린, 그리고 팰리스를 사랑하는 어린 여아가 파노르 솔로몬이라는 팰리스의 선수의 SNS에 리그컵 우승을 했으면 좋겠다는 글을 남겼다.
당연히 파노르 솔로몬이 동화의 왕자님처럼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한다는 이야기였다.
그는 앞선 리그컵 준결승에서 마지막 승부차기를 성공시키면서 팀의 승리를 이끌었고, 8강전에는 결승골을 터뜨리며 팰리스의 팬들을 기쁘게 만들었다.
덕분에 울브스는 악역이 되었다.
공주를 납치한 나쁜 드래곤.
공주를 괴롭히는 못된 마녀.
공주를 위협하는 못생긴 괴물.
팰리스의 감독인 크리스티안 위건은 리그컵 결승이 있기 전까지 선수들을 잘 다독이면서 승리를 다짐했다.
언론은 물론이고, EPL을 사랑하는 축구팬들도 모두 크리스탈 팰리스의 리그컵 우승을 응원했다.
오직 울브스의 팬들만 팰리스의 우승을 바라지 않았다.
그렇기에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모두가 우리의 우승을 바란다. 거기다 팀의 분위기도 그 어떤 시즌보다 좋아! 충분히 이겨낼 수 있어!’
거기다 울브스의 주전인 아르사네 디예와 백업 풀백인 셰인 베이트먼이 부상으로 스쿼드에서 빠져 있는 상황이었고.
가스통 렌도와 누룰라 갱스, 그리고 어구스틴 퀴논은 체력 관리를 위해서 이번 리그컵 결승에 나올 확률이 떨어지기도 했다.
모든 것이 팰리스의 우승을 위해 돕고 있었다.
‘우주가 돕는군.’
그래.
우주가 팰리스를 돕고 있었다.
울브스의 강력한 공격진만 어떻게든 막아낸다면 분명히 이번 리그컵 트로피를 들어 올리는 것은 그들이 될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최전방 공격수인 팍을 막아내는 것이지. 절대 쉬운 일이 아닐 거야.’
아마 2점은 내어줄 것이다.
그렇기에 더욱 수비가 중요했다.
‘딱 2실점으로 막아내면 승부차기까지 끌고 갈 수 있어. 우리 팀의 저력을 믿는다. 할 수 있어.’
주먹을 움켜쥔 크리스티안 위건 감독.
그가 승리를 다짐했다.
* * *
울브스를 사랑하는 세 남자.
찰스. 윌리엄. 이반.
프레드릭 가의 세 남자는 2월 19일의 이른 아침부터 몸단장을 바쁘게 하고 있었다.
그들은 3대가 울버햄튼 윈더러스를 응원하는 골수 울브스였다.
“아버지! 파김치 워리어 인형 챙겼죠?”
“그래! 이반은 아직 안 일어났어?”
“네, 아버지. 요즘 그 녀석……. 밤에 팍의 미튜브 영상을 본다고 잠을 많이 설치거든요.”
찰스는 자신의 손자가 좋아하는 파김치 워리어 인형을 챙기고 팀의 주전 중앙 수비수인 누룰라 갱스의 이름이 새겨진 레플리카 유니폼으로 갈아입었다.
그는 엠마누엘 메르시에의 유니폼으로 갈아입은 아들 윌리엄과 졸린 눈으로 박규태의 이름이 새겨진 유니폼으로 갈아입은 손자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모든 준비가 끝났다.
런던에 있는 호텔을 예약한 그들은 20일에 있을 울브스와 팰리스의 리그컵 결승을 보기 위해서 런던으로 향했다.
“할아버지! 지난 시즌과 다르게 이번에는 우승할 수 있겠죠? 지난 시즌에 FA컵에서 토트넘에게 졌잖아요.”
“당연히 이길 수 있지! 지난 시즌의 울브스와 이번 시즌의 울브스는 완전히 다른 팀이 되었다고!”
멋들어진 하얀 수염을 한 손으로 쓸어내린 찰스가 씩 웃으며 자신의 손자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시즌의 울브스와 이번 시즌의 울브스는 다르다.
운전하던 윌리엄.
그도 자신의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그것보다 토트넘 녀석들이랑은 계속 맞붙네요.”
“맞아요! 유로파리그 8강 상대가 토트넘이라니! 뭔가 지난 시즌부터 토트넘이랑 계속 만나는 느낌이에요!”
19일에 유로파리그 8강전 상대가 정해졌다.
울브스의 상대는 토트넘이었다.
지난 시즌, FA컵은 물론이고.
이번 시즌, 리그부터 시작해서 유로파리그 8강까지.
계속해서 토트넘과 만나게 된 울브스.
덕분에 최근 울브스의 팬들은 라이벌인 아스톤빌라나 웨스트 브롬위치 알비온보다 토트넘을 더 신경 쓰고 있었다.
“망할 토트넘 녀석들……!”
“할아버지! 내일 우리가 이기겠죠?”
“당연한 소리! 울브스는 무적이야!”
꽤 긴 거리를 운전하고 나서야 런던에 도착한 그들은 호텔에 짐을 풀고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이반은 지쳤는지 이미 잠에 빠져 있었다.
그리고 찾아온 2월 20일.
웸블리 스타디움으로 향하는 프레드릭 가의 세 남자는 울브스와 팰리스의 팬들로 꽉 찬 관중석에 도달할 수 있었다.
“할아버지! 저기! 저기!”
“오! 팍이 몸을 풀고 있구나!”
“팍!! 오늘 경기에서 골을 많이 넣어요!”
필드와 제법 가까운 자리를 얻은 프레드릭 가의 세 남자는 경기 전에 가볍게 몸을 풀고 있는 선수들을 보며 환호성을 내질렀다.
특히 박규태를 좋아하는 이반은 파김치 워리어 인형을 흔들며 환호했다.
“아빠! 팍이 절 보고 엄지를 들었어요!”
“하하하! 나도 봤단다!”
“팍! 멍청한 독수리 녀석들을 물어뜯어!”
울브스의 많은 팬이 내뱉는 함성.
하지만 크리스탈 팰리스의 울트라스가 내뱉는 악에 받친 목소리를 따라가기에는 조금 부족했다.
치어리더와 울트라스.
서로 상극인 응원문화가 공존하는 묘한 팀인 팰리스의 팬들은 신나게 응원가를 내뱉기 시작했다.
‘Homesdale Fanatics’라는 이름의 울트라스가 내뱉는 응원가가 필드를 뒤덮고 있었다.
질 수 없다는 듯이 더 큰 목소리로 응원가를 부르기 시작한 울브스의 팬들.
경기를 준비하기 위해 라커룸으로 들어가는 선수들이 다시 필드에 입장하기 전까지 웸블리 스타디움은 울브스와 팰리스의 팬들이 내뱉는 함성만이 가득했다.
그리고 프레드릭 가의 세 남자도 큰 목소리로 울브스의 응원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 * *
리그컵 결승.
울브스는 주전이 거의 빠진 1.5군에 가까운 스쿼드로 팰리스를 상대하게 되었다.
특히나 울브스가 자랑하는 박규태-가스통 렌도-엠마누엘 메르시에로 이어지는 삼각편대에서 두 사람이 빠진 것 때문에 몇몇 전문가들은 팰리스의 우승을 점치기도 했다.
하지만 울브스는 자신이 있었다.
비록 주전이 대부분 빠졌다고는 하지만, 백업 선수들의 수준도 상당했기 때문이었다.
필드에 입장하기 무섭게 들려오는 큰 함성.
울브스의 선수들은 알고 있었다.
오늘 경기에서 악역은 자신들이라는 것을.
하지만 쉽게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울브스는 빌런이고.
팰리스는 히어로였다.
어느 이야기든 항상 히어로가 이기기는 했지만, 솔직히 말해서 낡은 클리셰를 따라갈 울브스가 아니었다.
삐익!
주심이 휘슬을 불기 무섭게 두 팀의 선수들이 상당히 공격적으로 움직였다.
팰리스의 선축으로 시작된 경기.
팰리스는 4-2-3-1 포메이션을 기본 베이스로 많은 활동량을 활용해서 울브스의 공격을 억제할 생각이었다.
경기 초반에는 나름 나쁘지 않았다.
울브스의 미드필더인 브란도 사미와 샘 빈치의 호흡이 썩 좋지 않았고, 테오 나두와 알렉스코 아리에타가 처음으로 호흡을 맞추는 2선 공격진도 뭔가 공격이 더딘 느낌이었다.
덕분에 팰리스는 경기 초반부터 울브스를 강하게 밀어붙일 수 있었고, 의외로 좋은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경기 초반은 의외로 팰리스가 강하게 휘어잡았습니다! 울브스의 조직력이 흔들리는 것을 놓치지 않고 좋은 위치에서 프리킥 찬스를 잡았습니다.
프리킥 찬스.
조금 먼 거리였지만, 프리킥에 자신 있는 파노르 솔로몬에게는 좋은 기회였다.
‘마리에게 리그컵 우승을 선물할 첫걸음.’
그는 두 눈을 반짝였다.
팰리스 동화를 끝내기 위한 마침표.
그게 자신이 되고 싶었다.
비록 팀의 순위는 강등권에 아슬한 17위였지만, 이번 동화를 완성한다면 분명히 리그 순위에도 좋은 영향을 끼칠 것이다.
그렇기에 질 수 없었다.
“후우…….”
길게 숨을 내뱉는 파노르 솔로몬.
삐익!
주심이 휘슬을 불기 무섭게 그가 빠르게 공을 향해 달렸다.
그리고 있는 힘을 다해서 발을 휘둘렀다.
뻐엉!
날카롭게 날아드는 공.
생각 외로 프리킥의 정확도가 뛰어났다.
거기다 무회전으로 날아드는 공 덕분에 울브스의 골키퍼인 톤 필크만이 쉽게 막아낼 수 없었다.
철썩!
전반 7분에 터진 프리킥 득점.
골이 들어가기 무섭게 팰리스의 울트라스가 거대한 함성을 내지르며 응원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고오오올!
-파노르 솔로몬!! 대단합니다! 30m는 더 되는 거리에서 프리킥을 성공시켰습니다!
-예상외의 상황이 리그컵 결승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정말로 팰리스가 그들의 동화를 완성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전반 7분 만에 1 대 0으로 앞서나가는 팰리스! 울브스로서는 원치 않은 실점을 전반전 이른 시간에 허용했습니다!
울브스의 수비수들이 얼굴을 찌푸렸다.
자신들의 실수로 허용한 실점이었다.
그리고 지난 시즌에 FA컵에서 토트넘을 상대로 졌던 상황과 상당히 비슷했다.
덕분에 몇몇 선수들은 심리적으로 위축되었다.
‘이러다가 지난 시즌 FA컵 결승처럼 지는 게 아닐까?’
그리고 위축된 선수들의 심리는 경기력으로 드러났다.
팰리스는 흔들리는 울브스를 상대로 한 골을 더 넣기 위해서 공격적으로 달려들었다.
뛰어난 활동량으로 울브스의 2선과 3선의 선수들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울브스도 가만히 당하지 않았다.
전방에 있던 박규태가 눈을 반짝였다.
울브스도 역습을 시작했다. 그리고 최전방에 있던 박규태가 손을 들어 공을 요구했다.
마침 공을 잡은 테오 나두가 그런 박규태를 확인했고 팰리스의 왼쪽 측면을 파고들면서 크로스를 올릴 타이밍을 찾았다.
팰리스의 수비진은 갑작스러운 울브스의 날카로운 역습에 대처하기 위해서 라인을 급히 내리기 시작했다.
박규태는 상대 수비진에 걸쳐서 날카로운 크로스를 올라올 타이밍을 살폈다.
그런 박규태의 옆을 한 수비수가 막았다.
팰리스의 중앙 수비수.
‘브누아 바디살티’였다.
“마리를 위해서 뚫릴 수 없어!”
그의 말에 박규태가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다면 난 김치를 위해서 뚫어주지.”
말이 끝나기 박규태가 빠르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날카롭게 날아든 크로스에 시저스킥으로 반응했다.
순간적으로 벌어진 일이었다.
‘언제 크로스가!’
브누아가 반응하지 못했다.
조금 빠른 타이밍에 날아든 크로스였다.
덕분에 박규태는 방해 없이 시저스킥을 시도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감각적인 골 결정력을 보여주었다.
철썩!
-고오오오올!
-아! 팰리스가! 팰리스가! 결국에는 동점을 허용합니다! 정말 좋은 분위기였는데……! 박규태 선수가 팰리스의 좋은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습니다!
골이 들어가기 무섭게 박규태가 울브스의 팬들이 있는 관중석 방향으로 달렸다.
울브스의 팬들이 광기에 빠져 소리쳤다.
김치! 김치! 김치! 김치!
코리아! 코리아! 코리아! 코리아!
영국의 가장 큰 경기장.
웸블리 스타디움이 김치와 한국으로 가득 차는 것을 보면서 몇몇 한국 축구팬들이 벅찬 무엇인가를 느낄 수 있었다.
박규태가 무릎 슬라이딩을 하면서 소리쳤다.
“웰컴 투 김치 월드!”
‘김치 빌런’ 박규태.
그가 영국의 중심에서 김치를 외쳤다.
< 국뽕 박규태 선생 #82 > 끝
ⓒ 엉심킬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