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3
9장, 위대한 결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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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게 말씀드려 죄송해요.”
한지호가 멋쩍은 듯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로부터 이런 말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몇 명 없다.
장관이나 국회의원도 한지호 앞에서는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인다.
물론 한지호도 예의를 지키지만, 나이가 어릴지언정 그들보다 사회적 지위가 낮다고 여겨지진 않았다.
그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국제적 명성이 어느 정도인지 설명하는 것도 입 아픈 일이 됐다.
스포츠계에서 가장 유명한 한국인이 박지성, 김연아, 박태환 정도라면 의료계에서는 단연 한지호다.
사실 스포츠계나 연예계가 대중적 관심을 받는 것과 달리 의료계는 전문가들만의 리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지호는 한류스타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를 뛰어 넘은 대중적 인기를 누리고 있다.
최근에는 한국보다 외국에서 더욱 각광을 받을 정도였다.
단순히 인기만 많아진 것은 아니었다.
실제적인 영향력은 명성보다 더 높고 강하다.
그가 한중일 3국을 움직여 예멘 내전의 평화적 해결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하게 만든 일, 또 사우디아라비아의 반다르 왕자를 치료하여 역사에 길이 남을 UN 총회 연설의 주인공이 된 일은 너무 유명한 일화다.
그저 한 명의 한의사에 불과하지만 동아시아와 중동, 영국과 미국 등 서구권에 이르기까지 한지호의 말 한 마디면 국제 사회가 들썩인다.
이제껏 이만한 영향력을 가졌던 의료인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전무후무(前無後無)한 파워를 가진 의료인이 탄생한 것이다.
그것도 현대 의사가 아닌, 동양의 전통 의학을 계승한 한의사가 신화를 썼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었다.
하지만 한지호가 아무리 대단해졌어도 눈앞의 한 사람 앞에서는 어린 아이일 수밖에 없다.
그녀는 바로 어머니와 같은 마리아 수녀였다.
“사과해야 할 일은 아니지만…… 조금 놀랍긴 하구나.”
마리아 수녀가 눈을 크게 뜨고 대답했다.
작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리아 수녀와 한지호, 그리고 유초아가 앉아있었다.
유초아의 두 뺨은 평소보다 붉게 달아오른 상태였다.
그녀는 왠지 모를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이럴 때는 남자가 제몫을 다해야 한다.
한지호는 왼손으로 유초아의 오른손을 단단히 잡은 채 말을 계속했다.
“어릴 때부터 남매처럼 자랐지만, 그 이상의 특별한 감정이 생겼어요. 순간의 착각이 아닐지 오래 오래 고민하고 조심했습니다.”
“확신이 생겼니?”
“아시는 것처럼 저와 초아 모두 바쁘잖아요. 어떨 때는 한 달에 겨우 두 번밖에 못 만날 때도 있었어요. 그런데도 서로를 응원하고 아끼는 마음이 변치 않았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그 정도라면 축복해줄 일이지. 당황스럽긴 해도 절대 싫어서가 아니란다.”
마리아 수녀는 놀란 감정을 추스르며 조곤조곤 다정하게 말했다.
그제야 긴장이 풀리는지 유초아도 겨우 입술을 달싹였다.
“수녀님, 미리 말씀 드렸어야 했는데 죄송해요.”
“너도 고민이 많았겠구나. 지금이라도 먼저 알려줘서 내가 고마워해야지.”
“아이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진 않을까요?”
“민기와 민우, 지훈이 모두 다 컸단다. 그리고 오히려 더 좋아하지 않겠니? 천사원 식구가 진짜 가족이 될 수 있는 것이니.”
마리아 수녀의 입에서 진짜 가족이라는 말이 나왔다.
한지호와 유초아는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연애만 하다 헤어질 거라면 마리아 수녀에게 알릴 필요가 없었다.
괜히 어색한 사이가 되어 천사원의 식구들을 불편하게 할 수도 있다.
둘은 결혼을 결심했기에 마리아 수녀를 찾아온 것이다.
당장 식을 올리는 것은 아니더라도 관계를 인정받고 차근차근 준비를 하고 싶었다.
유초아의 나이가 아직 어리지만 그녀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그녀는 촉망 받은 여배우로서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다.
보통은 이런 상황에서 결혼을 미루고 더 큰 야망을 가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유초아는 자신의 꿈을 충분히 이룬 것 같다며 세상에 휩쓸려 변하기 전에 가정을 이루고 싶다고 말했다.
인기에 연연하지 않는다면 결혼을 하고 나서도 연기 생활을 이어갈 수 있다.
요즘에는 결혼 후에 제2의 전성기를 누리는 전지현 같은 여배우도 드물지 않다.
처음으로 그녀의 진심을 들은 한지호는 잠시 잠깐 고민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선수를 뺏겼지만 언젠가 정식 프로포즈는 먼저 할 생각이었다.
두 사람은 어린 시절부터 서로의 상처와 결핍을 보듬으며 자라왔기에 더 이상의 천생연분은 없을 것 같았다.
한지호는 눈 코 뜰 새 없이 바쁜 와중에도 유초아가 웃는 모습을 보면 힐링이 되는 기분이었다.
이제 세상 앞에서 떳떳하게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를 드러내고, 머지않아 매일 아침 함께 눈을 뜰 수 있다는 사실이 그저 벅찼다.
국제적인 VIP를 치료하고, 신약을 개발하며 역사적 족적을 남기는 것만큼 의미 있는 일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였니? 두 사람?”
마리아 수녀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질문을 던졌다.
어머니 같은 그녀도 연애의 시작이 궁금한 것은 똑같은 모양이었다.
한지호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초아가 대학에 들어갔을 때, 돌이켜보면 그때부터였던 것 같아요. 내가 너무 빨랐지?”
고개를 돌려 유초아의 옆모습을 보니 다시 볼이 빨개져 있었다.
한동안 말이 없던 그녀가 머뭇머뭇 속내를 털어 놓았다.
“저는 사실… 지호 오빠가 공중보건의 복무를 마치고 천사원에 온 날부터였던 것 같아요. 그때는 잘 몰랐지만 지금 돌아보면 뭔가 다른 느낌을 받아서…….”
한지호는 깜짝 놀랐다.
소보루 빵을 잔뜩 사들고 천사원에 왔던 날, 용역 깡패들과 시비가 붙으며 무의식적으로 오금희를 처음 펼쳤었다.
그로인해 전생을 각성하고 인생이 완전히 달라지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유초아가 자신에게 특별한 감정을 가진 순간도 그 날이었다니, 신기할 수밖에 없었다.
따지고 보면 용역 깡패가 유초아에게 성희롱을 하자 한지호의 이성이 끊어지며 싸움에 휘말렸던 것이다.
당시에는 전혀 짐작도 못 했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니 모든 게 퍼즐처럼 맞춰진 역사적인 날이었다.
한지호는 유초아와 맞잡은 손에 살짝 힘을 줬다.
그녀의 따뜻한 체온이 느껴져 마음이 편해졌다.
마리아 수녀에게 허락을 받았으니 이제 더 이상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다.
오랜 인연의 결실을 맺을 날이 성큼 다가올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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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종을 찾기 바쁜 언론들이 간만에 건수를 물었다.
대형 열애설이 터진 것이다.
보통 스타 연예인끼리의 연애, 혹은 재벌가가 연루 된 열애설을 A급으로 친다.
하지만 며칠 전 터진 열애설은 기자들 사이에서 S급으로 분류되고 있었다.
열애설의 주인공이 워낙 대단한 사람이고, 이면의 숨겨진 이야기 또한 대중들의 흥미를 잡아끌기 딱 좋았기 때문이다.
다름 아닌 국민 한의사 한지호와 청순한 매력으로 인기 급상승 중인 여배우 유초아의 열애 기사가 포털 사이트를 도배했다.
유초아는 연예계에서 주목 받는 최고의 신인 여배우 그룹에 속한다.
아직 20대 초중반이기에 앞으로 10년은 전성기를 누릴 수 있는 재목이다.
한지호의 명성과 인기는 말할 것도 없다.
두 사람의 만남은 그 자체로도 전국을 강타 할 뉴스였다.
더구나 한지호와 유초아가 어린 시절 같은 고아원에서 자랐다는 사실, 그리고 한지호를 롤 모델로 한 드라마 21세기 허준에 유초아가 출연했다는 점은 무척 이색적인 비하인드 스토리다.
유초아의 소속사와 원화 한의원으로 기자들의 전화가 쏟아졌다.
평소에도 기자들의 전화가 잦은 편이지만, 열애설이 터진 이후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 됐다.
그나마 유초아의 소속사는 대형 연예 기획사라 열애설 대응 경험이 풍부하다.
한지호가 미리 소속사 대표에게 언질을 해두었기에 크게 당황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정상 업무를 봐야 원화 한의원 안내 데스크는 곤욕을 치루고 있었다.
어떤 게 기자들의 전화고 또 어떤 게 환자들의 문의 전화인지 구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박우식 사무장은 상대가 기자라고 신분을 밝히는 순간 무례함을 무릅쓰고 바로 전화를 끊으라 지시했다.
한의원 평판이 안 좋아질지언정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럼에도 안내 데스크 직원들은 기자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었다.
한지호가 국내외에서 주요 VIP를 치료하거나 성과를 거뒀을 때 전화가 쏟아지는 건 참을 수 있었다.
한의원과 유관한 업무이고, 기자들에게 제대로 설명을 해주는 것도 직원들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인 사생활인 열애설을 두고 업무가 마비될 정도로 전화를 받는 건 누구라도 견디기 힘든 일이다.
결국 당사자인 한지호가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는 기자들에게 공문을 발송했다.
열애설에 대한 기자회견을 할 테니 한의원으로 전화를 걸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만약 한의원으로 열애설 문의를 한다면 업무방해죄로 고소하겠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한 사람의 남자가 연애를 하는데 왜 기자회견까지 해야 하는지 납득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한지호는 공인 이상의 존재가 됐고, 스스로에게 주어진 부담을 짊어지기로 했다.
다행히 공문을 발송한 이후 한의원으로 걸려오던 기자들의 열애설 문의 전화가 상당히 줄어들었다.
직원들의 고통을 덜어준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한지호는 예고한 대로 금요일 저녁 서울 시내 모 호텔 프레스 룸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왕 겪어야 할 일이라면 정면으로 돌파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찰칵- 찰칵, 찰칵!
“거 좀 비켜요! 우리도 사진 좀 찍게-!”
“우린 세 시간 전부터 기다렸어! 그쪽이 비켜야지!”
프레스 룸에 진을 친 기자들의 자리다툼이 치열했다.
기다리고 기다린 끝에 기자회견의 주인공 한지호가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깔끔한 정장 차림으로 나타난 그는 혼자 단상에 앉았다.
기자들로부터 질문을 받기 앞서 입장문을 읽으려는 것처럼 보였다.
“원화 정의 네트워크의 대표 원장, 한지호입니다. 오늘은 그간 여러 언론을 통해 알려진 열애설에 대해 알리기 위해 기자회견을 주최했습니다. 알려진 것처럼 저와 여배우 유초아 씨는 연인 관계이며 결혼을 전제로 진지하게 교제를 하고 있습니다. 아직 구체적인 결혼 계획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또 몇몇 기사에서 다뤄졌든 우리는 천사원이라는 보육시설에서 함께 성장하며 서로의 아픔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이입니다. 다만 원화 정의 네트워크가 제작과 기획에 참여한 드라마 21세기 허준에 유초아 씨가 출연한 것은 정당한 오디션의 결과입니다. 유초아 씨는 배우로서 자신만의 커리어를 개척하고 있고, 저 역시 연인이자 한 명의 팬으로서 그녀의 활동을 존중할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일반적인 내용이었다.
기자들은 한지호의 멘트를 놓치지 않기 위해 녹음기를 킨 채로 연신 사진을 찍었다.
다들 예상했던 내용이지만 한지호가 직접 열애설을 인정하고, 결혼을 전제한다는 표현을 썼으니 당연히 메인 뉴스가 될 것 같았다.
그런데 입장문은 이게 전부가 아니었다.
이어진 내용은 프레스 룸에 모인 기자들 전부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제 열애설에 대해 밝히는 것과 동시에 기자님들께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다른 곳도 아닌 한의원에 전화를 걸어 사적인 열애설 질문을 하는 것, 정상적인 취재 행위라고 생각하십니까? 한의원은 말 그대로 병원입니다. 여러분의 전화 때문에 꼭 치료가 필요한 환자들이 연결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만약 제가 대중의 관심을 받으며 살아온 연예인이라면 또 모르겠습니다만, 그 흔한 TV 광고 하나 찍지 않았습니다. 감사하게도 많은 국민들이 저를 알아주시지만, 저는 의료인입니다. 그리고 서울 원화 한의원은 병원입니다. 누구보다 환자들이 우선적으로 배려를 받아야 하는 공간이고, 안내 데스크를 비롯한 직원들은 오직 환자들을 위해 존재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사적인 문제로 전화를 걸거나 무단으로 한의원을 방문하는 분은 신분을 막론하고 강경하게 대처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약속드린 것처럼 질문은 세 가지만 받겠습니다.”
입장문 발표가 끝나고, 원래라면 세 명 안에 들기 위해 기자들이 경쟁하듯 손을 들고 목소리를 높였어야 한다.
하지만 다들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벙 찐 얼굴이었다.
기자회견장에서 공식적으로 기자들을 꾸짖는 사람은 그 누구도 없었다.
대통령과 같은 권력자조차도 기자의 펜을 무서워한다.
그러나 한지호는 달랐다.
그는 기자들의 잘못된 행태를 지적하는데 거리낌이 없었고, 이로 인한 후폭풍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입장문 전문이 공개되면 국민들이 누구 편을 들지 자신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한지호는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기자들을 혼 낼 수 있는 인물인지도 모른다.
그만한 평판이 뒷받침하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는 입을 떡 벌리고 질문 할 생각도 잊은 기자들을 바라보며 당당하게 앉아있었다.
유초아와의 연애는 축복이다.
그 축복을 가십으로 소비하는 이들에게 잘 보이려고 고개를 숙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사랑의 결실을 맺어가는 한지호의 내면은 더더욱 굳세어졌다.
그는 비교할 사람이 없는 시대의 거인으로 나날이 성장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