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2
9장, 위대한 결실 (1)
한지호가 사우디아라비아의 수도 리야드에서 목숨을 건 치료를 마치고 돌아온 지 벌써 6개월이 지났다.
그 6개월 사이에도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다.
한중일 동아시아 3국이 예멘 내전 중단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고, UN 이사회에서 결의안이 채택 되었다.
국제사회는 모처럼 힘을 모아 압박 수위를 높였다.
이처럼 거대한 공조의 시발점에 한지호라는 개인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예멘 정부군과 반군을 남몰래 돕는 사우디와 이란은 국제사회의 전방위적 공조 압박에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가뜩이나 대선을 앞두고 신경이 날카로워진 미국 정부가 석유 봉쇄 카드를 꺼내면 두 나라의 재정은 박살이 난다.
굳이 석유 봉쇄까지 갈 것도 없다.
미국에서 작정하고 가스 수출량을 늘리면 국제 유가가 하락하는 것은 정해진 수순이다.
유가 하락은 석유 봉쇄 못지않게 두 나라의 경제에 치명적이다.
마음 같아서는 사우디와 이란 모두 예멘 내전에서 손을 떼고 싶을 터였다.
적어도 잠깐 동안은 불개입 선언을 하고, 국제사회의 압박을 피해 한숨을 돌리고 싶은 게 분명하다.
다만 누가 먼저 백기를 드느냐에 따라 자존심이 걸려 있다.
불개입 선언을 먼저 하는 순간 상대에게 지는 느낌이 든다.
우스운 일이지만 자존심 때문에 전쟁이 터지기도 한다.
사람은 원래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거는 치사한 존재다.
국가와 국가 사이의 외교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특히 중동처럼 종교적 갈등이 극에 달한 지역에서는 자존심과 명분이 실리보다 중요하게 여겨진다.
평소 같았으면 코너에 몰린 이란과 사우디 둘 다 끝장까지 갔을 것이다.
원래부터 둘은 치킨 게임에 능한 나라다.
설령 석유 봉쇄라는 최악의 카드가 나와도 지기 싫다는 이유로 버티고도 남을 국가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역시 비밀의 열쇠는 한지호였다.
반다르 왕자를 치료한 그는 무엇이든 들어주겠다는 말에 예멘 내전 불개입 선포를 부탁했다.
불치병을 털어내고 왕궁으로 복귀한 반다르 왕자는 한지호의 부탁을 잊지 않았다.
그는 6개월 만에 잊어버렸던 정치 세력을 회복하고, 리야드 정계의 중심으로 다시금 우뚝 섰다.
국무를 수행하는 것은 물론이고, 외교 행사에도 사우디를 대신해 참석하기 시작했다.
2왕자와 3왕자에게 달라붙었던 리야드 왕궁의 가신들은 돌아온 1왕자 반다르 밑에 무릎을 꿇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현재와 미래를 책임질 단 한 사람, 반다르 왕자가 먼저 결단을 내린 것이다.
UN 총회에 참석한 그는 대표 연설에서 깜짝 발표를 했다.
누구도, 심지어 총회를 주최한 UN 사무총장도 언질을 받지 않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저는 이 자리에서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를 대신하여 중대한 결심을 발표하고자 합니다. 예멘 내전이 수아파와 시아파의 대리전이라는 의심을 받고 있고, 국제 사회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높은 것으로 압니다. 사우디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예멘 내전을 지원한 적은 없었습니다만, 앞으로 더욱 감시의 눈길을 확대하여 혹여 한 정의 총이라도, 1달러의 군자금이라도 예멘으로 흘러가는 일이 없도록 만전을 기하겠습니다. 아울러 사우디아라비아는 중동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UN과 함께 최선을 다할 것임을 약속하는 바입니다. 우리는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주어진 책무를 성실히 수행하며 그만큼의 존중을 받길 원합니다.”
명연설이었다.
각 국의 대표단은 통역이 제대로 됐는지 확인한 다음 일제히 기립박수를 보냈다.
반다르 왕자, 아니 사우디아라비아는 최대한의 양보를 한 것이다.
대놓고 예멘 내전에 개입했었다는 인정을 할 수는 없다.
대신 앞으로 사우디의 돈과 무기가 예멘에 흘러가지 않도록 만전을 기하겠다는 말이면 충분했다.
왕위 계승 서열 1위인 반다르 왕자가 UN 총회에서 선언을 한 것이다.
그 무게감은 이루 설명할 수 없다.
지방 군벌 단위의 지원까지 완전히 끊을 수는 없겠지만, 당분간 사우디 정부에서 예멘 내전에 기름을 붓는 행태는 사라지게 됐다.
이란도 자극을 받을 게 분명하다.
사우디아라비아가 국제사회의 칭송을 받는 꼴을 두고 볼 리 없었다.
반다르 왕자가 정치력을 발휘해 먼저 자존심을 꺾었지만, 사실 지고도 이긴 셈이다.
이란이 계속 예멘 내전에 지원을 하면 전세(戰勢)는 유리해질 수 있다.
그러나 이란만 국제사회의 압박을 받게 되고, 사우디와 함께 중동의 리더로 여겨졌던 지위에 타격을 입을 것이다.
이란 정부가 정상적인 판단을 한다면 머지않아 사우디와 비슷한 수준의 불개입 선언을 할 게 확실했다.
“마지막으로 꼭 한 마디만 더 하고 싶습니다.”
그때였다.
국제 대표단의 기립 박수가 잦아들자 단상에 선 반다르 왕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가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더 하려는 것 같았다.
각 국의 대표와 주요 외신 기자들이 일제히 반다르 왕자를 쳐다봤다.
반다르 왕자는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를 대표해 예멘 내전 불개입 선언을 한 장본인이다.
그의 입에서 얼마나 더 놀라운 말이 나올지 기대 될 수밖에 없었다.
“지난 3년 가까이 저는 병상에 누워만 있었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국무를 수행할 수 없었고, 그동안 중동은 시리아와 예멘에서 불어온 피바람을 고스란히 맡아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내 친구, 한국의 닥터 지호 한. 그가 나를 치료해주고, 다른 대가 대신 중동의 평화를 원한다고 말했습니다. 오늘의 연설은 모두 그에게서 빚진 것입니다. 평화를 기원하는 한 사람의 마음이 때로는 세상을 바꿀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우리 아이들이 기억하도록 공식 석상에서 언급하고 싶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다시 한 번 열화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특히 멀뚱거리며 앉아있던 한국 대표단의 얼굴에는 함박웃음이 피어났다.
난데없이 한국이 아주 좋은 방향으로 언급 됐기 때문이다.
예멘 내전 불개입을 선언한 반다르 왕자의 연설은 이번 UN 총회를 통틀어 손꼽힐 만큼 중요한 대목이었다.
그렇기에 세계 각 국의 언론에서 반복적으로 영상을 틀며 분석을 할 게 뻔하다.
그런데 반다르 왕자의 명연설을 낳은 배경으로 한국의 한의사 한지호가 지목된 것이다.
단순히 한지호 개인의 영예가 아니라 대한민국 국가 브랜드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건이다.
한류스타나 스포츠 스타가 국위선양을 하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UN 총회에서 중동의 내전을 종식시킨 주요 인물로 언급이 됐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 물밑에서 움직이던 한지호의 이름이 수면 위로 드러났다.
그가 갖고 있던 국제적 명성은 이제 수십, 수백 배 뛰어오를 것 같았다.
한지호는 명실공히 한의사를 넘어 국제사회를 움직이며 평화를 이끌어내는 거인으로 우뚝 섰다.
불과 몇 년 전까지 그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고아원 출신의 빈털터리 한의사였다.
하지만 지금은 괄목상대(刮目相對)라는 말로도 부족하다.
한지호의 한계를 짐작하는 게 점점 어려워질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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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의학만으로 현대 의학을 대신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누군가 그런 주장을 한다면 과감하게 사이비라고 판단해도 좋습니다.”
한지호의 입에서 사뭇 도발적인 발언이 쏟아져 나왔다.
그의 앞에는 100여 명이 넘는 학생들이 눈을 빛내며 앉아 있었다.
이들은 평범한 학생들이 아니었다.
세계 각지에서 모인 최고의 수재들, 존스 홉킨스 의학 전문 대학원의 학생들이다.
한지호는 존스 홉킨스의 대체 의학 과정 초빙 교수로 정해진 강의를 소화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는 대체 의학을 가리키는 교수이면서 오히려 현대 의학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대체 의학 전문가들이 교묘하게 현대 의학의 약점을 지적하는 것과는 딴판이었다.
한지호는 유창한 영어로 강의를 이어나갔다.
“한국에서 췌장암 환자를 조기 발견해 치료한 경험이 있습니다. 초기 진단은 한의학적 진맥으로 내가 먼저 내렸지만, 확진을 위해서는 현대 의학의 최첨단 장비가 필요했습니다. 항암 치료 역시 한의학과 현대 의학을 병행해서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고, 의료진이 자주 협의하며 서로의 치료가 상충되지 않도록 노력했기 때문에 성공적으로 마무리 될 수 있었습니다.”
곧이어 대형 화면에 췌장암 환자의 진단과 항암 치료 케이스가 떠올랐다.
한지호는 카리스마 넘치는 표정으로 좌중을 압도하며 입을 열었다.
“이것은 췌장암 완치 판정을 받고 건강하게 새 삶을 살고 있는 김금순 환자의 케이스입니다. 대학병원에서는 초기 췌장암을 진단해내지 못했었습니다. 그러나 만약 내가 진단을 정확하게 했다는 이유로 끝까지 대체 의학적 치료만 고집했다면 환자는 100% 완치될 수 있었을까요? 반대로 Y대 암센터에서 한의학적 치료 도입을 거부했다면 이미 대학 병원에 불신을 느낀 환자가 순순히 항암 과정을 받아들였을까요?”
묵직한 질문이 학생들의 심장을 강타했다.
한지호는 단순히 시간 때우기 용도의 강의를 준비해오지 않았다.
사실 천편일률적인 한의학 강의를 해도 존스 홉킨스 의대생들은 신기해 할 것이다.
그들에게는 대체 의학 과정 자체가 낯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지호는 세계 의학계를 이끌어갈 인재들에게 진정한 가르침을 주고 싶었다.
학생들 중 일부라도 대체 의학과 현대 의학의 공존을 진지하게 고민한다면, 미래에는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발전 된 의료 기술의 혜택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포인트는 이것입니다. 환자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그리고 의술의 발전을 위해서라면 대체 의학이나 현대 의학 한 가지만을 고집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죠. 의사, 한의사, 누가 됐든 우리의 고민은 어떻게 환자를 치료할 것인가에서 벗어나면 안 됩니다.”
짝짝짝짝짝-!
학생들이 일제히 박수를 치며 동의했다.
미국은 아무래도 한국보다 훨씬 자유로운 강의 분위기 탓에 종종 박수와 환호성이 터질 때가 있었다.
한지호는 대체 의학과 현대 의학의 무의미한 갈등을 끝내고 싶었다.
학계에서도 마냥 서로가 더 우월한 의술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생산적이지 못하다.
각자의 강점과 약점을 인정하고, 어떻게 하면 환자를 효과적으로 치료할 것인지에만 집중하는 게 올바른 의료인의 자세다.
아주 기본적인 이야기지만, 문제는 기본을 지키는 의료인이 많지 않다는 사실이다.
한지호는 다른 곳도 아닌 존스 홉킨스에서 의료인의 기본을 강조했다.
곧이어 그가 다른 교재를 꺼내들었다.
“오늘은 원화 한의학 1차 백서 75페이지에서 시작하겠습니다. 두통과 열, 몸살 증상을 동반하는 감기 치료에서 어떻게 한의학적 처방을 하는지 기록 되어 있죠?”
학생들은 한지호가 언급한 페이지를 열심히 눈으로 읽어 내렸다.
종이책을 펼친 학생도 있고, E-book을 태블릿 PC에 담아서 들고 온 학생도 있었다.
원화 아카데미에서 발간한 한의학 1차 백서는 영문으로 번역이 완료 됐다.
한국어 원본이 국내 유수의 한의대에 교재로 채택 됐고, 영문 버전은 존스 홉킨스를 비롯해 텍사스 의대 M.D 앤더슨 암 센터에서 참고 도서로 뽑혔다.
앞으로 오랜 기간 국내외 수많은 의료진과 연구자들이 원화 한의학 백서를 보고 체계적인 학습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원화 아카데미의 기록실에서는 이미 2차 백서 작업을 하고 있다.
1차 백서보다 심도 깊은 내용을 다룬 2차 백서가 발간되면 또 한 번 역사에 획을 그을 것 같았다.
“감기와 같은 경미한 질병 치료에서 대체 의학이 주목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한지호가 질문을 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다섯 명 이상의 학생들이 손을 번쩍 들었다.
답변을 하고, 때로는 교수와 토론을 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게 서구권 대학 강의의 특성이다.
수동적으로 교수의 말을 받아적기 일쑤인 한국 대학의 풍경과는 많이 달랐다.
한지호는 흡족한 표정으로 한 명을 지목했다.
“37번 자리에 앉은… 루이스 카토. 대답해보세요.”
“네, 교수님! 미국과 유럽에서 최근 지나친 항생제 처방을 염려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대체 의학의 자연 치유 요법이나 한약 처방, 허브 티 처방 등이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훌륭합니다. 항생제의 부작용을 우려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 한의학의 매력이죠. 환자들에게 다양한 선택의 자유를 줄 수 있기 때문에 경미한 질병 치료에서도 대체 의학이 인기를 끌고 있는 겁니다. 하지만 절대 간과해서는 안 될 지점이 있습니다. 한약을 오남용하게 되면 간 손상을 유발할지도 모릅니다. 항생제 부작용보다 인체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기에 처방을 내리기 앞서 환자의 상태를 정확히 파악하고, 간 손상이 오지 않게끔 각별히 주의해야 합니다.”
세계 최고의 수재들이 고개를 숙이고 한지호의 말을 받아 적었다.
한지호의 강의는 존스 홉킨스 의학 전문 대학원 내부에서도 최고 평점을 받기로 유명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한지호가 한의학의 장점만 말하는 게 아니라 위험한 점, 단점을 가감 없이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한약을 오남용하면 간 손상이 일어난다는 것도 어떻게 보면 한의사에겐 숨기고픈 약점이다.
그러나 한지호는 거침이 없었다.
오래 전, 가짜 백수오 사건이 터졌을 때도 그는 한의학계의 내부 고발자가 되기를 망설이지 않았었다.
자칫 업계에서 왕따가 될 수도 있지만 한지호는 항상 진실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원칙을 지켜왔다.
때로는 미련하다는 말도 들었지만 한지호의 원칙은 잘못된 게 아니었다.
그렇게 원칙을 지킨 결과, 오늘날 현대 의학의 본산인 존스 홉킨스에서 존경을 받으며 한의학을 가르치게 된 것이다.
새로운 시대.
한지호는 두 손으로 직접 시대의 새벽을 열고 있었다.
목소리를 높이며 강의를 이어가는 그의 얼굴에 서광이 반짝이는 것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