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남화타-237화 (237/255)

# 237

2장, 역사를 쓰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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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호 오빠, 아니 이제 교수님이라고 불러야 되는 거 아니에요?”

유초아가 살짝 웃으며 말했다.

그녀 딴에는 장난을 치는 것이다.

오랜만에 봤지만 하나도 어색해지지 않았다.

틈틈이 메신저로 연락을 주고받았기에 서로의 근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이렇게 자연스레 농담을 하는 게 가능했다.

드라마 데뷔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몇 편의 CF와 예능으로 대중들에게 얼굴을 각인시킨 유초아는 잠깐의 휴식기를 즐기고 있었다.

격세지감이라고 했던가.

파릇파릇한 연극영화과 학생이던 유초아는 이제 모든 방송국에서 주목하는 신인 여배우가 됐다.

한지호의 도움도 컸지만, 그녀가 가진 재능은 혼자서 반짝반짝 빛을 내고 있었다.

“교수님은 무슨.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한테 들으니까 오글거린다.”

“원장님에 교수님에…… 진짜 대단해요. 내가 알던 지호 오빠가 맞는지 모르겠어요.”

“너도 내가 알던 초아가 맞는지 모르겠어. 너무 빨리 스타가 됐잖아.”

한지호의 말에 유초아가 수줍은 듯 얼굴을 붉히며 손을 내저었다.

“스타 아니에요. 어디서 그런 소리 하면 저 혼나요.”

“누가 널 혼내? 연예계 선배들? 감독들? 다 데려와, 내가 혼낼 테니까.”

“오빠도 참.”

유초아는 못 말리겠다는 듯 한지호를 보며 웃었다.

빡빡한 일정을 쪼개어 미국에 다녀온 한지호는 피로가 눈 녹듯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언론에서는 학부 학위밖에 없는 한의사가 존스 홉킨스 의대 교수로 초빙을 받았다고 난리도 아니었다.

한지호는 잊혀질만 하면 대형 뉴스를 빵빵 터트리는 존재다.

그렇기에 절대 대중의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 그의 이름 석자는 한국에서 신드롬이 된 지 오래였다.

존스 홉킨스 의학 전문 대학원의 대체의학과 초빙 교수가 됐다는 건 예사 일이 아니다.

항상 비과학적 민간요법이라고 폄하를 당했던 한의학이 세계적인 명문 의대에서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은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 중심에는 한지호 개인의 탁월한 의술이 있었고, 또한 원화 아카데미에서 발간한 한의학 1차 백서가 큰 역할을 했다.

이제 한의대에 다니는 학생들은 누가 뭐래도 떳떳하게 공부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한의학 백서를 통해 보다 체계적인 방법으로 의술을 배울 수 있게 됐다.

한지호가 한의학의 과거와 현재, 미래에 끼친 영향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동의보감을 쓴 허준이 살아서 돌아와도 한지호에게는 한 수 접어줄 정도였다.

그러나 역사적 위인이 되어갈수록 개인으로서 한지호는 외로워질 수밖에 없었다.

모든 사람, 심지어는 중국과 서양에서도 한지호를 칭송하며 떠받들기 바쁘다.

하지만 30대 초반의 청년 한지호는 누구와도 속 이야기를 하기 힘든 처지가 됐다.

다들 자신을 살아있는 전설, 신화적인 한의사로 생각할 뿐 평범한 사람으로 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유초아는 한지호에게 특별한 존재였다.

정말 아무 것도 아니던 시절, 가장 어렵고 가난하던 천사원에서의 추억을 공유한 사이다.

뿐만 아니라 유초아 역시 지금은 대중의 주목을 받는 연예인의 삶을 살고 있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사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새 작품 준비는 잘 하고 있지? 이번에 진짜 잘해줘야 된다. 부담 팍팍 느껴.”

한지호는 MBS에서 제작한 드라마 이야기를 꺼냈다.

원화 아카데미에서 기획과 투자에 참여한 한의학 드라마의 촬영 날짜가 정해졌다.

유초아는 2번째로 비중이 큰 여자 서브 주연으로 캐스팅 됐다.

한지호가 드라마국장에게 추천을 했지만 공개 오디션이 열렸고, 유초아는 PD와 작가에게도 합격점을 받으며 배역을 따냈다.

생각할수록 재밌는 일이었다.

실존인물 한지호를 롤 모델로 삼은 드라마에 유초아가 출연한다.

불과 몇 년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 현실이 되어 펼쳐지고 있었다.

한지호와 유초아 모두 어린 시절 꿈 꿨던 것보다 훨씬 더 밝은 미래를 개척하는 중이었다.

“열심히 연습하고 있어요. 발성 트레이닝 선생님도 바꿨구요. 이번 작품… 지호 오빠를 위해서라도 정말 잘 해낼 거에요.”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너를 위해서 잘 해야지. MBS 국장님도 인정한 기획이니까 대박 날 거야. 이번에 붙은 담당 PD와 작가님도 경력이 장난 아니던데.”

“맞아요. 드라마 쪽에서 제일 유명한 분들이 합류했고, 캐스팅도 워낙 잘 됐으니 하반기 최고 기대작이라고 할 만 해요.”

“그렇게 말하니까 연예인 다 된 것 같다? 하하.”

“놀리지 마요, 오빠.”

남들 시선을 피해 자동차 안에서 만나고 있지만 하나도 아쉽지 않았다.

유초아도 한지호와 보내는 둘만의 시간을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다른 아이들은 어때? 가끔 천사원에 가보고 있지?”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대화를 나누던 한지호가 화제를 돌렸다.

유초아는 드라마 데뷔를 한 이후 소속사에서 마련해준 숙소에서 지내게 됐다.

한지호만큼은 아니지만 바쁜 스케줄을 소화하느라 부천의 천사원에 자주 가보지 못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들려온 대답은 의외였다.

“매일 수녀님이랑 통화하고, 한 달에 한 번은 무조건 가는 걸요. 아이들은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어요. 오빠를 엄청 보고싶어 하구요.”

“그래? 촬영 때문에 바빴을 텐데…… 니가 나보다 훨씬 낫네.”

“아니에요. 오빠가 얼마나 중요한 일을 하는지 아이들도 다 알아요. 이제 많이들 컸잖아요.”

“내일은 나도 수녀님께 전화 드리고, 아이들 보러 갈 날을 잡아봐야겠다.”

한지호는 또 한 번 유초아가 달리 보였다.

마냥 어린 여동생에서 여자로 보이게 된 것도 생소했는데, 자신보다 더 살뜰하게 천사원을 챙기고 있었다.

매일 같이 마리아 수녀와 통화를 한다는 것도 대단했다.

유초아의 어른스럽고 성숙한 면모 때문에 그녀가 더욱 아름다워 보였다.

“아직 시간 좀 남았는데 한강이나 보러 갈까?”

“좋아요!”

한지호는 버튼을 눌러 시동을 다시 걸었다.

잠들어있던 벤틀리가 주인의 명을 받아 우렁찬 소리를 내며 눈을 떴다.

부우우웅-

한강 공원으로 향하는 길, 한지호는 기어봉에서 손을 뗐다.

어차피 자동이기에 기어를 조작할 일이 없다.

대신 그는 유초아의 손을 잡았다.

손끝이 닿는 순간, 유초아가 움찔거리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는 손을 빼지 않고 가만히 앉아있었다.

흘깃 옆모습을 살펴보니 유초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것 같았다.

웃고 있는 것이다.

한지호도 마음 편히 미소를 지으며 드라이브를 했다.

한의학을 넘어 의학의 역사를 새로 쓰고 있는 한지호지만, 오늘은 개인적으로도 역사적인 날이었다.

남들에게는 손을 잡는 게 시시한 스킨십일지 모른다.

그러나 천사원에서 함께 자라온 한지호와 유초아는 오랜 시간 감정을 묵히다가 큰 결단을 내린 것이다.

어렵게 잡은 만큼 두 사람의 손은 쉽게 떨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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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개발하고 있는 신약이 상용화되면 세상은 얼마나 달라질까요?”

한지호가 입을 열었다.

원화 아카데미 5층의 기획 전략실에는 낯선 인물들이 모여 있었다.

신영준 회장과 최규열 센터장도 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평소에는 볼 수 없었던 사람들이 10명 가량 자리를 차지했다.

무척 이례적인 일이다.

원화 아카데미의 컨트롤 타워인 5층에는 극소수의 인물만 들어올 수 있기 때문이다.

한지호는 그들 한 명 한 명의 얼굴을 천천히 돌아봤다.

이들은 깐깐한 검증을 거쳐 특별히 초대한 예비 투자자들이었다.

외국계 사모펀드의 오너, 국내 대형 은행장 등 면면이 화려하기 이를 데 없었다.

여기에 모인 10명이 마음을 먹으면 수천억 원은 우습다.

1조 원 이상의 투자도 감당할 수 있는 진짜 거물들의 모임이다.

당연히 이들은 아무 자리에나 나타나지 않는다.

한지호, 신영준, 최규열.

원화 아카데미에서 신약 개발을 주도하는 삼인방의 이름이 그만큼 대단하기에 다들 무거운 엉덩이를 이끌고 김포까지 행차한 것이다.

“극비 보고서에 나와있지만, 원화 아카데미에서는 마황의 주성분을 이용한 신약 개발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본래 에페드린과 슈도에페드린은 신진대사를 지나치게 활성화시킵니다. 그렇기에 다이어트용 한약에 주로 쓰였지만, 부작용이 지나쳐 위험 약물로 분류 되기도 했습니다.”

한지호는 전문 용어가 나오는 부분을 알아듣기 쉽게 천천히 설명 했다.

하지만 크게 걱정 할 필요는 없었다.

최소 수백 억 이상을 투자하려고 찾아온 사람들이다.

기본적인 공부는 웬만한 전문가 못지않게 마치고 왔다.

돈을 굴리는 사람들의 무서움을 과소평가하면 안 된다.

어쩌면 그들이야말로 자본주의 사회 최고의 전문가 집단일지 모른다.

한지호는 자신을 향해 집중된 시선을 느끼며 템포를 끌어올렸다.

곧바로 핵심을 이야기해도 될 것 같았다.

“원화 아카데미에서는 1차와 2차에 걸친 부작용 제어 실험을 성공적으로 마쳤습니다. 그렇기에 부작용 걱정 없이 마황 주성분의 효능을 긍정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열린 것이죠. 지금도 수많은 환자들이 병상에만 누워있지 않습니까? 욕창 등 피부병은 가족과 간병인이 고생하면 방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몸 안의 장기는 어떻습니까? 누워있는 시간이 압도적으로 긴 환자들의 장기는 퇴화 현상을 겪습니다. 현대 의학으로 이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비용이 소요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약이 상용화 된다면! 혼수상태를 비롯해 거동이 힘든 환자들이 훨씬 저렴한 비용으로 장기의 퇴화 현상을 방지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거물들의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사실 원화 아카데미에서 발송한 극비 보고서에 다 나와 있는 내용이다.

하지만 세계적인 명성을 자랑하는, 최근들어 존스 홉킨스 의대의 초빙 교수로까지 발탁 받은 한지호가 직접 발표를 하니 더욱 와 닿을 수밖에 없었다.

마황을 이용한 신약은 일반 사람들에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것은 마황의 신진대사 활성화 작용을 이용한 특수 약물이다.

특수 약물이긴 해도 신약이 성공적으로 출시 되면 일대 파란이 일어날 것이다.

오랜 시간 병상에 누워있어서 신체의 모든 부분이 퇴화되는 환자들, 특히 장기의 퇴화 현상을 막을 수 없는 환자들에게는 구세주가 될 약이다.

가장 먼저 현대 의학계가 뒤집어질 것 같았다.

한의사가 주축이 되어 특수 약물을 개발할 수 있다는 사실은 의학의 패러다임을 바꾸기 충분하다.

가격 책정이 관건이지만, 신약의 혜택을 받을 환자와 보호자들도 쌍수를 들고 환영할 것이다.

다행히 지나치게 높은 가격이 책정 될 가능성은 무척 낮았다.

마황 자체가 저렴하게 구할 수 있는 약재이기 때문이다.

한지호가 처음 마황을 이용하겠다는 아이디어를 떠올린 것도 낮은 원가를 염두에 둔 결과였다.

그는 계속해서 자신의 구상을 풀어나갔다.

“동물 실험과 임상 실험의 경우 과거에는 최소 5년 이상이 걸렸습니다. 하지만 빅데이터를 통해 임상 실험 절차를 간소화 할 수 있는 기술이 이미 사용되고 있습니다. 물론 해당 기술의 특허권을 갖고 있는 메디데이터(Medidata)에게 로열티를 지불해야 하지만 투자할 가치가 충분합니다. 이를 기반으로 신약의 상용화 시점을 2년 뒤로 앞당긴다면… 원화 아카데미에 투자한 기관은 마이더스의 손이라고 불리게 될 것입니다.”

메디데이터는 헬스케어 분야에서 독보적 기술력을 보유한 IT 회사다.

미국 화이자, 프랑스 사노피, 스위스 로슈, 독일 베링거잉겔하임, 그리고 한국의 미한약품까지 국제적인 제약회사들을 고객사로 두고 있다.

신영준의 미한약품과 인연이 있으니 원화 아카데미와 계약을 체결하는 것도 어렵지 않을 터였다.

문제는 천문학적 액수의 로열티지만, 임상 실험 기간을 줄여서 상용화 시기를 앞당길 수 있다면 훨씬 더 이득이다.

한지호는 신약 개발의 실험 성과를 준비했고, 남은 절차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계획까지 세워 놓았다.

마황을 이용한 신약이 개발되면 인류의 역사에 공헌을 하는 셈이다.

원화 아카데미와 투자자들이 상상하기 힘든 떼돈을 버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다.

그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10명 가량의 투자자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지금이 원화 아카데미라는 로켓에 올라탈 수 있는 마지막 기회입니다.”

다른 투자 설명회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신약 상용화까지 적게 잡아도 수천억 원의 자금이 추가로 소모된다.

그러나 한지호는 마치 투자자들에게 기회를 주는 사람처럼 당당했다.

실제로 투자금을 빌리는 게 아니라 기회를 주는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금융계를 움직이는 거물들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바로 오늘, 용감하게 결단을 내리는 사람은 한지호와 함께 영광의 시기를 누리게 될 것이다.

한지호는 여유로운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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