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8
3장, 세계를 움직이는 침 (1)
모든 게 정상 궤도에서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난관(難關)이 없는 사업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매번 좋은 일만 있겠는가.
한지호에게도 남들보다 더한 시련이 찾아왔었다.
고아로 태어난 것부터 온갖 무시를 당하며 힘겹게 성장했던 사춘기, 기껏 한의대에 입학했지만 교수들에게 투명인간 취급을 당했던 시절.
고아 출신이기에 가지 않아도 되는 군대를 굳이 자원한 것도 신분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공중보건의로 성실하게 복무를 마치면 고아라서 믿기 힘들다는 편견이 옅어질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를 향한 차별의 시선이 오죽 따가웠으면 남들은 안 가려고 발악하는 군대에 자원했겠는가.
전생의 기억을 각성하고 오금희를 수련하기 전까지 일일이 설명하기 힘든 어려움들이 한지호의 인생길에 꼬리표처럼 따라 붙었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전생을 각성한 후에도 크고 작은 문제들과 마주했다.
그때마다 한지호는 누구보다 열심히 준비해서 장애물을 뛰어넘었다.
단순히 한 번의 운명적인 기연에 인생을 맡기지 않았다.
전생이라는 기연을 온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며 미친 사람처럼 일했다.
그 결과 오늘날의 한지호가 탄생한 것이다.
국민 한의사가 아닌 세계적인 한의사.
원화 정의 네트워크라는, 한의학에서 출발해 현대 의학과도 당당하게 교류하는 역사상 최초의 단체를 이끄는 대표 원장.
존스 홉킨스 의학전문 대학원 대체의학과 초빙 교수.
한지호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A4 용지 한 장을 다 채워도 부족하다.
그나마 굵직한 약력만 요약해도 입이 떡 벌어질 정도였다.
공식적으로 존스 홉킨스의 초청장을 받은 한지호는 학기마다 1주에서 2주씩 미국에 머물며 학생들을 가르치게 됐다.
사실 존스 홉킨스의 의대생들에게 지식을 전해주기만 하면 남는 게 없다.
초빙 교수로 일하며 받는 돈은 한지호에겐 무의미하다.
대신 그는 현대 의학의 과학적 체계에서 한의학으로 인정을 받았다는 상징 자산을 얻어냈다.
뿐만 아니라 원화 아카데미에서 만든 한의학 백서가 존스 홉킨스 의대 교재로 쓰인다.
그로인해 한국의 한의대도 한의학 백서를 정식 교재로 채택하라는 압력을 외부에서부터 받을 수밖에 없었다.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한의학 교재로 미래의 한의사들을 교육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한의학을 현대 의학과 같은 반열에 올려놓겠다는 한지호의 원대한 야망은 성큼 성큼 실현되고 있었다.
그를 주인공으로 삼은 MBS 한의학 드라마도 촬영이 시작됐다.
서로 마음을 확인한 유초아는 열심히 촬영에 임하는 중이었다.
그녀 외에도 거물급 남녀 주인공이 캐스팅 됐고, MBS 드라마국의 간판 PD와 스타 작가가 붙었다.
국민 드라마였던 허준을 능가하는 신드롬을 만들기 위해 MBS에서 팔을 걷고 나섰다.
한지호라는, 전례를 찾아보기 힘들만큼 유명한 한의사를 모델로 한 드라마다.
게다가 장본인이 직접 기획과 투자에 참여한다.
제작진이 작정하고 미친짓을 하지 않는다면 망할래야 망할 수 없는 드라마였다.
이미 방송가에서는 MBS의 한의학 드라마를 피해야 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21세기 허준이라는 다소 유치한 제목이 붙었지만, 드라마가 방영되면 한류 열풍과 맞물려 어마어마한 파급 효과를 낼 것 같았다.
이렇듯 한지호는 마치 세상의 중심에 서있는 기분이 들 법도 했다.
모든 일이 그가 원하는대로 풀리고 있었다.
신약 개발도 새로운 투자자들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착실히 단계를 밟아가고 있다.
임상실험 기간을 줄이기 위해 IT 헬스케어 그룹인 메디데이터(Medidata)와 계약도 체결했다.
남은 개발 과정이 순조로울 경우 앞으로 2년이면 충분하다.
마황을 이용한 신약이 세상에 등장하면 그때야말로 한지호는 규호의 절규, 의술로 천하를 움직이는 자리에 오르라는 외침을 이뤄줄 수 있게 된다.
물론 지금도 어느 누구와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지만 말이다.
천하(天下).
한지호는 자신의 가슴, 아니 영혼 깊이 아로새겨진 두 글자를 품에 안고 뚜벅뚜벅 걸어갔다.
홍콩과 서울, 그리고 세계 곳곳을 누비느라 시간은 쏜살처럼 지나갔지만 하나도 아쉽지 않았다.
하루하루 충만한 삶을 살아가며 매일 열매를 따고 있기 때문이다.
21세기 허준, 강남에 자리잡은 화타.
세계의 주목을 한몸에 받으며 달리는 한지호의 시간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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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봤어?”
“뭐? 21세기 허준 말하는 거지?”
“응! 남주 이건혁 완전 존잘……. 진짜 멋있지 않냐?”
“근데 실제 모델 한지호가 더 잘생긴 듯.”
“한지호?”
“몰랐어? 헐, 대박! 21세기 허준에서 이건혁이 맡는 역할, 한지호잖아. 완전 유명한 존잘 한의사!”
“아, 맞다!”
여고생 두 명이 길을 걸어가며 깔깔거렸다.
대화 주제는 최근 장안의 화제인 드라마 21세기 허준이었다.
최고 시청률을 경신하고 있는 21세기 허준은 MBS의 복덩이가 됐다.
벌써 중국과 동남아 수출이 확정됐고, 남자주인공 이건혁은 한류스타로서의 입지를 확실히 다질 것 같았다.
수혜주는 이건혁만이 아니었다.
신인 여배우 유초아는 여주인공을 뛰어넘는 매력을 발산하며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건혁이 연기하는 남자 주인공의 실제 모델인 한지호도 연예인은 우습게 여길 인기를 끌었다.
그동안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지만 10대 소녀들에게는 먼 나라 이야기였다.
연예게의 야소녀 모임과 친해졌을 때 반짝 화제가 되었지만, 주로 어른들의 이슈였다.
하지만 드라마 방영 이후 많은 게 달라졌다.
10대부터 60대 이상까지, 전 연령층에서 한지호를 아이돌로 여기게 됐다.
아이돌은 어린 가수들을 뜻하는 말이 아니다.
시대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 신화적인 우상을 아이돌이라 부른다.
한지호는 한의학계의 아이돌인 동시에 전국민의 아이돌로 거듭났다.
동시에 원화 아카데미도 홍보 효과를 톡톡히 누렸다.
드라마 21세기 허준에서 원화 아카데미를 모델로 한 허준 아카데미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드라마를 보는 사람들은 허준 아카데미, 즉 현실의 원화 아카데미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알게 됐다.
그만큼 관심도 늘어났다.
한의학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게 왜 중요한지를 비롯해서 한방의 원리를 이용해 신약 개발을 할 수 있다는 사실 등 홍보 포인트가 적지 않았다.
시청률도 잘 나오고, 해외 판매도 결정되면서 제작에 투자한 금액도 넉넉히 돌려받게 됐다.
오랜만에 안방극장을 강타한 21세기 허준 열풍에 한지호는 함박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주인공 모델인데 다소 오글거리는 장면들이 나와 민망했지만, 현실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드라마를 보는 재미가 있었다.
“김도진 원장님!”
“앗, 김도진 원장님이시다!”
역삼역 서울 원화 한의원에서 직원들이 한지호를 낯선 이름으로 불렀다.
김도진은 21세기 허준의 주인공 이름이다.
이건혁이 연기하는 인물, 한지호를 롤 모델로 만들어진 캐릭터가 바로 김도진이었다.
그렇기에 직원들뿐 아니라 친숙한 환자들, 또 원화 정의 네트워크의 동료 원장들까지 장난스럽게 한지호를 김도진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내가 진짜 개명을 하던지 해야지… 드라마의 파급력이 이렇게 클 줄은 몰랐습니다. 멀쩡한 이름까지 뺏기고.”
“한도진은 잘 안 어울립니다.”
“사무장님까지 농담 하시기에요? 하하!”
한지호는 박우식의 말에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다.
과묵하고 진중한 박우식이 드라마 주인공 이름으로 농담을 던질 정도면 말 다 했다.
드라마 열풍의 부작용 아닌 부작용으로 받아 들여야 될 것 같았다.
“당분간은 별 수 없이 김도진 원장으로 살아야겠습니다.”
“그래도 시청률이 잘 나와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신영준 회장님이나 최규열 센터장님이 드라마 제작 효과에 반신반의 하셨었는데…….”
“그러게요. 두 분도 흡족해하시더군요. 홍보와 기획은 젊은 사람들을 따라갈 수 없다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아니라 원장님을 따라갈 수 없는 것이겠지요.”
“사무장님에게 그런 칭찬도 듣고, 드라마가 잘 되긴 잘 됐나봅니다.”
한지호는 흡족한 얼굴로 원장실에 들어섰다.
아직 오전 진료가 시작되려면 시간이 조금 남았다.
서울 원화 한의원의 사무장이자 원화 정의 네트워크 총괄 이사인 박우식도 함께 원장실로 들어왔다.
본격적인 진료가 시작 되기 전 1대1 오전 브리핑을 하기 위해서다.
“역삼 M 타워를 구입하는 문제는 건물주 어르신과 원활하게 협의하고 있습니다. 시세보다 약간 높은 가격을 원하시는데 큰 무리는 없을 것 같습니다.”
“지나치지만 않다면 원하는 쪽으로 가격은 양보해드리세요. 우리가 여기에 터를 잡는 걸 시작으로해서 지금까지 왔으니까, 여러모로 감사한 일이죠.”
“알겠습니다, 원장님. 로펌에서 소개해준 담당 세무사와 법무사를 만나 계약 일정 잡겠습니다.”
한지호는 역삼역 인근 5층짜리 빌딩인 M 타워를 구입할 작정이었다.
이곳에서 원화 한의원을 개원한 이후 모든 게 술술 잘 풀렸다.
마침 4층의 치과와 5층의 안과도 계약 기간이 끝나가고 있었다.
역삼 M 타워를 구입한 뒤에는 원화 타워로 이름을 바꿀 예정이다.
어쩌면 서울 원화 한의원은 강남 모처로 잠시 이전하고, 5층짜리 빌딩을 더 높게 증축할 수도 있다.
한지호는 역삼 M 타워 빌딩을 놓고 이런저런 구상을 하는 중이었다.
목표는 하나였다.
한국의 중심은 서울, 서울의 중심은 강남이다.
바로 그 강남 한복판에 한의학 랜드마크를 세우려는 것이다.
“전담 로펌은 좀 어때요?”
“일처리를 꼼꼼하게 합니다. 지난번 보다는 훨씬 마음에 듭니다, 원장님.”
“잘 됐네요, 그럼.”
박우식의 보고를 받은 한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원화 정의 네트워크는 거대한 단체가 됐기 때문에 전담 로펌이 꼭 필요하다.
로펌에서 세무사와 법무사 등을 소개해주기도 한다.
다행히 최근 새로 계약한 로펌은 일을 잘 하는 모양이었다.
이런 대소사도 한지호가 직접 챙기려면 한도 끝도 없다.
그렇다고 마냥 로펌이나 외부 단체에 일임하면 사기를 당하기 딱 좋다.
사기까지는 아니라도 호구 노릇을 하며 과다한 비용을 지출할지 모른다.
하지만 박우식 덕분에 걱정 할 일이 없었다.
그는 한지호 못지않은 업무량을 소화하며 원화 한의원과 네트워크의 대소사를 세심하게 챙겼다.
물 샐 틈 없는 완벽한 관리는 박우식을 상징하는 말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사업가보다는 관리형 경영가 체질이었다.
박우식은 한지호 밑에서 제 2의 인생을 살며 자기 사업을 할 때보다 훨씬 높은 연봉과 사회적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
그가 한지호의 날개가 되어준 것처럼 한지호도 그의 울타리가 되어주는 것이다.
“다른 안건은요?”
역삼 M 타워 구입 계획을 체크한 한지호가 화제를 돌렸다.
더 이상 보고할 게 없으면 오전 브리핑을 끝내고 진료 준비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아직 다른 이야기가 남아있었다.
박우식이 목소리를 낮게 깔며 입을 열었다.
“정부 쪽 라인을 통해 들어온 소식입니다. 이달 말 개각이 단행되면 양성문 장관님께서 퇴임하실 것 같습니다.”
“퇴임이요?”
한지호의 눈이 커졌다.
보건복지부 장관 양성문은 그의 은인 중 한 명이다.
물론 양성문에게도 한지호가 은인이었다.
그는 정치적 문제가 발생하거나 도움이 필요할 때마다 한지호의 편에서 든든한 버팀목이 돼 줬다.
그런데 장관직에서 물러난다고 하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다른 이유 때문은 아니고 분위기 쇄신을 위한 개각인 듯 합니다.”
“하긴, 이만하면 장관직을 오래 유지하신 편이죠.”
“좋은 소식도 있습니다. 확인된 것은 아니지만 양 장관님께서 퇴임 후 UN으로 가실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UN? 그건 또 무슨 말입니까.”
“그동안의 경력으로 UN 산하 국제보건기구의 아시아 소장으로 가신다는 외교가의 소문이 있습니다.”
“그건 내가 직접 확인해볼게요.”
“오늘 보고는 여기까지입니다, 원장님.”
“네.”
박우식이 고개를 숙이고 원장실 밖으로 나갔다.
한지호는 폰을 꺼내 양성문에게 바로 전화를 할지 망설였다.
국제보건기구 WHO는 세계 의료 사업과 긴급 구호 활동을 주관하는 컨트롤 타워다.
장관에 비해 결코 낮은 자리가 아니다.
잠깐 머뭇거리던 한지호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는 궁금한 것을 참을 수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