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남화타-236화 (236/255)

# 236

2장, 역사를 쓰다 (1)

“기록이 없다고 해서 수백년이 넘는 시간 동안 아시아 사람들을 치료해온 대체 의학의 성과를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원화 아카데미에서는 기록을 남겨 후대에게도 한의학적 성과를 전승해주려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현대의 한의학을 미래에 넘겨주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꺼내와 발전시키는 일입니다.”

한지호는 유창한 영어로 청중들에게 한의학 체계화 작업의 의의를 설명하고 있었다.

사실 영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단어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적절한 단어를 미리 찾아보는 등 통번역 전문가와 함께 철저하게 준비를 해왔다.

보이지 않는 노력은 결국 빛을 발하기 마련이다.

존스 홉킨스 의대의 교수진과 학생들, 연구원, 그리고 취재진 앞에서 특강을 하는 한지호는 조금도 어설퍼 보이지 않았다.

특강에 대한 관심도 상당해서 원래 예정됐던 강의실보다 더 큰 곳으로 장소를 옮겼다.

“대체 의학은 현대 의학과 완전히 다른 학문인가?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췌장암 환자를 조기에 발견하고 함께 치료한 케이스를 예시로 들고 싶습니다. 한의학과 현대 의학이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항암에 성공했으니까요. 교류 연구가 활성화되면 한의학적 방식으로 현대 의학의 난제를 풀고, 또 현대 의학의 데이터를 활용해 한의학의 정확도를 높이는 일도 충분히 가능할 겁니다. 오늘 이 자리에 초청 받아 여러분 앞에서 강의를 하는 것도 아주 의미 있는 일이죠. 우선은 접촉점을 늘려야 합니다. 대체 의학을 하는 사람과 현대 의학을 하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만나다보면 연구와 개발 거리는 넘처날 테니까요.”

짝짝짝짝짝-

한국과 달리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강의 중간 중간에 박수를 치는 문화가 있었다.

한지호의 말에 감명을 받았는지 청중들이 일제히 박수를 쳤다.

곧이어 박수 소리가 잦아들고, 한지호는 특강의 클라이막스를 향해 피치를 올렸다.

“미국 유수의 의대들이 통합의학 연구센터 연합에 가입하고, 대체 의학 연구에 적극 나선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게 빠져있다면 연구의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공신력 있는 대체 의학 전문가가 주도하여 연구를 하는지, 아니면 현대 의학만 공부한 사람들이 현대 의학의 관점에서 대체 의학을 연구하는지, 이 차이는 분명 시간이 지날수록 극명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묵직한 한 방이었다.

한지호가 던진 돌직구가 넓은 강의실을 조용하게 만들었다.

말투는 정중했지만 심각한 문제 제기를 했기 때문이다.

미국 명문 의대들이 경쟁적으로 유치하는 대체 의학 센터나 학과에 과연 진짜 전문가가 있느냐는 뜻이었다.

타닥, 타다닥-

특강에 참석한 기자들이 바쁜 손놀림으로 타이핑을 했다.

유의미한 지적이기에 기사화 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현대 의학을 전공한 의사들로 가득찬 대체 의학 연구 센터와 학과, 확실히 뭔가 이상하다.

트렌드를 따라 보여주기 식으로 급조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기자들이 타이핑 하느라 바빠졌다면 안소니 콜린스를 비롯한 존스 홉킨스 의대의 교수진은 표정 관리를 해야만 했다.

한지호의 비판은 존스 홉킨스의 경쟁 의대들을 조준하고 있었다.

아직까지 대체 의학 연구 센터와 학과를 개설하지 않은 존스 홉킨스는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정치적인 의도가 있는 발언이었다면 대단히 현명했다.

진심어린 비판이었다고 해도 시의적절하게 먹혀든 것은 분명하다.

특강 전체의 내용도 풍부했지만, 결정적 한 방으로 존스 홉킨스 의대 교수진의 마음을 사로잡은 셈이었다.

이후에도 한지호의 강의는 물 흐르듯 매끄럽게 전개됐다.

그는 추상적인 이야기만 하지 않았다.

데이터를 중시하는 의대 교수와 학생들의 취향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한의학의 위대함을 맹목적으로 찬양하지 않았고, 철저히 검증된 치료 결과만 분석하며 과학적으로 접근했다.

사실 존스 홉킨스에도 대체 의학을 사이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렇기에 한지호의 강의 방식은 무척 신선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형태는 한의학이지만 치료 성과와 효능을 점검하는 방식은 현대 의학의 방식을 그대로 따랐기 때문이다.

특강이 지속될수록 청중들의 집중도는 점점 높아졌다.

처음에는 팔짱을 끼고 의자에 몸을 묻고 있던 교수와 학생들도 눈을 반짝이기 시작했다.

전례가 없는 존스 홉킨스 의대 특강이지만 한지호는 이름값을 톡톡히 해내고 있었다.

세상은 허명을 남기지 않는다고 했던가.

그의 국제적인 명성은 거저 얻어진 게 아니었다.

특히 스스로를 최고의 엘리트라고 자부하는 존스 홉킨스 의대 학생들이 한지호를 우러러보고 있었다.

세계 의학의 중심부인 미국 존스 홉킨스에 한지호라는 이름의 파문이 번지는 순간이었다.

+++

세계적인 명성을 자랑하는 한의사 한지호는 진짜 실력자다.

현대 의학이 정복하지 못한 미지의 영역에서 싸우는 사람이다.

존스 홉킨스 의대의 교수진과 학생들은 이런 인식을 공유하게 됐다.

안토니 콜린스의 요청에 의해 초빙을 했지만, 막상 특강을 듣기 전까지는 반신반의하던 사람들이 적지 않았었다.

그러나 뚜껑을 열고 보니 더 진국이었다.

자신의 업적을 과대포장하지 않고 한의학의 원리를 체계적으로 다듬어 설명한 강의는 그야말로 역대급이었다.

한지호는 학구심 넘치는 의대생들의 날카로운 질문도 수월하게 받아 넘겼다.

몇몇 교수들이 직접 의학적 질문을 하기도 했는데 사전 조율이 전혀 안 된 바였다.

당황할 수도 있는 상황이지만 한지호의 답변에는 막힘이 없었다.

한의학, 그리고 동양의 대체의학과 관련해서 한지호보다 더 높은 경지에 오른 사람은 지구 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존스 홉킨스의 교수와 학생들은 세계 최고 레벨이지만, 이제 막 대체의학 연구에 관심을 가진 수준으로는 한지호 앞에서 갓난아기일 따름이다.

그렇다고 해서 한지호는 목에 힘을 주지도 않았다.

현대 의학이 주제였다면 자신도 이들처럼 어린 아이 수준의 질문밖에 하지 못했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아무튼 잘했어. 이만하면 최선이라고 봐야지.”

한지호는 방금 전 마무리한 특강을 돌아보며 스스로를 칭찬했다.

가끔은 자기 자신을 대견하게 여길 필요도 있다.

여유를 주지 않고 채찍질만 하면 제 아무리 워커홀릭인 한지호라도 번아웃 증후군에 빠질지 모른다.

열심히 준비해서 좋은 결과를 본 일에는 잘 했다고 자화자찬을 하는 것도 중요하다.

자만이 되면 곤란하지만 자존감을 세우는 건 필수다.

똑똑-

그때 대기실 문에서 노크 소리가 울렸다.

한지호는 특강에서 에너지를 쏟아낸 후 잠시 휴식을 취하도록 배려를 받았다.

이제 존스 홉킨스 의대의 다른 교수들과 학장을 만날 시간이 된 것 같았다.

“닥터 한.”

익숙한 음성이 들렸다.

한지호를 미국까지 부른 안토니 콜린스 교수였다.

“네, 들어오세요.”

“좀 쉬었습니까? 생각보다 질문들이 너무 많아서 힘들었지요?”

“아닙니다. 학생들, 그리고 교수님들의 진지한 열정이 느껴져서 무척 즐거웠습니다. 저에게도 좋은 자극이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렇게 말해주니 정말 뿌듯하네요. 강의 평가가 아주 좋습니다. 아마 올해의 특강 중에서 최고로 손꼽히게 될 것 같아요.”

안토니 콜린스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특강의 경우 참석자들의 만족도를 대외적으로 공표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더 좋은 세미나 개최를 위해 특강을 들은 학생과 교수들은 자세히 점수를 매긴다.

놀랍게도 한지호는 올 한해 존스 홉킨스 의대에 초청을 받은 유수의 강사들 중에서 최고점을 받았다.

그를 초빙하는데 앞장 선 안토니 콜린스 교수도 어깨가 으쓱해지게 된 것이다.

“학장님도 닥터 한을 아주 탐내게 된 것 같아요. 다른 교수들도 긍정적인 반응이고…….”

“이런 식의 교류가 지속적으로 이어지는데 기여했다면 영광입니다.”

“우선 함께 학장실로 가서 더 이야기를 하시지요.”

콜린스 교수가 앞장섰다.

그는 친절한 사람이지만 아무에게나 이렇게 잘 해주지는 않는다.

혈액암의 세계적 권위자이기에 의사로서의 자존심이 대단한 인물이다.

의대생은 물론이고, 연구자나 의사들 사이에서도 안토니 콜린스라는 이름은 전설과 다름없다.

살아있는 전설이 한지호를 극진히 예우하며 배려란 배려는 다 해주고 있었다.

그만큼 한지호라는 인물의 업적이 신화적인 것이다.

몇몇 네티즌들은 한지호의 명성을 국뽕이라고 비난하지만, 사실 그는 한국에서 바라보는 것보다 외국에서 더 높게 평가를 받고 있었다.

“이곳입니다.”

한지호는 콜린스 교수와 함께 긴 복도를 가로질렀고, 학장실 문 앞에 섰다.

“닥터 한과 같이 왔습니다.”

안토니 콜린스는 노크 대신 목소리를 높였고,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한지호를 데려온다고 미리 말을 해뒀기에 거칠 게 없었다.

“안녕하세요, 한지호입니다. 이렇게 또 인사를 드리게 되는군요.”

한지호는 학장실 안에 들어가 먼저 고개를 숙였다.

강의실에서 봤던 얼굴들이 눈에 익었다.

존스 홉킨스 의대의 학장과 시니어 교수들 다섯 명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 어서와요. 오늘 특강 무척 인상적이었어요. 콜린스 교수님이 극찬을 거듭한 게 이해가 되었습니다.”

학장이 다른 교수들을 대표해서 한지호를 환영해줬다.

그는 환갑이 가까운 노교수지만 대머리인 탓에 실제보다 젊어 보였다.

한지호는 학장의 눈빛과 자세, 호흡을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비슷한 연령대의 사람들 중에서는 가장 건강한 축에 들 것이다.

더 이상 수술실에서 매스를 잡지는 않겠지만, 의대 학장이라는 힘든 직책을 맡으며 이토록 건강 관리를 잘 한 비결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사실은 나도 꼭 닥터 한을 모시고 싶었답니다. 10년 전부터 취미로 단전호흡을 시작했는데 건강이 눈에 띄게 좋아져서……. 물론 그때는 의대 교수가 단전호흡 같은 걸 한다고 말할 수 없는 분위기였지만, 지금은 시대가 달라지지 않았겠어요?”

가만히 있어도 의문이 풀렸다.

존스 홉킨스 의대의 학장은 단전호흡 애호가였다.

화타의 오금희도 무공이나 의술보다는 건강을 지켜주는 도인술로 유명하다.

단전호흡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적지 않다.

한지호는 반가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뇌호흡과 단전호흡은 잘못 배우면 심각한 부작용에 빠질 위험이 있습니다만, 안정된 방법으로 반복하면 노년층 건강 유지에 아주 좋습니다. 좋은 스승을 만나셨군요, 학장님.”

“그러게 운이 좋았지요. 허허허허.”

한의학계 지존으로부터 단전호흡의 효능을 인정 받은 학장이 기분 좋게 웃음을 터트렸다.

예전 같았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존스 홉킨스 의대에서 교수들을 모아놓고 단전호흡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기적이다.

“사실 닥터 한이 오기 전에 여기 모인 교수님들과 이야기를 좀 나누었어요. 콜린스 교수의 의견은 굳이 물을 것도 없으니…….”

“어떤 이야기입니까?”

“대략적인 말은 들었겠지만, 우리도 하버드 의대나 조지타운 의대처럼 대체의학 과정을 신설하려 해요. 그리고 몇 년 뒤에는 텍사스 의대의 M.D 앤더슨 암센터를 따라잡아야지요.”

“네. 콜린스 교수님께서 통합의학 연구센터 연합 활동도 열심히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CAHCIM에서도 배울 점이 많으니. 의학의 본질은 지키되 새로운 흐름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기로 하였고, 닥터 한을 초대한 것도 우리로서는 도전이었어요. 물론 결과가 너무 좋아서 기쁘지만.”

“저도 존스 홉킨스에서 특강을 할 수 있어 기뻤습니다.”

“앞으로는.”

학장이 말을 끊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다른 교수들을 천천히 돌아봤다.

마치 다시 한 번 주요 교수진의 의사를 확인하는 것 같았다.

안토니 콜린스는 체면도 잊고 거세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머지 교수들도 온도차는 있었지만 입을 열지는 않았다.

한지호를 바라보며 미소를 짓는 교수도 있었고, 반면 못마땅한 얼굴인 교수도 있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대세에 지장이 없다는 것이다.

학장이 다시 입을 열어 못 다한 말을 이어갔다.

“앞으로는 특강이 아니라 한 학기에 2주 정도는 몰아서 강의를 해줄 수 있겠어요?”

“그 말씀은…….”

“존스 홉킨스 메디컬 스쿨의 대체의학 과정 초빙 교수가 되어 달라는 것이지요. 더불어 CAHCIM의 정회원도. 물론 공식적인 절차가 남아있지만, 이 자리에서 닥터 한이 오케이 싸인을 주면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합니다.”

학장의 결심은 확고해 보였다.

한지호는 여러 번의 검증이 필요한 사람이 아니다.

세계적인 스타와 유명인사, 영국 왕실까지 그의 의술을 검증한 셈이었다.

뿐만 아니라 특강 내용 중 핵심을 찌르는 멘트가 있었다.

미국의 다른 의대는 대체의학 전문가를 보유하고 있지 않다는 것.

뒤늦게 과정을 신설하는 존스 홉킨스 의대는 한지호를 교수로 초빙하면 일거에 역전을 할 수 있다.

한지호는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이미 초빙 교수 자리를 염두에 두고 미국으로 날아온 것이다.

다만 특강이 끝나자마자 학장으로부터 제안을 받을 줄은 몰랐었다.

“존스 홉킨스와 함께 새로운 역사를 쓰겠습니다.”

한지호의 대답이 흡족했는지 학장이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이후에는 다른 교수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며 인사를 했다.

한지호는 벌써부터 역사를 써버렸다.

존스 홉킨스 의대뿐 아니라 미국 의대를 통틀어 최초의 한의사 교수가 됐고, K대 한의학과 학부 학위만으로 정식 임용을 받았다.

정상을 훌쩍 넘어선 한지호가 어디까지 비상(飛上)할지 아직도 짐작할 수 없었다.

그저 그의 모든 걸음이 역사로 기록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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