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남화타-211화 (211/255)

# 211

10장, 군단의 심장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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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일 오후인데도 거리를 채운 사람들이 보였다.

인파로 북적이는 정도는 아니지만, 요일과 시간대를 고려하면 적지 않은 숫자다.

외국인 70% 내국인 30%로 비율도 딱 적당했다.

김포 한강 신도시 인근에 들어선 K-메디컬 타운은 입주 초기부터 순항하고 있었다.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한국관광청이 외국 관광객 모시기에 나섰고, 9시 뉴스 클로징에 광고를 하는 등 홍보에도 열을 올렸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오후 진료를 일찍 정리하고 K-메디컬 타운을 찾은 한지호의 안색이 밝았다.

생각보다 빨리 입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원화 정의 한의원은 K-메디컬 타운에 입주한 유일한 한방 의료기관이다.

따라서 타운이 유명해지면 질수록 유니크한 포지션에서 특수를 누릴 수밖에 없었다.

“날씨가 추운데 이 정도면 대박이지. 봄이 되면 장난 아니겠어.”

한지호가 흐뭇한 얼굴로 혼잣말을 읊조렸다.

K-메디컬 타운은 연초에 문을 열었다.

1월과 2월은 일 년 중에서 가장 추운 시즌이다.

그렇기에 날이 풀리면서 홍보 효과의 결실을 거둘 때가 되면 사람들이 훨씬 많아질 것 같았다.

희망적인 전망을 몸소 느낀 한지호는 원화 정의 한의원을 찾지 않았다.

그곳에서 환자들을 맞이하고 있는 신입 한의원들은 한지호의 예고 없는 방문을 부담스러워 할지 모른다.

대신 그는 맞은편에 있는 5층짜리 빌딩 입구로 들어갔다.

K-메디컬 타운을 찾은 일반 환자들은 들어갈 수 없는 곳, 원화 아카데미가 한지호의 목적지였다.

지이잉-

자동문이 좌우로 열렸다.

다소 휑한 느낌이 감도는 로비에는 정장을 입은 HJ 에스코트 직원들이 서있었다.

그들은 티 나지 않게 한지호를 스캔했다.

순식간에 상대를 파악하고, 한지호인 것을 확인한 다음 고개를 숙였다.

한지호는 경비 직원들을 지나쳐 지문 인식기를 통과했다.

지문 다음은 금속 탐지기 차례였다.

스스로 만든 절차이기 때문에 입구를 통과하는 번거로운 과정이 낯설지 않았다.

삼엄한 보안 시스템을 무사히 통과한 한지호는 잠깐 멈춰서 1층 안쪽을 둘러봤다.

원화 아카데미 1층은 직원들을 위한 휴식 공간으로 꾸며 놓았다.

바리스타가 상주하는 직원 전용 북카페가 있고, 식당도 연결 돼 있었다.

맞은편 건물인 원화 정의 한의원에서 근무하는 인원도 식사를 할 때는 원화 아카데미 1층으로 온다.

하지만 원화 정의 한의원 사람들이 발급 받은 카드로는 2층 이상으로 올라갈 수 없다.

원화 아카데미의 엘리베이터는 마치 고급 호텔처럼 카드를 인식시켜야 작동한다.

연구실과 자료 보관실이 있는 2층부터는 소수의 인원만 출입할 수 있는 것이다.

띠딩-

1층을 둘러본 한지호가 엘리베이터에 탔다.

미리 알리지 않고 K-메디컬 타운에 온 그는 원화 아카데미를 두루두루 시찰 할 생각이었다.

직원들을 감시하는 의미에서 기습 방문을 한 것은 아니다.

다만 평소 원화 아카데미가 돌아가는 모습을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또한 자신이 온다고 알려서 직원들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엘리베이터는 2층에서 멈췄다.

2층은 한의학 자료들을 검토하고 정리하는 기록실이다.

고대 중국과 한반도에서 쓰여진 다양한 의학 저서를 복원하고, 현대 한의학의 상리에 맞는 내용은 따로 기록해둔다.

지금의 상식과 어긋나는 내용은 과감하게 생략한다.

뿐만 아니라 세계 각 국의 의료기관에서 이뤄진 동양의학 연구 결과를 수집해서 번역하는 일도 빼놓을 수 없다.

삼칠근을 이용한 동물 실험 결과 등 체계적으로 정리할 내용이 적지 않았다.

특히 최근에는 텍사스의 MD 엔더슨 센터와 존스 홉킨스 의대 등 유수의 의료기관에서 동양의학을 연구하고 있기에 해외 논문을 정리하고 번역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2층 기록실 직원들은 각자의 작업에 무섭게 집중하고 있었다.

한지호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렸지만 고개를 돌리는 사람이 없었다.

천성이 학자이자 연구자인 사람들만 모았기에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한지호는 방해를 하지 않고 엘리베이터 앞에서 조용히 2층 전체를 주시했다.

대부분의 직원들은 컴퓨터 앞에 앉아 모니터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급하게 키보드를 치는 사람도 있었고, 몇몇은 필기가 편한지 종이로 뭔가를 적는 중이었다.

2층 구석에 놓인 넓은 책상에는 두툼한 전문 서적을 읽고 있는 직원들도 보였다.

모습은 달라도 저마다 각자의 역할에 충실하게 몰입하고 있는 것만은 확실했다.

2층 기록실에서 근무하는 정직원만 10명 가까이 된다.

많은 숫자이고, 그만큼 인건비가 나가야 하지만 한지호는 돈을 아까워하지 않았다.

한의학을 체계적인 학문으로 세우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작업이 바로 방대한 자료를 기록하고 정리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기록실의 직원들 덕분에 다음 세대의 한의사들은 보다 정확한 연구 자료의 토대 위에서 공부를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한의학을 그저 사이비 민간요법이라 여기는 사람들도 원화 아카데미 기록실이 조용히 시킬 터였다.

딩동!

흡족한 얼굴로 2층을 돌아본 한지호가 엘리베이터 문을 열었다.

그제야 뒤늦게 인기척을 느낀 기록실 직원들 몇 명이 한지호를 쳐다봤다.

한지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하려는 직원들을 손짓으로 만류했다.

곧바로 엘리베이터에 탄 그는 곧장 3층으로 올라갔다.

3층은 약재 연구실이다.

각종 한약재와 의료 제품이 언제든 실험에 쓰일 수 있게끔 보관이 돼 있는 곳이다.

단순한 창고가 아니라 실제로 약재의 성분 분석 등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한지호가 3층에 내리자 약재 연구실의 직원들이 고개를 돌렸다.

“원장님!”

“오셨습니까, 원장님.”

예고 없는 방문이었기에 놀랄 법도 하지만 다들 자연스럽게 인사를 했다.

따지고 보면 한지호가 굳이 예고를 하고 원화 아카데미에 방문할 이유는 없었다.

평상시에는 역삼동의 서울 원화 한의원에서 진료를 하지만, 원화 아카데미의 최종 관리자 역시 한지호이기 때문이다.

이곳에 상주 할 수는 없지만, 언제 어느때고 방문해서 일을 보는 것은 한지호의 당연한 권리이자 의무다.

한지호는 걸음을 옮겨 3층 중앙으로 향했다.

“나 신경쓰지 말고 하던 일들 하세요. 방해가 되면 미안해서 자주 못 오니까.”

“알겠습니다, 원장님!”

약재 연구실의 실장이 씩씩하게 대답을 했다.

원화 아카데미에는 각 층마다 책임 연구원에 해당되는 실장들이 있다.

한지호는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이고는 3층을 천천히 돌아봤다.

약재 연구실 직원들의 수는 2층 기록실보다 적었다.

하지만 대체로 3층의 직원들이 조금 더 높은 연봉을 받는다.

기록실 직원들도 대부분 석박사 학위 소지자지만, 3층과 4층의 직원들은 실제 연구와 실험에 투입되는 현장 인력이기 때문이다.

약재 연구실에는 한의학 전문가 두 명과 Y대 의대 출신의 현대의학 연구자 두 명, 그리고 미한약품의 연구자들이 교대로 근무를 한다.

원화 아카데미가 문을 연지 얼마 안 됐지만 체계가 탄탄하게 잡혀 있었다.

한지호 혼자서 원화 아카데미를 운영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제약 업계에서 엄청난 노하우를 가진 신영준 회장과 Y대 암센터를 책임지는 최규열 센터장이 물심양면으로 한지호를 돕고 있다.

물론 그들도 원화 아카데미의 핵심 주주이니 어떻게 보면 자기 일을 하는 셈이다.

그렇기에 초기부터 잘 짜여진 시스템대로 운영이 가능한 것이었다.

“구하기 힘들거나 필요한 것들 있으면 망설이지 말고 보고 올려요. 웬만하면 하루 안에 결제를 할 테니까.”

“네, 원장님. 감사합니다.”

“그럼 수고들 하세요.”

한지호는 약재 연구실의 실장과 직원들을 격려하고 엘리베이터에 탔다.

이번에도 그는 한 층을 올라가 4층에서 내렸다.

4층은 신약 개발실이다.

2층과 3층에서 자료를 모으고 연구한 것을 토대로 본격적인 개발을 하는 장소다.

수없는 실패와 좌절, 그리고 또 다시 일어나 개발을 하는 과정을 견뎌내야 하는 곳이기도 하다.

미한약품에서 신약 개발 경험이 있는 일류 연구자들이 4층의 중심을 잡고 있다.

한지호를 비롯한 원화 정의 네트워크의 원장들과 Y대 의대의 의료진도 종종 4층에 들러 의견을 나눈다.

“앗, 원장님 오셨습니까.”

중앙의 원탁에 앉아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신약 개발실장이 한지호에게 고개를 숙였다.

4층에서 내린 한지호는 그와 인사를 나누고 다른 직원들을 쳐다봤다.

실장을 제외한 연구자들은 금방이라도 컴퓨터 안으로 빨려들어갈 것 같았다.

한지호가 실장과 대화를 나누는데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2층 기록실 직원들이 한지호의 인기척을 느끼지 못한 것과는 다르다.

4층 개발실 연구자들은 한지호가 온 것을 알았지만, 그가 먼저 말을 걸기 전까지는 자신들의 작업에 열중할 따름이다.

귄위적인 사람이라면 불쾌함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한지호는 눈앞의 과제를 가장 중시하는 연구자들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신영준 회장이 직접 관리하고 훈련시킨 인재들이다.

연구자들의 이글거리는 몰입도를 보니 미한약품이 수조 원 가치의 신약개발에 성공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방해가 된 건 아니죠? 다들 열심히군요.”

“원장님께서 주신 아이디어, 마황의 주성분을 이용한 신약 개발 로직을 짜고 있습니다. 저도 에페드린과 슈도에페드린의 부작용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이 없을지 고민 중이었습니다.”

개발실장이 진지한 얼굴로 최근의 연구 과제를 이야기했다.

이러한 고민과 실험은 언뜻 쓸모 없어 보일지 모른다.

막대한 비용을 투자한 입장에서는 조바심이 날 수도 있다.

하지만 신약 개발과 의학 연구는 당장의 결과물에 초점을 맞추는 일이 아니다.

보다 긴 호흡으로 미래를 바라보며 접근해야 하는 대규모 프로젝트다.

설령 원화 아카데미에 투자한 2000억 원이 고갈 되어도 상관없다.

개발 과정에서 약간의 성과라도 보이면 글로벌 제약회사들이 앞장서서 투자를 하려고 들 것이다.

한지호는 조급한 마음 따위 저 깊이 묻어두고 팔짱을 꼈다.

개발실장의 고민에 약간이라도 도움을 주고 싶었다.

“마황을 통해 신약 개발을 해보자는 아이디어를 떠올렸을 때… 교감 신경을 자극시키는 효능만 약화시킬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기관지 근육 이완이나 이뇨작용 활성화 같은 경우 무궁무진하게 응용이 가능하지 않습니까. 1차 관건은 약품 배합으로 교감 신경 자극 효과를 줄이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다양한 배합 실험을 해보려면 시간이 꽤 걸리겠지만, 말씀해주신 부분을 중점적으로 연구해보겠습니다.”

대답을 들은 한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원화 아카데미의 구성원들이 마음에 들었다.

아직 서로 얼굴을 익힌지 얼마 안 됐지만, 각 분야에서 전문성을 갖춘 인재들을 한 공간에 모았다는 게 뿌듯하기 그지없었다.

게다가 인성 측면에서도 흠 잡을 구석이 없어 보였다.

한지호의 명성이 아무리 대단해도 혼자서는 모을 수 없는 인재들이다.

역시 신영준 회장과 최규열 센터장의 공이 컸다.

세 사람의 의기투합은 시작부터 상상 이상의 시너지 효과를 내고 있었다.

신약 개발실장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한지호는 오래지않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는 원화 아카데미의 마지막 층인 5층으로 올라갔다.

5층은 기획 전략실이다.

평소에는 비워두지만 기록실과 연구실, 개발실 사람들이 모여서 회의를 할 때 주로 사용한다.

이따금 한지호와 원화 정의 네트워크 소속 원장들, 그리고 신영준 회장이나 최규열 센터장 등 수뇌부 인사들이 회동을 하는 장소도 5층이다.

원화 아카데미의 행보를 결정하는 굵직한 회의가 이뤄지는 장소인 것이다.

처억-

5층에 올라선 한지호는 자신의 명패가 놓인 책상에 앉았다.

대표원장 한지호.

원화 정의 네트워크의 모든 것을 대표하는 사람이 바로 한지호다.

원화 아카데미 역시 네트워크 소속 기관이기에 다르지 않다.

1층을 시작으로 2층 기록실, 3층 약재 연구실, 4층 신약 개발실까지 두루 돌아본 한지호는 심호흡을 했다.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서는 몇 번이고 깊은 숨을 들이마셔야 할 것 같았다.

내색은 안 했지만 원화 아카데미에서 새로운 역사가 꿈틀거리는 확신을 얻었다.

이곳에서 만들어진 연구 성과가 반드시 세상을 바꾸는데 기여할 것이다.

자신의 손으로 만든 거대한 군함(軍艦), 원화 아카데미의 꼭대기에서 한지호는 남몰래 전율하고 있었다.

아직 도래하지 않은 역사가 그의 눈에는 보이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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