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남화타-212화 (212/255)

# 212

1장,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쏴라 (1)

새해가 되면 두 가지 상반된 감정이 들기 마련이다.

벌써 또 1년이 지나갔다는 아쉬움, 그리고 올해는 더욱 알차게 보내겠다는 다짐이다.

하지만 한지호는 달랐다.

그는 지나간 한 해에 아쉬움을 느끼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쉬움을 느낄 여지가 없었다.

모두가 무모하다고 말렸던 홍콩 진출에 성공했고, 추위안차오와 금링링을 치료하며 일약 대륙의 의성으로 떠올랐다.

그뿐만 아니라 헐리우드의 거장 헨리오 무크도 치료해서 복귀를 시켰다.

세계 영화계에 크나큰 선물을 안겨준 셈이다.

그로 인해 영국 왕실의 초청을 받아 토니 왕자의 애매 라인하르트를 고쳐주기도 했다.

한국을 넘어 중국과 헐리우드, 영국까지 그야말로 종횡무진 의술을 펼쳤던 1년이다.

거대한 국책 사업인 K-메디컬 타운에도 성공적으로 입주했고, 여러 명의 신입 한의사들이 원화 정의 한의원과 함께 성장하고 있다.

인류의 미래를 바꾸기 위한 프로젝트인 원화 아카데미도 원활하게 돌아가는 중이다.

고작 1년, 길다면 길지만 짧다면 무척 짧은 365일 동안 이 모든 일을 해냈으니 아쉬움이란 감정이 파고들 틈이 없는 게 당연했다.

대신 올해를 더욱 알차게 보내겠다는 다짐은 한지호도 똑같이 하고 있었다.

손색없이 훌륭한 작년을 보냈지만, 올해는 그보다 더 많은 것을 이루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절대 만족하지 않는 태도, 언제나 배가 고프다는 게 한지호의 가장 무서운 점이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진즉 성공에 만족하고 현실에 안주했을 것이다.

수중에 돈이 들어오면 누구나 나태해지기 쉽다.

처음의 원대한 꿈은 사라지고, 적당히 돈을 벌며 인생을 즐기고픈 유혹에 흔들린다.

그래서 다들 초심을 잊지 않는 게 목숨을 지키는 것보다 힘들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한지호는 초심을 저버리지 않았다.

사실 초심을 지키는 정도가 아니라 계속해서 확장해가고 있었다.

이룬 게 많아질수록 더더욱 큰 야망을 새로 업데이트하며 자신을 채찍질 하니 말이다.

“시간은 참 빠르단 말야.”

한지호는 책상 위에 놓인 달력을 보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남들보다 2배, 3배는 바쁘게 살아가지만 그에게도 시간은 똑같이 흐른다.

어쩌면 바쁜 만큼 시간이 더 빨리 흐르는 것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홍콩 리펄스 베이의 원화 한의원에서 진료를 마친 한지호는 망중한(忙中閑)을 즐기고 있었다.

다음 환자의 예약까지 20분 정도가 남았다.

이제는 홍콩에서도 한지호에게 직접 진료를 받으려면 원장 특진을 신청해야 한다.

그의 인지도가 한국과 다를 바 없이 높아졌기에 미리 원장 특진을 예약하는 환자도 늘어났다.

대신 일반 진료를 보는 바이룽 부원장이 더 바빠졌다.

한지호는 바이룽을 위해 또 다른 현지 한의사를 붙여줄 생각이었다.

홍콩에서 한의사를 구하는 게 여의치 않으면 한국에서 데려올 계획도 있었다.

K-메디컬 타운의 원화 정의 한의원에서 일하는 신입 한의사 중에서 홍콩 현지 근무를 욕심내는 사람이 분명 있을 것이다.

똑똑-

그때였다.

누군가 원장실 겸 진료실의 문을 두드렸다.

분명 다음 환자가 올 때까지 시간이 남았다.

한지호는 자세를 고치며 영어로 말했다.

“들어오세요.”

“원장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바이룽이었다.

마침 바이룽도 진료 중에 잠시 여유가 생긴 모양이다.

한지호는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끄덕였다.

“앉아요.”

“네, 다름 아니라 안내 직원이 전화를 받았는데 예사롭지 않은 내용이라서 제가 체크를 했습니다.”

대충 어떤 상황인지 이해가 됐다.

안내 직원이 걸려온 전화를 받았고, 중요한 이야기라서 부원장인 바이룽에게 통화를 넘긴 것이다.

그리고 바이룽은 한지호에게 보고를 해야 할 사안이라 생각해서 바로 원장실 문을 두드렸다.

진료 시간 도중에 따로 말을 하러 올 정도면 보통 일은 아닌 게 분명하다.

한지호는 기대와 우려가 교차되는 심정이었다.

“어떤 전화였습니까?”

“미국의 스포츠 에이전시에서 걸려온 전화였습니다. 원장님과 통화를 하고 싶으니 24시간 언제든 연락을 부탁했습니다. 확인을 해봐야겠지만 장난 전화 같지는 않았습니다, 원장님.”

“스포츠 에이전시라면 운동 선수들의 소속사 말하는 거죠?”

“네. 자신을 전설적인 권투 선수 모샤드 일라이의 에이전시 직원이라고 했습니다.”

모샤드 일라이.

권투에 문외한인 한지호도 익숙한 이름이다.

스포츠 경기와는 담을 쌓은 것처럼 보이는 바이룽 역시 그 이름을 자연스레 읊었다.

단순히 한 명의 권투선수가 아니라 세계 스포츠 역사에 획을 그은 전설적인 스타가 바로 모샤드 일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모샤드 일라이는 중병과 노환이 겹쳐 힘겨운 시기를 보낸다고 알려져있다.

여전히 움직일 때마다 국빈 대우를 받는 세계적인 VIP지만, 세월의 흐름은 거스를 수 없는 법이다.

한지호는 잠깐 생각을 정리한 다음 바이룽에게 지시를 내렸다.

“에이전시가 맞는지 크로스 체크를 한 번 더 하고나서 나한테 연락처를 줘요. 무슨 용건인지 들어나 보겠습니다.”

“네, 원장님. 확실하게 체크 해보고 다시 보고드리겠습니다.”

바이룽이 인사를 하고 원장실 밖으로 나갔다.

그도 한창 환자들을 보는 시간대이기 때문에 여유가 많지 않아 보였다.

잠깐 휴식을 취했던 한지호도 곧 다음 환자를 맞이할 준비를 해야 했다.

갑작스러운 연락이 마음을 들뜨게 했지만, 미리 설레발을 칠 필요는 없다.

아마 가짜 에이전시는 아닐 것 같았다.

굳이 모샤드 일라이의 에이전시를 사칭해가며 접근해 올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서울이 아닌 홍콩의 원화 한의원으로 전화가 온 것도 이해가 됐다.

서구사회에서는 아직도 홍콩을 아시아의 중심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서울과 도쿄가 여러모로 이름을 날리고 있지만, 가장 국제적인 아시아 도시는 여전히 홍콩이다.

“치료를 부탁할 확률이 높은데, 모샤드 일라이를 만나게 되는 건가?”

한지호는 살짝 기대가 되는 듯 혼잣말을 되뇌이며 다음 환자의 차트를 살펴봤다.

예전에는 기회를 찾아다녀야 했지만, 거물이 된 지금은 가만히 앉아있어도 기회가 그를 찾아온다.

이제는 세상이 한지호를 가만두지 않을 것 같았다.

+++

번갯불에 콩 구워먹는다는 말이 있다.

엄청 급하게 일이 진행될 때 주로 쓰는 옛말이다.

자신을 모샤드 일라이의 에이전시 소속 매니저라 밝힌 사람은 그야말로 번갯불에 콩을 구워먹었다.

한지호와의 통화에서도 정확한 용건은 말해주지 않고, 그저 꼭 만나서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원래 유명인이나 국제적인 VIP들은 전화로 건강 상의 문제점을 밝히지 않는다.

괜히 소문이 잘못 나면 큰 피해를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샤드 일라이의 병은 이미 알려질대로 알려져 있었다.

권투 후유증으로 뇌 기능 장애가 찾아왔고, 노환과 파킨슨 병이 겹쳐서 힘든 시간을 보낸다는 기사가 처음 보도 된 것도 벌써 몇 년 전의 일이다.

그 외에 다른 질병을 얻은 게 아니라면 굳이 비밀을 지키려 애쓸 필요가 없다.

“또 다른 합병증이라도 발생한 건 아니겠지.”

한지호는 약속 장소에서 가능한 여러 시나리오를 생각하고 있었다.

어제 통화를 마치자마자 모샤드 일라이의 에이전시 매니저가 홍콩 행 비행기를 탔다.

하루만에 홍콩으로 와서 한지호를 만나려는 걸 보니 가벼운 용건은 아닌 게 확실했다.

홍콩의 밤은 늘 화려하지만, 한지호는 비교적 조용한 장소를 골랐다.

헨리오 무크를 치료할 때도 자주 이용했던 리츠 칼튼 호텔이었다.

홍콩의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리츠 칼튼의 객실은 미팅을 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너무 비싸다는 단점이 있지만, 비용은 크게 문제 되지 않는다.

그보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쾌적한 분위기에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장소라는 게 더 중요했다.

삐빅-

소파에 앉아있던 한지호의 귓가로 기계음이 들렸다.

홍콩 리츠 칼튼에 도착한 매니저가 카드 키로 문을 여는 소리였다.

한지호는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이어 캐리어를 끌고 들어오는 여성이 보였다.

늘씬한 몸매를 자랑하려는 듯 딱 달라붙는 오피스룩을 입은 장신의 여성.

라틴 혼혈인 듯 갈색 피부와 긴 생머리가 더 없이 매력적으로 보였다.

그녀가 한지호를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닥터 한?”

“맞습니다.”

“아!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I.A.C의 매니저 리오 메이맥이에요.”

리오가 자신의 명함을 꺼내서 한지호에게 건넸다.

한지호는 그녀를 만나기 전 간단한 사전조사를 마쳤다.

I.A.C는 세계적인 스포츠 에이전시다.

축구, 야구, 농구, 테니스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거물 스타들을 고객으로 보유하고 있다.

권투의 전설인 모샤드 일라이만 데리고 있는 회사가 아니었다.

명함을 품에 넣은 한지호는 다시 한 번 천천히 리오 메이맥을 쳐다봤다.

장거리 비행을 마치고 바로 와서 피곤한 기색이 엿보였지만, 길거리에서 보면 누구든 눈을 돌릴 만큼 매력적인 여성이다.

라틴계 특유의 건강하고 섹시한 느낌이 철철 흘러 넘쳤다.

“많이 기다리셨어요?”

“아닙니다. 방금 도착했습니다.”

“후우-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잠시 화장실에 들러도 될까요?”

“물론이죠.”

양해를 구한 리오가 화장실로 들어갔다.

연락을 받은 것도, 홍콩에서 만나게 된 것도 후다닥 진행된 일이다.

설마 미국에서 곧장 비행기를 타고 홍콩으로 올 줄은 몰랐다.

리오 메이맥은 10시간이 넘는 비행을 마치고 쉬지도 못했을 테니 정신이 없을 것이다.

한지호는 미니 바(mini bar)에서 음료 두 캔을 꺼내 테이블에 놓았다. 그리고는 소파에 앉아 그녀가 화장실에서 나오기를 기다렸다.

“죄송해요. 첫 만남인데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드리고.”

화장실에서 나온 리오는 화장을 완벽하게 고쳤다.

원래도 뚜렷한 이목구비가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한지호는 맞은편에 앉은 그녀에게 미리 꺼내둔 음료수를 권했다.

“레드불입니다. 시차 적응에 도움이 될지 해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고마워요. 우선 정신을 차리고 미팅에 집중하는데는 도움이 될 것 같네요.”

리오가 눈을 찡긋거리며 레드불을 마셨다.

흔히 생각하는 라틴계 여자들답게 성격도 털털한 것 같았다.

이성으로서 만난 건 아니지만 매력이 넘치는 사람은 확실하다.

“바쁘신 분인데 시간을 많이 뺏을 수는 없으니까요. 본론부터 말씀을 드리는 게 낫겠죠?”

레드불을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은 그녀가 입술을 달싹였다.

한지호는 무표정한 얼굴로 리오를 쳐다봤다.

잠깐 침묵으로 쉼표를 찍은 그가 입을 열었다.

“모샤드 일라이 때문에 연락을 했다고 밝혔고, 이렇게 급하게 홍콩으로 온 걸 보면 아마 그의 건강에 문제가 생긴 거겠죠. 외부에 알려진 것 이상으로 사태가 안 좋아져서 나를 찾아온 것 아닙니까?”

예리한 추측이었다.

물론 조금만 깊게 생각해보면 충분히 알 수 있는 사실이기도 하다.

한지호의 말에 리오는 지체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일반적인 치료 방법으로는 불가능한 일을 부탁드리기 위해 닥터 한을 찾아왔어요. 헨리오 무크를 치료해서 영화계에 복귀시킨 것, 그리고 영국 왕실의 인장을 받은 것이 아주 큰 참고가 되었죠.”

“이제 얼굴을 마주했으니 카드를 다 오픈합시다. 그래야 나도 치료가 가능할지 빨리 판단을 내릴 수 있습니다.”

“사실은… 치료를 부탁드린다고 말해야 할지 난감한 문제에요. 아시다시피 모샤드 일라이는 중증의 파킨슨 병을 앓고 있어요. 그러던 중 최근 병세가 악화됐고, 주치의는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말을 했어요. 가족들은 마지막으로 모샤드 일라이와 대화를 나누길 원해요. 맑은 정신으로 남기는 유언을 듣고 싶은 거죠. 돈은 얼마가 들어도 상관없으니 가능한 방법을 찾아달라고 에이전시인 우리에게 부탁을 했어요. 그래서 급하게 닥터 한을 찾아오게 됐어요.”

설명을 들은 한지호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찡그렸다.

노환과 중병으로 얼마 안 가서 죽을 거라는 소견을 받은 전설적인 영웅을 치료하라는 이야기다.

엄밀히 말하면 치료를 원하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파킨슨 병 증상을 잠시라도 사라지게 만드는 건 현대의학으로도 불가능하다.

잘 될 가능성은 낮고, 잘 못 되면 엄청난 후폭풍에 휩쓸릴지 모를 일이었다.

“힘들까요?”

리오 메이맥이 조심스레 한지호의 의중을 물어봤다.

너무도 어려운 제안을 들고 나타난 라틴 미녀가 마녀로 보이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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