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남화타-205화 (205/255)

# 205

7장, 약침(藥鍼) (2)

목 아래에서 단전까지 혈도를 따라 직선으로 침을 놓는데 15분 가량이 소요됐다.

평균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걸린 것이다.

그만큼 약침 하나하나를 정성들여 꽂았다.

삼칠근 이파리를 이용해 코팅 한 약침은 은은한 초록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한지호는 한 발짝 물러서서 고해진을 내려다봤다.

눈을 꼭 감고 누워있는 그의 상체에 초록색 침이 일렬로 꽂혀있었다.

고해진의 몸 다른 부위에 붙어있던 의료기구는 잠시 빼놓았다.

재수술 경과가 좋았고, 바이탈도 안정적이었기에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만약 한지호의 치료로 상태가 악화되면 김진언 교수가 바로 조치를 취할 것이다.

지금 고해진의 몸에 붙어있는 것은 영양제 주입을 위한 링겔과 호흡 보조기, 그리고 녹색으로 물든 약침이 전부였다.

“일단은 괜찮아. 잘 가고 있어.”

한지호는 혼잣말을 읊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사히 첫 번째 종류의 약침을 다 놓았다.

고해진의 신체 반응도 이전과 다르지 않았다.

아직 약침의 효과가 발현되기 전이지만, 적어도 급격한 부작용이나 거부 반응은 없었다.

이제 침술의 효능이 전신에 퍼질 때까지 기다린 다음 약물자입기를 이용한 다른 종류의 약침을 놓으면 된다.

한지호는 손목 시계를 확인했다.

일각, 15분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두 번째 약침을 심장 부위에 집중적으로 놓을 것이다.

그는 뚜벅뚜벅 병실을 가로질러 문을 열었다.

드르륵-

닫혀있던 병실 문이 열리니 복도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벌써 치료가 끝났을 리는 없고, 혹시 문제라도 생긴 것인지 걱정들을 했다.

“한 원장님, 혹시…?”

남궁훈이 먼저 입을 열었다.

한지호는 고개를 저으며 남궁훈 대신 김진언 교수를 쳐다봤다.

“아직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만, 지금부터는 김 교수님이 병실 안에서 자리를 지켜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약물자입기로 약액을 주입하는 과정에서 고해진 씨의 몸이 이상 반응을 보일 수도 있으니까요.”

“알겠습니다.”

김진언은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 어린 한지호에게 깍듯한 태도를 취하는 것도 그대로였다.

듣기로 세상 일이나 대학 병원 내부 정치에 관심이 없는 외골수 의사라고 한다.

그렇기에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 고해진의 주치의로 배정을 받은 것이다.

“너무 걱정하지 말고 기다리세요. 경과를 확인하려면 시간이 좀 더 걸릴 것 같습니다.”

한지호는 고해진의 아내와 남궁훈을 안심시키고 다시 병실 문을 닫았다.

침을 놓을 때 200% 집중하기 위해서는 외부의 소음이나 방해를 차단해야 한다.

위급 상황을 대비해 김진언 교수를 병실 안에 데려온 것으로 조치는 충분했다.

김진언 교수는 병상과 약간 거리를 두고 서있었다.

그곳에 무생물처럼 위치하며 고해진의 상태를 체크하려는 것이다.

한지호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자기 역할이 무엇인지 딱 알아챈 모습이다.

사소하지만 빈틈 없는 자세를 보니 과연 S대 병원 교수다웠다.

한지호는 한 번 더 시계를 본 뒤 약물자입기가 달린 침을 준비했다.

약물자입기 안에는 푹 우려낸 삼칠근의 정수가 담겨있다.

아주 작은 양의 삼칠근 약액(藥液)을 각각의 자입기 안에 넣었다.

고해진의 혈도에 침을 꽂으면 자입기 속 약액이 몸 안으로 들어간다.

약물의 기운을 직접 주입하는 아주 강력한 방법이다.

다만 효과적인 만큼 위험성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침을 놓는 위치가 어긋나거나 몸에 직접 들어간 약 기운이 너무 강하게 발현되면 부작용이 나타날지 모른다.

특히 다른 곳도 아니고 심장 주위에 약침을 놓을 예정인 한지호로서는 긴장이 되는 게 당연했다.

째깍, 째깍-

한지호가 마음을 다스리며 두 번째 종류의 약침을 꺼내는 동안 시간이 흘렀다.

처음 놓은 약침의 효력이 발휘 될 15분이 지나간 것이다.

그는 먼저 꽂았던 약침을 뽑지 않았다.

일각 이후에도 계속해서 삼칠근의 약 기운이 고해진의 혈도를 자극하도록 내버려 뒀다.

이 상태에서 약물자입기가 달린 두 번째 약침을 놓으려는 것이다.

‘사람이 최선을 다하면… 나머지는 하늘이 돕겠지.’

한지호는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는 오래된 격언을 떠올리며 팔을 들었다.

그는 고해진의 심장이 뛰고 있을 부위를 응시했다.

노려본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사람의 심장은 왼쪽 가슴에 있다고 알려졌지만, 사실은 거의 중간에 위치해있다.

정확히 말하면 중간보다 아주 살짝 왼쪽에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바로 그곳에 생명의 근본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전통 의학, 그리고 고대의 무공에서는 인체의 세 부위를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두뇌, 심장, 아랫배다.

각각 상단전, 중단전, 하단전이라 불리는 세 부위가 인간의 몸을 관장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상단전에 해당하는 두뇌는 전신사지(全身四肢)의 움직임을 다스린다.

하단전으로 불리는 아랫배는 기(氣)를 담는 그릇이다.

마지막으로 중단전인 심장은 생명을 담당한다.

두뇌에 문제가 생기면 사지가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아랫배가 깨지면 기의 순환이 헝클어지고 온갖 질병이 몸을 노린다.

그러나 심장이 멈추면 생명을 잃게 된다.

가장 위험하면서도 중요한 부위가 중단전 심장이라는 것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는 사실이다.

그만큼 심장 부위를 건드리는 것은 의사에게 크나큰 도전이다.

한의사에게도 다를 바 없다.

다른 혈도에 침을 잘 못 놓았을 때 발생하는 부작용이 일(一)이라면 심장에 침을 잘 못 놓았을 때는 십(十) 이상의 부작용이 터질지 모른다.

삼국지 시대를 수놓으며 의성으로 불렸던 규호의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한지호도 바싹 마른 입술을 침으로 적셨다.

꾸욱-

그의 손이 고해진의 심장으로 향했다.

심장 바로 윗 부분의 혈도에 약침이 꽂혔다.

침이 피부를 뚫고 살갗 안으로 들어가는 감각이 손끝으로 생생하게 전달됐다.

조금이라도 더 깊이 들어가면 고해진이 위험해진다.

반면 조금만 얕아도 침이 효능을 다하지 못한다.

아주 미세한 감각에 의지해 정확한 위치까지만 침을 꽂는 기술이 필요하다.

외과의사가 수술을 할 때 메스를 다루는 것처럼 정교한 컨트롤이 요구되는 시침(施鍼)이었다.

‘여기까지!’

한지호의 눈에서 빛이 반짝였다.

딱 알맞은 깊이에서 손을 멈춘 그가 손가락으로 약침의 끝부분을 두드렸다.

톡!

약물자입기를 살짝 누르면 담겨있던 약액이 침을 따라 몸 안으로 들어간다.

주사를 놓는 것과 비슷한 원리다.

솨악-

약액이 주입되는 소리가 들렸다.

원래 인간의 귀로는 들을 수 없는 소리다.

그러나 오금희를 익혀 초월적 감각을 얻은 한지호의 귀에는 약액이 퍼지는 소리가 분명하게 들렸다.

‘문제가…… 없다.’

한지호는 잠깐 틈을 두고 고해진을 체크했다.

잘못된 혈도에 약액을 투입했다면 당장 거부 반응이 일어나야 한다.

심장 부위에 침을 놓고 있기 때문에 거부 반응은 무척 격렬할 것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고해진의 상태는 그대로였다.

한지호는 고개를 돌려 김진언 교수를 쳐다봤다.

누구보다 면밀하게 고해진을 살펴보고 있던 김진언 교수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가 없어 보이니 계속해도 좋다는 신호였다.

크로스 체크를 마치니 마음이 훨씬 편해졌다.

한지호는 처음보다 더 자신있게 두 번째 약물자입기 침을 손에 쥐었다.

그는 길게 망설이지 않고 침을 놓았다.

시침의 순간에는 잡생각이 끼어들게 놔두면 안 된다.

오직 침과 환자의 혈도가 맞닿는 지점만 생각하며 머리를 가득 채워야 하는 법이다.

꾸우욱- 톡!

또 다시 원하는 깊이에 침을 꽂고, 손가락으로 약물자입기를 건드렸다.

이번에도 삼칠근의 정수가 담긴 약액이 무리없이 고해진에게 주입됐다.

한지호는 약침을 하나씩 놓을 때마다 자신감이 커지는 기분이었다.

한 번 탄력을 받으니 거침이 없어졌다.

고해진의 심장을 둘러싼 혈도에 꽂히는 약침의 개수가 늘어났다.

한지호는 영감을 받은 작가가 일필휘지로 글을 쓰는 것처럼 연달아 약침을 놓았다.

고요하지만 폭풍 같은 치료의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

약침을 다 놓은지 벌써 한 시간이 넘게 흘렀다.

한지호는 고해진의 몸에 꽂았던 침들을 조심스레 회수했다.

중요한 혈도를 침으로 자극했고, 삼칠근의 약 기운으로 원활하게 전달이 된 것 같다.

이제 약 기운이 고해진의 전신으로 퍼지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김진언 교수는 다시 의료 장치를 부착했고, 바이탈을 비롯한 모든 수치는 정상으로 나왔다.

한지호의 약침 치료가 적어도 부작용을 불러 일으키진 않은 것이다.

하지만 부작용이 없다는 것으로 만족할 순 없었다.

눈에 보이는 효과가 나타나야만 한다.

한지호는 최선을 다했고, 하늘이 돕기를 기다리며 보호자와 함께 병실을 지켰다.

병실 안에는 여전히 한지호와 김진언 교수, 그리고 남궁훈과 고해진의 아내만 자리하고 있었다.

간호사들은 꼭 필요할 때만 병실 안으로 들어왔고, 외부인의 출입은 엄격히 통제됐다.

S대 병원 1층 로비에는 여러 언론사에서 나온 기자들이 하이에나처럼 돌아다니고 있지만 문제 될 건 없었다.

조기운이 직접 선별해서 보낸 HJ 에스코트 직원들이 1층을 알게 모르게 장악했다.

아직까지 한지호가 고해진을 치료한다는 소식은 외부로 새어 나가지 않았다.

쓸데없는 소란을 일으키지 않고 고해진의 경과를 지켜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한 원장님, 외람되지만 삼칠근이라는 약재가 어떤 효능을 보이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꽤 오랜 침묵을 뚫고 김진언 교수가 입을 열었다.

약침의 효능이 발휘되기를 기다리는 시간이 지겨워서는 아닐 것이다.

아침부터 의사로서의 궁금증이 컸는데 이제야 어렵게 질문을 한 것 같았다.

남궁훈과 고해진의 와이프도 비슷한 질문을 하고 싶었던 눈치였다.

가장 친한 친구와 하나뿐인 남편에게 주입 된 약의 성분이 무엇인지 궁금한 건 당연한 일이다.

한지호는 이것을 단순한 호기심으로 치부하지 않았다.

협진을 허용해준 김진언 교수에게 보답을 하는 한편, 고해진의 보호자들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알려주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한방에서 삼칠근은 지혈약으로 쓰였습니다. 왕족들만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귀한 약재였고, 왕이 장수에게 하사할 만큼 뛰어난 효능을 자랑했습니다. 현대에 들어서는 주로 협심증과 관상동맥질환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외국에서는 삼칠근의 성분을 분석해 동물 실험을 한 결과도 있죠.”

“동물 실험 결과가 있습니까?”

김진언 교수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동물 실험이나 임상 실험 데이터가 부족하다는 게 늘 한의학의 약점으로 지적 돼 왔다.

그런데 삼칠근은 동물 실험을 거쳤다고 하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한지호는 확신에 찬 어조로 대답했다.

“개의 심장에 삼칠근 추출물을 넣으면 관상동맥으로의 혈류량은 증가하지만 심장근육이 소비하는 산소량은 줄어듭니다. 쉽게 말하면 심장이 더 적은 산소를 쓰면서 더 많은 피를 처리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죠. 삼칠근 성분 덕분에 실험 대상인 개의 심장이 매우 효율적으로 기능했습니다. 임상 실험을 거쳐도 결과가 달라지지 않을 겁니다.”

한지호의 설명을 들은 김진언 교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동물 실험의 구체적 결과가 임상 실험에서 판이하게 달라지는 경우는 흔치 않다.

이처럼 실험 데이터가 있다면 한의학도 현대 의학 못지않게 과학적인 학문으로 인정받기 쉽다.

한지호는 원화 아카데미에서 신약 개발과 동시에 이러한 실험 데이터를 정리해서 한의학을 과학의 영역으로 끌어 올리려는 것이다.

이해하기 쉬운 설명을 들어서인지 남궁훈의 표정도 밝아졌다.

“서, 선생님!”

그런데 고해진의 아내가 눈을 크게 뜨며 손가락을 들었다.

그녀는 자신의 남편을 가리키고 있었다.

한지호와 김진언 교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고개를 홱 돌려 고해진을 쳐다봤다.

툭, 투둑-

놀랍게도 미동 없이 누워있던 고해진의 손가락 끝이 움직이고 있었다.

어둠을 밝히는 기적의 불빛, 희망의 전조가 환하게 살아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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