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남화타-204화 (204/255)

# 204

7장, 약침(藥鍼) (1)

한지호는 바쁘게 움직였다.

그에게 주어진 시간이 길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일주일의 절반 가량은 홍콩에서 보내야 한다.

홍콩 행 비행기를 타기까지 4일이 남았고, 그 안에 가시적인 성과를 보여줄 필요가 있다.

남궁훈과 고해진의 아내를 만나고, 병상에 누워있는 고해진을 진맥한 다음 S대 병원 의료진으로부터 협진 승낙을 얻어낸 건 모두 하루만에 벌어진 일이다.

그것도 홍콩에서 서울로 돌아오자마자 집에도 가지 않고 병원으로 들러서 만들어낸 결과다.

그는 박문원 부원장과 김진언 교수의 허락을 받고 나서도 쉬지 않았다.

시간이 금쪽 같다는 말이 이렇게 와닿을 수 없었다.

혼수상태로 누워있는 시간이 길어지는 것은 악재 중의 악재다.

한지호만 시간이 없는 게 아니라 고해진에게 주어진 시간도 무척 짧았다.

“사장님, 지금 가고 있습니다.”

“알겠네. 나도 백방으로 수소문을 하는 중이라네.”

“일단 만나서 이야기하죠.”

한지호는 엑셀을 밟으며 최치우와 통화를 했다.

명징 약초가 원화 정의 네트워크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온 지도 꽤 됐다.

역삼 M 타워 3층에 새롭게 둥지를 튼 명징 약초는 네트워크 전속 약재상으로 변신을 마쳤다.

팔도 약초꾼 사이에서 큰형님으로 통하는 최치우가 한지호와 한솥밥을 먹게 된 것이다.

한지호는 S대 병원에서 출발하기 전 최치우에게 전화를 해놓았다.

고해진을 치료하는데 삼칠근이 꼭 필요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삼칠근은 당장 구할 수 있는 흔한 약재가 아니었다.

한지호도 박문원 부원장에게 설명을 할 때 삼칠근이 희귀한 약재라고 말한 바 있다.

지금으로선 최치우를 믿는 수밖에 없다.

그는 팔도의 약초꾼들 사이에서 큰 형님으로 신망이 두텁다.

백년이 넘은 천종산삼도, 뱀독을 치료하는데 필요한 사슬도 모두 최치우의 소개로 얻어냈었다.

경동시장에서 최치우를 만나고 인연을 맺은 것은 한지호의 인생에서 손 꼽히는 행운이었다.

고해진을 위해서도 그 행운의 힘이 필요하다.

“최 사장님이라면 구할 수 있겠지. 충분히…….”

한지호는 털보 최치우의 얼굴을 떠올리며 운전대를 꽉 잡았다.

서울 원화 한의원과 명징 약초가 있는 역삼동으로 가는 길, 아까운 시간이 빠르게만 흐르는 것 같았다.

+++

“최 사장님, 어떻게 됐습니까?”

3층 문을 활짝 열어제낀 한지호가 대뜸 질문부터 던졌다.

사실 시간이 늦어 최치우는 진즉 퇴근을 한 상태였다.

1층과 2층 원화 한의원의 불도 꺼져 있었다.

그러나 상황이 워낙 급했기에 호출을 했고, 최치우도 부랴부랴 채비를 해서 역삼동으로 나온 것이다.

“이렇게 급한 모습은 참 오랜만에 보는 것 같네, 한 원장.”

“죄송합니다. 시급을 다투는 일이라서…….”

“커허허허, 내가 누군가? 최치우 아닌가!”

최치우가 수북한 턱수염을 벅벅 긁으며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구하기 어려운 삼칠근을 수배하는데 성공한 모양이다.

한지호는 환호성을 터트리며 오른손을 번쩍 들었다.

“됐다!”

짜악-!

최치우와 하이파이브를 한 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빠른 시간 안에 약재를 구하는 것이 첫 번째 미션이었다.

어렵다면 어려운 미션을 최치우 덕분에 해결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정확히 언제쯤 삼칠근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한 시가 급하다고 신신당부를 하고 또 했네. 돈은 얼마가 들어도 상관 없으니 퀵으로 보내라고 했고, 아마 세 시간 안에 여기로 배송이 올 걸세.”

“최 사장님 지인이 보내는 물건이라면… 퀄리티는 확실하겠죠?”

“알다시피 요즘 삼칠근을 구하는 게 산삼을 구하는 것보다 까다롭지 않은가? 우선은 가지고 있는 걸 다 보내라고 했네만……. 한 번 들여다봐야지.”

갑작스럽게 삼칠근을 구한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다.

그렇기에 약재의 상태에 대해서는 일일이 보증을 하지 못했다.

한지호는 살짝 들떴던 마음을 가라앉혔다.

삼칠근이 도착해도 약효를 내기 힘든 하품(下品)이라면 소용이 없다.

그의 염려가 느껴졌는지 최치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도 내가 오래 알아온 동생놈이 보내온 것이니 변조품은 아닐 것이네. 일단 같이 기다려봄세.”

“네, 그래야죠. 늦은 시간에 고생시켜드려 죄송합니다.”

“고생이라니, 그 무슨 말인가! 한 원장 부탁, 아니 지시라면 당연히 따라야지.”

최치우가 펄쩍 뛰며 손사래를 쳤다.

그는 옛날 사람이라 위계의식에 민감하다.

명징 약초가 공식적으로 원화 정의 네트워크의 울타리 안에 들어오면서 한지호를 윗사람으로 여겼다.

평소에는 나이를 떠나 가깝게 지내는 친구이지만, 일을 처리할 때는 대표 원장의 권위를 100% 인정했다.

사실 늦은 밤에 호출을 받고 나와서 일을 처리해야 하는 상황은 누구든 달갑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최치우는 농담으로도 불평 한 마디를 흘리지 않았다.

“약초는 사장님이 제일 정확하게 감별하시니 끝까지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걱정말게. 그럴 리 없지만 변조품이거나 못 쓸 하품이라면 지리산으로 내려가 동생놈 두 다리를 부러트리겠네!”

한지호와 최치우가 아직 마음을 못 놓는 이유가 있었다.

삼칠근은 위변조품이 무수히 많이 유통되고 있다.

구하기 어렵고 값은 비싸니 업자들이 가짜를 유통시켜 물을 흐리는 것이다.

원래 삼칠근은 한방에서 지혈약(止血藥)으로 분류 돼 있다.

신속하게 피를 멈추게 하는 작용으로 예전부터 널리 알려졌던 약초다.

다만 산삼에 비견될 정도로 귀한 대접을 받아서 주로 왕족들이 애용했다.

전쟁터로 나가는 장수에게 왕이 직접 하사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지혈에 도움을 주는 약초이니 보검(寶劍)을 하사하는 것보다 훨씬 실용적인 선물이었다.

“하늘이 도와야 할 텐데 말입니다.”

한지호는 혼잣말처럼 내뱉은 말을 중얼거리며 의자에 앉았다.

머릿속으로는 삼칠근을 이용해 어떻게 약침을 만들지 구상하고 있었다.

최치우는 초조해 보이는 그를 위해 한방차를 우려내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윽한 한방차의 향이 3층을 은은하게 물들였다.

하루 동안 너무 많은 일을 겪은 한지호의 마음도 편안하게 풀리는 것 같았다.

아직 오늘은 끝나지 않았다.

그러나 고해진을 직접 보고, 삼칠근이라는 약초를 수배하기까지 꽤 많은 진척이 있었다.

갈 길이 멀지만 목적지를 향해 흔들림 없이 뛰어가는 중이다.

“한 잔 마시게. 비행기 타고 오느라 피곤했을 터인데.”

“감사합니다. 사장님밖에 없습니다.”

“커흠, 빈말이라도 듣기 좋구만.”

한지호는 쑥쓰러워하는 최치우의 얼굴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진심이 담긴 따뜻한 한방차가 그의 피로를 풀어줬다.

남은 세 시간, 삼칠근을 기다리며 머릿속에서 약침의 정수를 가다듬어야 한다.

삼칠근이 왔을 때 이것저것 고민을 시작하면 너무 늦다.

마음은 여유롭게, 머리는 바쁘게.

누군가는 잠자리에 들었을 서울의 밤, 한지호는 1분 1초를 아껴 쓰고 있었다.

그렇게 고요한 가운데 시곗바늘이 멈추지 않고 움직였다.

다행히 약속 된 시간에 늦지 않고 삼칠근이 배송됐다.

약재 퀄리티에 대한 염려는 기우였다.

한밤에 퀵 서비스를 통해 도착한 삼칠근은 흠잡을 구석이 없었다.

구석구석 살펴본 최치우가 엄지를 치켜올렸고, 한지호가 향을 감별해도 만족스러웠다.

삼칠근은 가지의 분지가 3개이고, 각 분지마다 7개의 잎이 달린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자연산 그대로 3개의 분지마다 7개의 이파리가 달린 모습이 신비로웠다.

“가짜로 만든 변조품이나 인위적으로 키운 놈은 얼마든지 쉽게 구하겠지만, 진짜 자연이 품은 삼칠근을 몇 시간만에 얻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지.”

“사장님 덕분입니다.”

“커허허, 생색을 내려던 건 아닐세. 삼칠근으로 치료를 받을 환자에게 운이 따르는구만.”

“그 운이 끝까지 따르기를 바라야죠.”

한지호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만약 좋은 퀄리티의 삼칠근을 구하지 못하면 단삼(丹蔘)을 사용할 작정이었다.

약효가 아쉽긴 해도 단삼이 삼칠근의 대용품으로 많이 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약침을 만드는데 집중하면 된다.

최치우의 도움으로 꼭 필요한 약재를 수월하게 구했다.

남은 과정은 온전히 한지호의 역량으로 헤쳐 나가야 한다.

역할을 다한 최치우를 집으로 돌려보낸 그는 혼자남은 3층에서 운기조식을 했다.

몰려드는 피로와 잠을 좇아내기 위해서였다.

단전의 내공을 한 바퀴 돌리고 나니 몸이 한결 개운해졌다.

하루쯤은 잠을 자지 않아도 크게 무리가 없을 것 같았다.

“바로 움직여볼까.”

한지호가 삼칠근을 달이기 시작했다.

대충 뜨거운 물에 약재를 담그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약 기운이 푹 우러나오도록 정성을 다해 지켜봐야 한다.

너무 뜨거우면 약효가 날아가고, 반대의 경우 약재의 정수가 우러나오지 않는다.

평소보다 더 신경을 써야 하는 이유도 있다.

삼칠근으로 탕약을 만들 게 아니라 약침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탕약을 우려내는 방식은 약침에 효율적이지 않다.

약침은 크게 두 종류로 나뉜다.

약액을 작은 캡슐에 넣은 다음 침을 꽂으며 몸 안으로 주입하는 방식이 있고, 침 전체에 약액을 코팅하듯 묻혀서 쓰는 방식이 있다.

한지호는 두 가지 방법을 다 사용해서 고해진에게 약침을 놓을 계획이었다.

그는 손수 약재를 달이고 우려내어 약액(藥液)을 만들고, 그것을 약물자입기에 집어넣었다.

또 원래 주로 쓰는 장침은 아예 삼칠근 잎 안에 집어넣고 열을 가했다.

약초 이파리가 가열되면 짓이겨지며 점성을 띈 액체가 되는데, 그 자체를 침에 입히는 것이다.

말은 쉽지만 잠시도 신경을 딴 데 팔지 않고 집중해야 하는 일들이다.

한지호는 밤을 꼬박 새며 동이 틀 때까지 3층을 떠나지 않았다.

아침이 완연히 밝으면 이렇게 정성스레 만든 두 종류의 약침을 들고 S대 병원으로 갈 것이다.

하루, 정확히 따지면 저녁부터 아침까지 반나절만에 고해진을 치료하기 위한 해법을 찾았다.

그의 해법이 통할지 여부를 떠나 정말 빠르고 과감한 처방과 결단이다.

남들과 다른 한지호의 의술이 또 한 번 시험대에 오를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

“집중을 위해 잠시 병실을 비워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고해진이 누워있는 S대 병원 특실로 다시 돌아온 한지호가 정중하게 부탁을 했다.

밤 새 삼칠근으로 약침을 만들어온 그의 표정은 사뭇 결연해 보였다.

삼칠근 약침은 단 하나밖에 없는 비장의 무기다.

이게 통하지 않는다면 다른 대안은 없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김진언 교수가 낮게 깔린 음성으로 말했다.

뒤이어 병실에서 밤을 지샌 고해진의 아내와 아침 일찍 찾아온 남궁훈도 걸어나갔다.

고해진에게 침을 놓을 준비는 끝났다.

김진언 교수와 간호사들이 고해진의 상의를 올려 놓았고, 침을 놓기 쉽게끔 자세도 바꿔줬다.

넓은 병실에 고해진과 단 둘만 남은 한지호는 약침을 잘 놓기만 하면 된다.

어떤 핑계도 될 수 없고, 누구의 탓도 할 수 없다.

확률 낮은 가능성에 도전하겠다고 밝힌 것은 한지호 자기자신이다.

만약 약침의 결과가 좋지 않으면 피할 구석 없이 책임을 져야 한다.

물론 그는 처음부터 주어진 책임을 피할 생각 따위 하지도 않았다.

“후우-.”

짧게 숨을 들이마신 그가 첫 번째 침을 들었다.

먼저 놓을 것은 삼칠근으로 코팅을 한 침이다.

그는 삼칠근 이파리 사이에 침을 넣고 열을 가해 약 기운을 두루두루 묻혔었다.

약물자입기로 약액을 투입하는 침은 화룡점정을 찍듯 사용할 것이다.

우선 삼칠근의 기운으로 코팅한 침을 이용해 막혀 있는 혈도를 열 예정이었다.

꾸우욱!

첫 번째 침이 고해진의 피부를 파고들어갔다.

한지호는 눈을 부릅뜨고 어느 때보다 천천히 침을 놓고 있었다.

단순히 침으로 혈도를 자극하는 것에서 그치면 안 된다.

삼칠근의 약 기운이 탕약을 먹는 것 이상으로 고해진의 몸 안에 흡수 되게 만들어야 한다.

꾸욱-

한지호는 신중하되 오래 망설이지 않고 두 번째 침을 꽂았다.

먼저 상반신의 기운이 원활하게 통하도록 목 아래에서 단전까지 일차로 침을 놓는 중이었다.

그 다음에는 약물자입기를 단 침으로 심장 주위를 자극하며 삼칠근 약액을 직접 주입할 것이다.

한지호는 이미 강을 건넜고, 돌아갈 다리는 끊어졌다.

고해진은 그에게 있어 배수의 진이다.

하나씩 침을 놓는 한지호의 눈빛이 결사항전을 각오한 장수처럼 날카롭게 번득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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